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 ‘자장가’와 가사

잘 자거라 우리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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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2월 17일 9:00 오전

GAEKSUK ARCHIVE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송현민(음악평론가)

 

자장가는 동요이지만 결국 노래를 부르는 이는 어른이다.

광복 후 해방공간인 1948년, 김순남은 이 노래에 무엇을 담았나

 

1944년 제1회 작곡발표회를 통해 악단(樂壇)의 단단한 입지전을 치른 김순남(1917~1986)은 해방공간에 수많은 노래들을 내놓는다. 도적처럼 찾아온 해방이 만든 그 공간에서 김순남은 광장과 인민의 작곡가였다. 그는 만인이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지었고, 그 가사들은 사회참여적 제스처를 취한 문인들이 낳은 것이었다. 그 노래의 심폐는 그 시대에 담긴 공기를 먹으며 뛰었고, 그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공의 공기를 그리워하며 노래를 짓기도 했다.

1945년 김순남은 김태오가 작사한 ‘건국행진곡’을 비롯한 ‘우리의 노래(이동규 작사)’ ‘농민가(박아지 작사)’ 등을 작곡했다. 수많은 문인들이 그의 음악을 위해 ‘노래가 되려는 시’를 썼고, 일찍이 김순남과 남쪽에서 함께 지냈던 임화를 비롯하여 북으로 떠난 여러 시인들-박세영, 조령출, 정서촌, 박찬모, 최석두 등-은 김순남의 곡으로 이땅에 부활하고는 했다. 그가 당시 지은 노래의 수가 1946년 초반까지 30여곡이 넘었고, 같은 해 연말까지는 50여곡이 될 정도로 김순남은 이 분야에 집중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중 임화(1908~1953)는 김순남의 이념적 페르소나와도 같았다. 아니, 김순남이 임화(1908~1953)의 음악적 페르소나였을 것이리라. 김순남은 임화가 지은 글들을 가사 삼아 ‘해방의 노래’(1945) ‘예맹의 노래’(1946) ‘서반아혁명국제’(1946) ‘인민항쟁가’(1946) ‘남조선형제여’(1946) ‘조선민주애국청년’(1947)을 해방공간에 내놓았다.

 

직접 쓴 가사가 남긴 의문

노래를 짓는 자는 몇 개의 궤적을 보인다. 시로 태어났지만 그 안에 잠재된 노래로의 가능성에 탐침을 밀어 넣어 음악의 가능성을 깨우거나, 선율의 기둥만 세운 미완의 집에 시인으로 하여금 가사를 들여와 제 집을 완성한다. 세상의 수많은 노래들은 거의 두 과정을 통해 태어난다. 김순남의 노래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다른 경우도 있다. 가사 짓기와 곡 짓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다. 시인이 읊조리며 시를 쓰던 도중 행간의 여백에 꿈틀대는 노래로의 가능성을 못 이겨 음표를 새겨 넣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작곡가는 음표를 그리던 중 가사의 옷을 입히기도 한다. 시 쓰는 자는 시 쓰기에 지친 나머지 음악을 갈구하고, 선율을 짓는 자는 다 지은 곡이 제 스스로 울려 퍼지는 환청에 시달리던 도중 그 속으로 가사가 둥지를 트고 들어앉게 하여 환청의 소리를 현실의 소리로 바꾸는 것이다.

김순남은 앞서 말한 전자의 방식으로, 또 후자의 방식으로 위의 곡들을 지었다. 그리고 가사 짓기와 곡 짓기를 동시에 진행하기도 했다. 바로 자장가 시리즈다. 1948년 세상에 내놓은 3곡의 자장가 중 1번과 2번의 곡을 썼고 동시에 가사도 직접 지었다(3번은 박찬모의 시를 사용했다). 이러한 자장가는 김순남의 작품 중 가사를 직접 쓴 유일한 작품으로, 그가 최초로 가사를 쓴 노래-문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장가의 가사를 직접 썼던 것이었을까.

 

왼쪽에 앉은 이가 김순남. 1951년 러시아 유학중 허진과 함께

자장가의 리얼리즘

자장가를 불러본 자는 안다. 이 노래는 아동문학의 한 갈래인 동요에 속하지만 아이가 부르지 않는 동요라는 것을. 아이는 자장가를 들을 뿐, 노래하는 주체는 부모 즉, 어른이다. 그런 점에서 자장가는 동요이지만 어른의 노래다. 자장가를 듣는 아이에게 자장가 속의 노래‘말’은 (‘말-길’로서의) ‘길’ 없는 말일 뿐이다. 아이에게 그 노래는 소리의 유무이며, 익명의 중얼거림일 뿐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이 노래에 자신의 현실과 이루지 못한 꿈을 녹여 넣었다. 제주의 자장가는 이렇게 불린다.

 

웡이자랑 웡이자랑 내팔재가 궂어지여

이런시상 만나근에 느도고생 나도고생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어멍 날날적의

무신날에 날로나근 행복시리 아니뒈연

설운아기 탄생하연 모든고생 하염고나

 

이 자장가에는 부르는 이의 복잡한 심정과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노래를 부른 이는 전통사회의 여성이었을 것이다.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의 지위는 매우 낮았고, 육아의 임무는 여성에게만 지워졌다. 따라서 그녀들은 가사노동과 육아를 모두 감당해야만 했다. 삶의 힘겨움과 남존여비 사상에 억눌린 여성의 감정은 아기와 단 둘이 있는 공간에서 자장가로 자연스레 표출되었다. 이로써 자장가는 아이가 꿈으로 도입하는 길목에 놓여 있는 초현실적 감각을 수반한 노래일 뿐만 아니라, 어른의 현실이 반영된 리얼리즘의 노래가 된다.

김순남에게도 그랬다. 인민의 현실을 ‘담은’ 그리고 ‘닮은’ 노래를 짓고자 했던 김순남에게 하여 자장가는 리얼리즘 그 자체였다. 그 역시 자신이 직접 가사를 지은 세 곡의 자장가에 현실을 담았다. 대신 아직 도래하지 못한, 남북을 가르는 이데올로기의 장애물에 걸려 제 발이 꼬여버려 이곳에 도착하지 못한 미래적 현실이 만들 ‘리얼리티’를 몽상하기 위해서 자장가를 지었다. 그 노래를 부르며 그는 살아내고 있는 현실이 아니라, 살고 싶은 현실의 청사진을 앞당겨 그렸던 것이다. ‘자장가Ⅰ’의 1절이다.

 

잘 자거라 우리 아기 귀여운 아기

엄마 품은 꿈나라의 꽃밭이란다

바람아 불지 마라 물결도 잠 자거라 아기 잠든다

우리 아기 꿈나라 고개 넘으면

엄마 가슴 위에 눈이 내린다

잘 자거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야

뒷동산에 별 하나 반짝여준다

 

‘엄마 품’처럼 짓고 ‘꿈나라’처럼 세운, ‘꽃밭’으로 채색한 ‘뒷동산’. 그 이상향은 그가 처한 현실의 반대편에 위치한 유토피아였다. 김순남이 이 곡을, 아니 이 가사를 지을 적에 그의 상황은 어떠했던가. 해방이 된 지 여러 해가 흘렀지만 시대는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오른편에 선 자는 오른손의 편리함과 손아귀의 힘으로 시대를 한편으로 몰아가려 했고, 왼편에 선 자는 사상의 심장이 뛰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던 중 미군정과 관계 당국은 좌익운동을 비합법화로 규정하였고, 좌익세력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이를 지지하는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인사들이 검거·투옥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두 단체에 관계하면서 조선음악가동맹의 작곡부장으로 활약한 김순남의 심장은 시대적 분위기로 옥죄이게 되었다. 임화와 함께 지은 ‘인민항쟁가’의 주인이자 남조선노동당의 당원이었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위원이며 조선음악가동맹의 작곡부장이었던 김순남. 그로 인해 그는 숨어 살아야 했다. 해방둥이 딸 김세원을 지척에 두고도 만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 그는 딸이 살아가야 할 이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며 ‘자장가Ⅰ’과 ‘자장가Ⅱ’의 가사를 직접 쓰고 곡을 붙였다.

 

어른의 밤과 다른, 아이의 밤

하지만 ‘자장가Ⅰ’을 딸에게 불러주는 김순남에게 엄마 품-꿈나라-꽃밭으로 이어지는 뒷동산은 현실이 될 수 없는 유토피아적 풍경이었을 뿐. 그래서 자장가를 부르는 김순남은, 아니 이 노래를 부르는 자는 곧 기원하는 자이기도 하였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적 유토피아가 자라날 아기에게는 지극한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그래서 김순남에게 이 시기는 밤의 시간이었다. 그의 시간만 밤이었던 것은 아니다. 모두가 밤이었다. 이용악에게 그 시간은 ‘초조로이 돌아가는 좁은 길’이었거나, 이상에게도 밤은 ‘갈만한 길을 잘 내어주지 아니하는 협착’한 시간이었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으로, 합리적인 것이 비합리의 세계로, 현상이 익명의 시간으로 이행되는 사건의 시간이었다. 식민지로부터 이어지던 밤에, 도적처럼 찾아왔던 광복이 잠시 밤의 시간을 수직적으로 단절했지만, 그 밤의 기운은 오히려 그 단절면을 통해 해방공간에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조선과 해방공간에서 잠을 자던 아기들에게 밤의 시간은 달랐다. 아이들에게 밤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상관없이 꿈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잠의 시간이었고, 고요한 성장이 수반되는 시간이었다. 또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물활론의 시공간이었다. 아이들에게 밤은 ‘검은 도화지’였고 동심의 색칠을 받아들일 텅 빈 가능성의 시공이었다. 아이들은 이러한 밤의 상상력과 잠의 시간을 입으며 무럭무럭 성장하였다. 그래서 어른의 밤과 달리 아이들의 밤은 ‘밝은 밤’이었고, ‘빛의 어둠’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른들은 이렇게 잠의 초입에 서있는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었고, 잠과 뒤섞인 아이들의 숨소리를 지켜들으며 새벽을 지나 찾아올 여명을 기다렸다. 그 빛은 식민지조선에선 해방을, 해방공간에선 정돈과 화합을 상징했고, 아이들이 얼른 자라서 그 빛을 이 땅에 찾아오리라 믿고 바랐다. 김순남은 이러한 바람을 노래에 담는다. ‘자장가Ⅰ’의 2절이다.

 

잘 자거라 우리 아기 귀여운 아기

엄마 품에 고이 안겨 어서 잠자라

사나운 까마귀 떼 모진 바람 몰아다 너를 울린다

너 자라서 이 겨레의 햇빛이 되어

엄마의 이 눈물을 씻어 주려무나

잘 자거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야

뒷동산에 별 하나 반짝여준다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엄마의 이 눈물을 씻어 주려무나’)은 안타까운 현실에 눈물 흘리는 김순남 자신의 모습이다. ‘사나운 까마귀 떼’가 몰아오는 ‘모진 바람’은 그를 둘러싼 해방공간의 정국일 것이다.

하지만 지쳐버린 밤에 기대어 있는 그와 달리 밤이 주는 잠을 먹고 자라는 아이는 언젠가 ‘겨레의 햇빛이 되어’ 이 상황을 해결하는 존재가 되리라 믿는다. 그래서 자장가를 부르는 자는 기원하는 자가 되며, 기다리는 자가 된다. 그가 역시 곡과 가사를 직접 지은 ‘자장가Ⅱ’에도 이러한 기다림의 정서가 잘 배어 있다. 이상하게도 ‘자장가Ⅱ’는 ‘잘 자거라’라는 자장가의 가사나 ‘자장자장’이라는 자장가의 율적 조건을 단 하나도 갖추지 않았지만, 이 노래가 자장가로 제명되고 명명될 수 있는 것은 기다림의 정서가 흐르기 때문이다.

 

산넘어 들넘어 꽃피는 마을

끝나는 일터에 종이 울린다

강건너 동백꽃 누나 사는 섬

오늘도 흰구름 건너가건만

하늘에 기러기 찾아오는데

떠나간 아버지 언제나 오나

 

1948년에 출간한 가곡집의 표제도 ‘자장가’였다. 악보 중 일부

현실을 잠그는 노래, 꿈의 입구를 알려주는 노래

잠 못 자는 아이는 부모로 하여금 자장가를 부르게 한다. 잠들지 못하는 자와 잠들기를 원하는 자가 빚는 불면의 밤이다. 하지만 자장가를 부르는 부모는 괴롭지 않다. 현실의 문을 잠그고 꿈으로 들어가는, 초현실인 몽상의 세계로 이끄는 자장가가 있기 때문이다. 어른은 자신의 ‘어두운 낮’과 대비되는 아이들의 ‘밝은 밤’을 위해 자신의 심정을 담아 자장가를 부른다. 그래서 억압의 식민지이든, 혼돈의 해방정국이든 아이가 ‘콜-콜콜 잠자면서 몸이 자라고 냠-냠냠 꿈속에서 뜻이 자라’서 ‘눈물 많은 우리 집에 많은 복 줄’ 존재가 되길 바라고(‘신가정’ 1935년 6월호 132쪽), ‘자장! 우리애기 자장! 꿈에 한치 깨어 한치 자라고자라 세상에 제일 큰일 네가 해야’할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란다(‘신가정’ 1934년 6월호 200쪽). 만주 길림성에 설립된 민족학교인 광성중학교에서 1914년에 발행한 ‘최신창가집’에도 자장가가 실려 있다. 이 가사에도 김순남이 자장가에 녹여 넣은 기원의 그림자가 보인다. 아이가 얼른 자라 광복사업에 나서길 바라는 기원과 기다림. 이는 이 밤의 노래가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항일음악 330곡집’(민족문제연구소)에 수록된 이유이기도 하다.

 

장하다 자장자장 얼른 소학교

장하다 자장자장 발셔 중대학

박사동이 되고서 영웅동이 되여라

우리나라 광복사업에 아라 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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