피아니스트 이진상, 운명을 마주하는 법

운명을 마주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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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7월 9일 4:49 오후

그가 바라보는 피아노, 그리고 피아니스트의 삶

©현효제

 

 

 

 

 

 

 

 

 

 

 

 

 

 

 

 

 

 

 

 

 

 

 

 

“운명이라면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요.” 인터뷰의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이진상에게 피아노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떨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손을 놓고 밀쳐내려고도 해봤지만,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몇 번을 던져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부메랑처럼.

2009년 스위스 게자 안다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함과 동시에 슈만상·모차르트상·청중상 등 특별상을 싹쓸이하며 밝은 미래가 보장된 젊은 피아니스트. 연주자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커리어를 쌓아갔지만, 그 시간동안 그는 조용히 방황했다. ‘성실히 방황했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의 궤적은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갔지만, 그 파형의 중심에는 늘 피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진상은 방랑의 파문을 점점 넓혀갔다. 외로운 독주자의 삶에 지쳐있을 때 실내악이 주는 기쁨을 깨달은 그는 독일의 피아노 3중주단인 베토벤 트리오 본(Beethoven Trio Bonn)의 멤버가 됐다. ‘소리 나는 기계’로서의 피아노를 탐구하고자 스타인웨이 오스트리아에서 피아노 테크닉과 제작을 공부한 뒤, 스타인웨이 함부르크 본사에서 근무하며 피아노 제작에 참여했다. 그리고 2018년 현재, 그의 좌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음악원의 30대 젊은 교수다.

6월 중순, 1학기가 끝나가는 한예종 음악원의 그의 연구실에서 이진상을 만났다. 인터뷰 도중 한 학생이 그에게 질문하러 방문을 두드리자, 그는 내게 양해를 구하고 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지막하게 들리는 그의 조언은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한 말들이었다. 교수로서의 삶은 그가 그리는 새로운 궤적이 될 터. 평창대관령음악제와 홍콩·독일 등에서 예정된 연주로 여전히 바쁜 일정을 보내는 그는, 피아노와 함께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이제는 받아들인 듯하다. 물론, 그의 항해가 여기서 마무리될 거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올해부터 한예종 음악원 전임 교수로 임용되어 이제 첫 학기를 마쳤다. 한 학기를 보낸 소감이 궁금하다.

처음엔 생소했다. 예전과 똑같은 건물에 똑같은 교수님들이 그대로 있는데, 나만 학생에서 교수로 바뀐 것 같다. 아직 많이 배우는 중이다. 프로페셔널 연주자로서 수년간 지냈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신입사원 아닌가.(웃음) 교수님들에게도 배우고, 학생들에게서도 배운다. 졸업한 모교에 선생으로 돌아왔으니, 설레면서도 책임이 막중하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곧 후배이기도 하니 애정이 남다르겠다. 좋은 피아니스트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자아실현’과 ‘자아성찰’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자아성찰은 자신을 돌아보고 수양하고 훈련하는 것, 즉 테크닉과 악보에 대한 존중, 큰 틀에서의 원칙을 말하고, 자아실현이란 자신의 개성과 감성을 표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는 자아성찰과,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과 개성을 표현해내는 자아실현이 고르게 이뤄져야 한다.

 

(학생들이 롤링 페이퍼 형태로 나눠 쓴 편지가 연구실 벽에 붙어 있었다)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수업이 재미있었다’고 적었는데, 어떤 수업이었나?

한 학기 동안 연주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이 선물해 준 편지다. 보통의 연주 수업은 한 학생의 연주를 듣고 다른 학생들이 비평을 주고받는 식인데, 나는 이번 연주 수업을 인터뷰 형태로 진행했다. 예컨대 KBS ‘유희열의 스케치북’처럼, 연주와 인터뷰를 병행하는 것이다. 음악적인 질문도 하고 음악 이외의 질문도 하며 자유롭게 진행했다. 이렇게 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내 입장에서는 임용 첫 학기인만큼 학생들을 좀 더 빨리 파악하고 싶었다. 다른 이유는, 이제는 아티스트의 소통 능력이 대두되는 시대인데,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나부터도 데뷔 초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부족해 고생했다. 학생들이 흥미를 갖고 임해서 다행이다. 솔직히, 혼내지 않아서 재밌었다는 게 아닐까 싶다.(웃음)

 

국제 콩쿠르를 준비하는 학생도 많지 않나. 본인도 콩쿠르 우승자이니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학생들 각자가 스스로 알아보고 있고, 어떤 대회를 나가고 싶다고 확고히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학생들은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들을 믿고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예전의 나는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려고 용을 썼는데.(웃음)

 

어린 연주자들이 콩쿠르 입상에 매진하는 것에 대해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

콩쿠르에는 나이 제한이 있으니 조급해지고, 그래서 보여주기에 치중한 연주를 하게 되고, 그래서 내실이 부족해지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음악만이 경쟁의 품목은 아니다. 소설가들, 시인들, 미술작가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올림픽도 그렇고. 경쟁은 인류의 오랜 역사와 함께해온 본능이다. 음악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죄악시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콩쿠르가 아니더라도 경쟁은 이미 다른 여러 형태로 여전히 존재한다. 에이전시 계약, 공연장 대관, 학교 등 경쟁은 어디에나 있다. 콩쿠르의 경쟁만 부정하는 것은 한쪽만 바라보는 것일 뿐이다. 음악을 가지고 경쟁을 하는 것에 대한 의견은 늘 분분할 수밖에 없다.

 

여러 갈래의 길 위에서

2015년 베토벤 트리오 본의 새 멤버로 합류해, 지난해 스비리도프(1915~1998) 앨범을 발매했다.

독주자로서의 삶은 언제나 힘들고 외롭다. 황홀한 순간도 있지만, 무대 위에 혼자 있다는 건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걸 이겨내야 하는 것이 연주자의 숙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에 비해 실내악은 순수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일회성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실내악 연주가 아닌, 꾸준히 함께하는 팀을 만나 소속감을 갖고 활동하고 싶었다. 현재 베토벤 트리오 본은 2020년에 있을 베토벤 탄생 250주년에 발매할 베토벤 피아노 3중주를 녹음하고 있다. 가을에도 녹음을 위해 출국할 예정이다.

 

‘그만두고 싶었던 때가 많았다’고 했는데.

그만두는 것은 굉장한 도움이 된다.(웃음) 여러 번 그랬고, 제대로 크게 그만둔 적이 몇 번 있었다. 독일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실내악을 그때부터 좋아하기 시작했다. 좋은 성악가들을 많이 만나서 함께 연주하는 것도 정말 좋았다. 삶의 낙이었다. 독주 피아니스트의 삶을 그만두고 싶더라. 모든 대외적인 것들과 스포트라이트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독주자가 감당해야 할 무게가 무겁게 다가왔나 보다.

‘키신이나 소콜로프처럼 속세와 인연을 끊고 음악에만 몰입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지만, 인간적인 삶을 살고 싶어졌다. 유하고 인간적인 사람이 되려면 삶 자체가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프고 괴로워하면서 음악을 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더라. 피아니스트는 건강한 직업은 아닌 것 같다. 생활이 불규칙하고, 오래 앉아 있고, 예민하고. ‘건강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하다.

 

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연주자가 아마추어가 되고 싶다니.

연주 일정이 다 잡혀있는 상태였지만, 나는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내려놨던 적이 있다. 더 이상 잘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저 취미로 연주한다는 마음으로 ‘오늘 이 연주에서 뭘 어필할 것인가’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나는 프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취미 연주자다’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2012년쯤이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 뒤로 사람들이 내 연주를 더 좋게 들었다는 것이다.

 

지금 이야기한 몇 번의 지점들은 결국 슬럼프였나?

글쎄, 운 좋게 잘 넘어가서인지 슬럼프라고까지 생각이 들진 않는다. 그리고 난 그 당시 진짜로 포기를 했었다.(웃음)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아등바등 몸부림쳤다면 스스로 많이 다쳤을 것 같다. 다 내려놓고, 좋아하는 만큼만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다시 좋아졌다. 무언가가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면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스타인웨이에서 피아노 테크닉 및 제작과정에 참여한 것도 ‘그만둠’을 위한 것이었나.

피아니스트를 관두고 전업 기술자로 살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실제로 스타인웨이 함부르크 본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내가 피아노를 시작한 계기는, 음악이 좋거나 뭘 표현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소리 나는 기계’가 신기해서였다. 피아노를 뜯어보고 싶었고, 어떻게 소리가 나는지 궁금했다. 학교와 무대에서 테크니션들과 만날 기회가 생길수록, ‘피아니스트들은 피아노의 메커니즘에 대해 꼭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악 연주자 중 자기 악기에 대해 가장 모르는 게 피아니스트라고 하지 않나.

맞다. 피아니스트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건 결국 해머가 어떤 속도로 어느 정도의 힘으로 현을 때리느냐의 문제다. 악기를 다루는 것은 지극히 과학적인 것이다. 과학적이라고 굳이 분류해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이, 과학과 예술은 늘 함께였고, 둘이 구분된 건 인류 문명의 역사상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진상의 딴짓의 역사’를 들어보니, 결론적으로는 긍정적인 딴짓이었다.

그런 것 같다. 실내악에 매진했던 시절, 피아노 제작에 빠져 있던 시절 모두 지금의 내게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또 해보고 싶은 딴짓이 있다면?

오르간 제작자나 톤마이스터가 되고 싶기도 하고, 음향건축에도 관심이 많다. 다음 차례의 딴짓이 있다면 현실적으로는 아마 녹음·음향 부분이 되지 않을까. 기술의 발전에 관심이 많다. 자동차도 발전하고 휴대폰도 발전하고 냉장고도 새로워지는데, 피아노는 100년 넘게 변하지 않고 있다. 언젠가 변화가 또 한 번 찾아오리라 생각한다. 그때가 와서 내가 무언가 참여할 수 있다면 좋겠다.

 

글 이정은 기자 사진 프레스토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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