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이방연애’ & ‘관통시팔’

몸, 커밍아웃 혹은 번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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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9월 4일 12:00 오전

‘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THEATER

‘이방연애’ ©창작집단3355

매일매일 신기록을 경신하는 더위였다. 제1회 페미니즘연극제가 막을 내렸다. 한 달 넘게 기록적인 폭염과 함께했다. 매주 토요일 대학로에서는 불법촬영 편파수사 비판 여성집회가 열리고, 미투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올 한 해는 여성운동의 기록적인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광장에선 뜨거운 목소리가, 극장에서는 차가운 성찰의 목소리가 가득 찼던 시간이다. 길거리에 나서면 눈이 타버릴 것 같은 불볕더위가, 극장에 들어서면 차가운 암전이 관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페미니즘연극제의 마지막 작품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또 다른 공간인 삼일로창고극장 재개관작들을 찾아보면서, 변화의 물결들을 느껴본다.

‘이방연애’ ©창작집단3355

‘이방연애’, 커밍아웃과 ‘자기만의 방’

‘이방연애’(7월 19~29일 달빛극장)의 공연제목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퀴어 여성 연극의 낯선 땅, ‘이방(異邦)’을 뜻하기도 하고, 일반인의 ‘일반(一般)’과 구별해서 동성연애자들이 스스로를 ‘이반(二般 혹은 異般)’이라고 부르는 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말 그대로 ‘방(房)’, “집이 아니라 방”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술가로서, 퀴어 여성으로서, 성별 임금 격차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퀴어 여성 예술가의 주거문제를 다루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페미니즘 비평서의 고전 ‘자기만의 방’의 퀴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보증금 500에 월세 20 옥탑방”에 살거나, 거실이 있는 “집다운 집”에 살기 위해 월세 60만 원짜리 집으로 이사한 뒤 매달 월세를 내기 위해 “나를 갈아 넣는” 생활을 이어가거나, 결혼을 했지만 신혼부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레즈비언 커플 부부의 먹고사는 문제와 연애가 현실 문제로 등장한다. 이념이나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 속 퀴어 여성의 이야기다. 실제 퀴어 여성 배우가 등장해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무대 한쪽에 연출가도 직접 출연해서 자리를 잡고 있다. 연출가는 무대 한쪽에서 “먼저 이야기 좀 나누고 있어 주시겠어요?” 스크린에 직접 손글씨를 쓰면서 장면전환을 하고, 관객 진행도 한다. 공연 시작 전 관객들에게 종이와 펜을 나누어주고 각자의 방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스크린에 관객들의 그림을 한 장씩 보여주면서 공연을 시작한다. 객석에는 여성 관객들이 많다. 2030세대 젊은 여성들의 방이 스크린에 비춰진다. 매일매일 만나는 관객들의 방이 공연과 함께한다. ‘자기만의 방’이라는 매개 하나로 공연자와 관객들이 실시간으로 강하게 연결된다. 사소하지만 효과가 강한 극적 장치였다.

“이쪽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은 아니니까 우린 스치고 지나가도 서로를 모른다. 그래서 더 외롭다.” “세상이 하나의 집이라면 나는 방이 아니라 문지방 같은 데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먼 훗날 ‘40대의 나’가 ‘10대의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너 진짜 열심히 살고 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 얇은 비닐옷 하나 걸치고 걷고 있는 것 다 안다. 그래도 이 길의 끝에 문 열고 들어갈 네 방이 있다.”

서로의 말을 듣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공연이 진행된다. 독립해서 ‘자기만의 방’을 얻게 되고, 유튜브를 보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유튜브를 통해서 커밍아웃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1020세대의 ‘혼밥(혼자 먹는 밥)’ ‘혼술(혼자 먹는 술)’ 문화는 곧 ‘혼밥 동영상’ ‘먹방(먹는 방송)’의 유튜브 문화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유튜브 문화의 ‘자기만의 방’으로 새롭게 읽히는 순간이었다. 유튜브 문화 자체가 수많은 ‘커밍아웃(coming out of the closet)’, 곧 수많은 ‘자기만의 방들’인 “벽장 속에서 나온” 이야기들이었다. 문지방을 넘고, 문턱을 넘는 이야기들이었다.

 

‘관통시팔’ ©이강물

‘관통시팔’, 번아웃의 ‘소진되는 몸’

‘관통시팔’(7월 13~15일 삼일로창고극장)은 삼일로창고극장 재개관 기념공연이다. 삼일로창고극장은 1975년 개관했다. 삼일로창고극장의 모태가 된 극단 에저또(연출가 방태수)의 1966~1977년 자료의 기념전시 ‘이 연극의 제목은 없읍니다’(큐레이터 김해주)도 재개관 프로그램에 함께 한다. 전시는 삼일로창고극장 한쪽에 마련된 갤러리에서 9월 22일까지 계속된다. 1970~1980년대 관객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창고극장 건물 입구의 카페 ‘섬’ 위치에 전시장이 들어선 셈이다. 카페 섬은 없어졌지만, 새로운 전시장에서 1970년대 명동 아방가르드 연극의 생생한 사진들을 다시 볼 수 있다.

‘관통시팔’은 재개관 기념공연 시리즈 중 유일한 무용극이다.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 예술감독 김보람이 직접 출연하고, 안무하고, 연출했다. 삼일로창고극장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인 ‘빨간 피터의 고백’에서 배우 추송웅이 혼자 기획·제작·연출·연기를 하는 일인극으로 4개월 동안 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전설적인 무대를 오마주한 방식이다.

“부럽다, 18!” 개관공연에 참여하면서 추송웅 일인극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되면서 김보람이 맨 처음 내뱉었던 말이라고 한다. 퍼포머로서 추송웅은 욕이 나올 정도로 부러운 대상이라는 것이다. ‘관통시팔’은 김보람이 춤을 추는 자신의 현재를 관통하는 18개의 장면을 보여준다.

‘관통시팔’ ©이강물

김보람의 춤은 쉽고 재밌다. 자명종 소리가 울리고, 화장실을 가고,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고, TV를 보고, 잠이 드는 장면을 지쳐 쓰러질 때까지 무한반복하면서 진짜로 헉헉대는 몸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상에 지쳐가는 몸을 보게 한다. 온몸이 땀에 젖어 달라붙는 옷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하얀 우주괴물 같은 장난도 치고, 관객에게 한쪽 소매를 잡아당기게 해서 옷을 벗기도 한다. 16번 ‘후회’ 장면에선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되었나?” 음성파일에 맞춰 우아한 ‘백조의 호수’ 발레를 추기도 한다. 몸을 쓰는 사람 특유의 단호함과 심플함으로, 그러면서도 관객과의 소통에 자유롭고 유쾌한 모습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장면마다 주제가 되는 움직임의 한 단위가 시작되면 지쳐서 헉헉 소리가 날 때까지 무한반복한다는 점이다. 마이클 잭슨의 ‘데인저러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의 익숙한 음악이 부분부분 함께하기도 하지만, 어느 한 구간은 오로지 헉헉대는 숨소리와 느려진 동작이지만 끝까지 정확한 동작을 수행하는 몸을 보여준다. 무한반복하는 ‘소진되는 몸’이지만, 다 태워버린 ‘번아웃’ 상태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김보람의 언어를 읽게 한다. 묘하게 유튜브의 수많은 ‘자기만의 방들’이 겹쳐졌다. 유튜브 공간들에 담긴 몸들이 느껴졌다.

글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페미니즘연극제·삼일로창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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