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채동선·김재훈

바이올린을 든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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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2월 18일 9:00 오전

한국 작곡가 열전_2

 

동아일보 1939년 6월 4일자

음악을 비롯하여 예술의 역사를 보면 어떤 특정 세대로 세기의 기운이 몰려 그 세대에서 유수의 인재들이 튀어나오는 지점이 있다. 현재 20~30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인 김수연(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이지윤(슈타츠카펠레 베를린), 박지윤(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등이 전해오는 해외 오케스트라 악장 취임도 이와 비슷하리라 본다.

서양음악이 조선에 처음 유입되었던 때, 바이올린 연주자 세대 중 이같이 빛을 발한 세대가 있다. 홍난파(1897~1941), 채동선(1901~1953), 김재훈(1903~1951), 계정식(1904~1974)으로 대변되는 세대다. 당시 바이올린은 4개의 현으로 되어 있다고 하여 ‘사현금(四絃琴)’, 활로 현을 긋는 보잉을 일컬어 ‘끌다’라는 뜻을 써서 ‘제금(提琴)’  등으로 불리었고, 신문·잡지에 ‘바욜링’ ‘바요링’ ‘양깽깽이’ 등으로 표기되곤 하였다.

지금의 관점으로 일제강점기를 생각한다면 그 시기는 핍박과 억압, 그리고 가난의 시기이다. 하지만 유학을 다녀온 청년음악가들에 의해 조선에도 어느덧 ‘음악계’가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도 유학출신국에 따라 일본, 미국, 독일 등으로 파가 형성되기도 했다. 1937년 동아일보(12월 24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오기도 한다(※본문에 수록된 고(古)신문은 당시의 어투를 살렸음을 밝혀둔다).

‘원래 조선의 바이올린계는 연주진용 가운데서 가장 아카데미크한 색채가 농후한 것으로서 금년 여름 17년만에 독일서 돌아온 김재훈 씨를 맞이하게 되자 불원귀국하게 될 안병소 씨를 가하면 채동선 씨 계정식 씨 등 독일계통의 바이올린니스토가 단연 바이올린음악을 리드하고 잇음을 본다.’

이른바 ‘독일계통’이라는 것은 조선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다가 일본 유학을 거쳐 독일로 유학을 다녀온 학파를 일컫는 경우가 많았다. 홍난파는 일본과 미국, 채동선과 김재훈은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고, 계정식은 독일유학 후 독특하게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철학박사까지 취득하였다. 이들 중 홍난파, 채동선, 김재훈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연주자로는 물론 작곡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전문적인 작곡은 아니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주된 관점이다. 이들이 작곡을 할 수 있었던 환경을 살펴보면, 연주자와 작곡가의 구분이 희미했고, 연주할 수 있는 곡목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설령 그것을 연주한다고 하여도 서양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제대로된 경성의 관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조선적 감정’이 녹아 있는 작품을 직접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음악계를 논할 때 ‘창작’에 관한 문제도 늘 대두되곤 하였다. 당시 여러 음악회를 주최·주관하던 동아일보사는 1939년 6월 8일 부민관에 ‘제1회 전조선 창작작곡발표 대음악제’를 선보이며, 여러 기획 기사와 음악가들의 좌담회를 통해 창작과 작품의 빈곤함을 여론화했는데, 이를 통해 창작의 기운을 몰아가기도 했다. 이 발표공연이 실체를 드러내기 전인 1938년, 당시 작곡가 임동혁를 인터뷰한 동아일보 기사(12월 3일)를 살펴보자.

 

기자: 조선음악계에 잇어서는 아직 작곡방면에까지 손이 및지 안는 모양이라 보는데 어떳습니까.

임씨: 글세요. 동요와 유행가를 제외하면 채동선, 김재훈, 현 제명, 김세형 제씨의 작곡이 잇을 뿐이지요. 아, 안기영  씨 것도 있고…

기자: 주로 성악이 만습지오?

임씨: 조선에는 아직 관현악단이 없어 창작곡의 연주를 바랄  수 없는 것이 큰 원인이겟지오. 아직은 ‘소나타’ ‘심포니’ 를 작곡하는 분이 없어 섭섭합니다. 홍난파씨가 관현악 의 편곡을 만히 하시는데 그런 분이 장차 만히 써주시 겠지오.

기자: 조선에도 빨리 관현악단이 잇어야 하지 안습니까

임씨: 개인끼리 모여서는 성립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일본신 향(新響)은 지금 JOAK(동경중앙방송국)에서 매년 12만 원을 보조받는데 (…) 또 제일 먼저 지휘자도 있어야 하 겟고… 아직은 실현은 망연합니다.

 

이처럼 창작을 위한 환경이 좋지 않음을 시사화한 기사가 1930년대 후반의 것이니, 홍난파, 채동선, 김재훈이 작곡을 진행했던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은 더욱더 상황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해외에서 바이올린과 함께 작곡을 공부했지만, 작곡기술이 동요나 가곡, 바이올린 독주로밖에 구현될 수 없었던 이유는 위와 같이 여러 악기가 총체화된 관현악의 부재했을 뿐만 아니라, 독주와 관현악의 중간층위를 이루는 실내악 문화의 부재에서 오는 한계였다. 한마디로 연주할 수 있는 환경이 고려되지 않은 작품은 연주될 수 없었고, 작품 역시 사회적 파장과 의미를 획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곡은 그것을 연주할 수 있는 ‘자신’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채동선이 실내악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현악 4중주라는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번 호는 당시 연주자와 작곡가 양 길을 걸었던 홍난파, 안병소, 김재훈의 삶과 작품인생을 ‘바이올린을 든 작곡가’라는 주제로 살펴본다.

 

홍난파의 첫 작품, 야구응원가    

난파 홍영후(1897~1941)의 아버지 홍준은 미국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의 조선어 선생이었으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외국선교사들이 성서를 한글로 번역할 때 함께 하기도 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어릴 때 한학을 수학했던 홍난파는 1910년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중학부를 졸업했다. 1912년 조선정악전습소 성악과에 입학한 그는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했고, 이듬해 4월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같은 해인 1913년 서양악부 기악과로 재입학하여 김인식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후 1914년에 졸업했다. 이듬해인 1915년부터 그는 서양악부 교사로 임용되어 2년간 근무한다.

홍난파가 지은 최초의 음악은 1916년(18세)에 발표한 ‘야구가’로, 일종의 창가류이다.

‘배팅 들고 썩 나서니 원 스트라이크. 다시 한 번 갈겨 보아라, 홈런으로. 세컨드야 주의해라 공 굴러간다. 어화 홈인이로다’의 가사를 지닌 이 노래는 현재 한국 최초의 야구 응원가로 기록되고 있다.

19세의 홍난파는 의학에 뜻을 두고 1917년에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였지만, 1년 후 중퇴했고 도쿄 우에노음악학교(도쿄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나 예과에 입학한다. 1919년 그는 유학생의 신분으로 음악·미술·문학을 아우르는 예술잡지 ‘삼광(三光)’을 도쿄에서 발행하며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삼광’ 출간사에 “우리 조선은 깨는 때올시다. 무엇이던지 하려고 하는 때”라며 “음악은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닌 민족혼이 깃들여야한다”고 했다.

1919년 학교를 휴학한 홍난파는 3·1운동에 참여했다. 이를 이유로 이듬해에 학교복학이 거절당했고, 삼심한 그는 창작 단편집 ‘처녀혼(處女魂)’을 출간하여 문필가로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단편집 서두에 ‘애수’라는 곡명의 선율을 기재했는데, 이를 본 김형준이 가사를 붙인 것이 훗날 홍난파의 대표작 ‘봉선화’가 된다.

 

일본과 미국으로 계몽의 길을 찾아간 홍난파   

홍난파는 1922년에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했다. 이곳에서 그는 1929년과 1933년에 ‘조선동요백곡집’ 상·하권, 1933년 ‘조선가요곡집 1집’을 펴낸다.

홍난파가 음악가로 이름을 떨친 것은 1924년 1월 19일 YMCA강당에서 선보인 첫 번째 바이올린 독주회였다.

‘종로청년회 주최로 (···) 홍영후 씨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 입장료는 오십전 일원 이원 등 세 가지가 있고 곡목은 모두 유명한 것이라더라.’(동아일보 1924년 1월 18일)

문필가는 물론 음악평론가로도 활약하던 그는 1925년 ‘음악계’를 창간한다. 이는 음악·미술·문학을 다뤘던 ‘삼광’과 달리 음악을 전문적으로 다룬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로 기록된다.

그러던 중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26년 3월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진학했고, 재학 중이던 1928년에 도쿄신교향악단(현 NHK교향악단)에 입단해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1929년 귀국했다. 경성으로 돌아온 그는 연악회를 재정비하고 재즈밴드 ‘Korean Jazz Band’를 만들어 방송활동을 하는가 하면, 중앙보육학교(현 중앙대 전신) 음악과 주임교수로 취임했다. 이 해에 동요 ‘고향의 봄’ 등이 수록된 ‘조선동요백곡집’을 출간하며 동요보급에 힘썼다.

당시 조선의 음악계를 주름 잡던 안익태, 안기영, 현제명, 채동선, 김원복, 김영의, 독고선, 홍재유, 황재경 등과 함께 연주활동을 하던 홍난파는 1931년 미국으로 또다시 유학을 떠난다. ‘부내 정동 중앙보육학교의 음악교원으로 일즉 조선악단에 명성이 노픈 랄나 홍영후씨가 불원간 미주 유학을 가게되엇슴으로 동교에서는 오는 16일 씨에 대한 고별음악회를 주최하게 되엇다 한다.’(동아일보 1931년 6월 5일)

1931년 9월 미국 시카고의 셔우드 음악대학에 입학한 그는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고, 1933년에 조선에 귀국했다. 경성보육학교의 교수로 취임한 그는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선보인 귀국독주회에서 그리그·브루흐·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했다. 같은 해에 ‘조선가요작곡집’과 ‘조선동요백곡집’ 하권을 출간했으며, 홍성유·이영세 등과 함께 함께 난파트리오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홍난파의 노래를 부른다  

홍난파의 일생은 일제강점기 내로 한정되지만, 그의 음악들은 식민지기가 끝나면서 점점 부각되었다. 그가 남긴 ‘봉선화’ ‘금강에 살어리랏다’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의 가요(가곡)와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고향의 봄’ 같은 동요는 해방 직후 음악교과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교과서에 수록된 그의 작품들과 그 양은 그보다 조금 뒤에 활동했던 현제명, 박경호, 박태준의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다. 교과서에 실리는 일제강점기의 문학작품들도 홍난파의 작품과 유사한 대우를 받긴 하지만, 홍난파처럼 거의 독과점 상태를 성취한 사례는 문학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편, 노래가 아닌 기악작품은 상황이 좀 다르다. 몇 편의 기악곡을 남기긴 했으나 그 작품들은 본격적인 기악곡이라기보다는 노래의 선율을 악기로 연주한 소품에 가까우며, 이로 인해 예술적 완성도와 음악적 성취가 성악보다도 낮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곡들이 바이올린 독주곡 ‘애수의 조선’ ‘하야의 성군’ ‘로-만스’ ‘동양풍의 무곡’ 등이다. 문학적인 표제를 갖춘 각 작품들은 표제가 암시하는 바를 음악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24년 독주회에서 선보였던 ‘하야(夏夜)의 성군(星群)’은 4분의2박자, G장조, 42마디로 구성된 짧은 곡인데, 모든 음표들에 스타카토가 표기되어 있다. 이는 ‘한여름 밤의 별들’로 번역되는 제목과 그 내용을 묘사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악 작품들에 비해 가곡과 동요들은 한국어와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식 음악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결합시키고 있다. 특히 그 노래들은 대체적으로 가사의 음절 수에 따라 같은 리듬이 반복되어 듣기도 외우기도 편하다. 예를 들어 ‘봉선화’는 첫 가사인 “울 밑에서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를 이루는 4개음이나 4개 음절의 리듬이 12번 반복되며 한절을 완성하는 구조다. ‘①울 밑에선 ②봉선화야 ③네 모양이 ④처량하다/⑤길 고긴 날 ⑥여름철에 ⑦아름답게 ⑧꽃 필적에/ ⑨어여쁘신 ⑩아가씨들 ⑪너를 반겨 ⑫놀았도다’ 물론 그의 모든 노래들이 이러한 반복 구조로 되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복적 리듬 구조는 당시 한국어와 서양식 음악의 결합과 보급을 위한 ‘난파적 양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성악과 기악을 포함하여 150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악전대요’(1916) 같은 음악관련 서적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둘러싼 복잡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미국 유학 중에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대구 형무소에 4개월간 수감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제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하고 친일단체에 가입하기도 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그에 관한 위치 지우기와 좌표 설정은 시대에 따라 흔들리고 바뀌기 때문이다.

 

독일유학을 거친 스타 바이올리니스트, 채동선  

채동선의 귀국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9년 11월 21일자

채동선(1901~1953)은 홍난파보다 4년 뒤에 태어났다. 채동선과 홍난파는 조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을 떨쳤지만, 채동선의 삶은 홍난파와 좀 다르다. 홍난파가 클래식음악 외에 동요·가곡·재즈·대중가요·신민요는 물론 유성영화가 도입된 후 영화 ‘춘향전’이나 영화음악 ‘애련송’ 등까지 아울렀다면, 채동선은 바이올린 연주와 가곡 및 실내악 작곡 외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게다가 일제의 압박이 가혹해지던 일제 말기에 두 사람이 취한 태도도 그렇다. 3·1운동과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서 활동했던 전력과 친일 가요를 작곡한 양면 사이의 선잇기를 통해 홍난파를 바라보아야 한다면, 채동선은 일제의 압박에서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해버리고 칩거를 했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한 것은 수유리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지은 것이었다. 심지어 화훼농사도 했는데, 그가 재배한 꽃들은 너무 예뻐서 고가에 팔려나갔다고까지 한다. 밤에는 민요를 부지런히 채보했다. 물론 선조로부터 이어져온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점은 일제말기에 유명 음악가들이 걸은 세속의 노선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채동선은 순천 공립보통학교 졸업(1915) 후 경기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전신)에 진학했다. 재학 중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개인적으로 사사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감옥에 갇혔지만, 보성의 대지주였던 아버지가 힘을 써서 함께 했던 동지들을 남겨둔 채 그만 홀로 감옥에서 나오게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교를 그만둔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가운데 4년 동안 바이올린을 부지런히 배웠다.

음악으로 방향을 돌린 채동선은 1924년 독일로 유학을 갔고, 전공도 바이올린으로 바꾸었다. 그는 슈테른 음악원에서 리하르트 하르처에게 바이올린을, 부전공으로 클라테에게 작곡을 배웠다.

1929년 9월 귀국한 그는 조선의 스타가 되어 있었고, 11월 경성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일즉이 고등보통학교시대부터 바이올린에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야 동경류학시대에도 침식을 이저버리고 밤과 낫으로 바이올링에 정려한 결과 조도전문과[와세다대학]를 마칠 때에는 벌서 그의 명성이 일본악단에 울리게 되어 (···) 사도에 더욱 정진하겟다 하야 독일에서 륙년동안을 전공하얏다 한다.’(동아일보 1929년 11월 21일)

도쿄신교향악단에서 활동하던 홍난파가 귀국한 것도 같은 해였다. 이 시기는 홍난파가 작곡에 보다 몰두한 시기이기도 한데, 그것은 어쩌면 채동선의 재능과 천재성을 알아본 홍난파만의 조용한 방향 틀기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채동선은 1930년 이소란과 결혼 후 활동에 박차를 가했고, 귀국 독주회 이후 3회의  독주회를 이어갔으며, 1932년 작곡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정지용의 음악적 페르소나, 채동선

채동선은 그다지 많은 음악작품을 남기진 않았다. 기악곡으로는 현악 4중주 1번 G단조(1932년 추정)와 미완인 현악 4중주 2번 G장조, 바이올린 독주곡 ‘카프리스’, 현악 조곡 등이 있다. 그는 올포이스 4중주단을 조직해 자신이 제1바이올린을 맡았고, 이영세(제2바이올린), 윤낙순(비올라), 김인수(첼로)와 함께 했고, 그 뒤 채동선 4중주단으로 개칭하여 이혜구(비올라), 나운영(첼로) 등과 함께 했다. 그의 기악곡들은 이러한 실내악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대부분 전고전주의 음악이나 모차르트의 가벼운 선율들을 연상시킨다. 3화음의 음들을 따라가는 방식의 선율 진행, 비음계음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 손쉬운 진행의 성부들, 고전음악의 전형적 꾸밈음들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이러한 특징은 당시 조선 현악주자들의 연주 수준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한편으로는 당시 한국에서 거의 작곡되지 않는 새로운 장르로의 진입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오늘날까지 채동선이 기억될 수 있는 것은 가곡 ‘고향’ 때문이다. 이 곡은 정지용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지는 1980년대 말까지 이은상의 시 ‘그리워’, 박화목의 시 ‘망향’으로 바꿔 불러지며 그 선율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실제로 채동선이 정지용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말해주는 사료는 거의 없으나, 채동선이 남긴 주옥같은 가곡 중 약 8할은 정지용의 시를 가사로 한 것으로, ‘향수’ ‘압천’ ‘고향’ ‘산엣 색씨 들녘 사내’ ‘다른 하늘’ ‘또 하나 다른 태양’ ‘바다’ ‘풍랑몽’ ‘낙화암’ 등이 여기 속한다. 하지만 정지용이 월북하면서 그의 시와 존재는 문단은 물론 음악계에서도 금기시되어 그의 시를 가사로 한 채동선의 가곡들은 분단 이후 다른 시인의 가사를 안고 전해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대표곡 ‘고향’은 당시의 작곡가들, 예를 들어 홍난파나 현재명의 가곡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길이도 그러하지만 부정형한 가사를 선택했으며, 당시 음악을 만들 때에 흔히 사용하는 반복적인 선율 구조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전주 뒤, 1옥타브로의 도약(미↗미), 짧은 간주 후 1옥타브로의 도약(솔↗솔) 등이 상승적 효과를 연출한다면, 점차 하강하는 선율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실망을 표현할 뿐이다.

물론 이 곡에서도 첫 부분의 선율이 마지막 부분에 와서는 ‘풀피리 소리 아니냐고’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등의 가사를 반복하긴 하지만, 이외 반복의 형식 없이 무형식적으로 흘러가는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무형식적인 흐름과 전개는 정지용의 시 ‘고향’을 가사로 삼아 김희갑(1936~)이 1988년 작곡하고 이동원과 박인수가 불러 화제를 모은 대중가요 ‘향수’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아마도 정지용의 시가 지닌 시격(詩格)보다는 낭송조의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채동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중 또 다른 것은 민요 채보였다. 그의 채보는 상당히 정확했다. 한국음악의 장단을 명확히 파악한 후, 그 바탕 위에 선율을 채보했기 때문이다. 그는 민요·판소리 등은 물론 궁중음악까지 채보했는데, 후에 이 곡들은 상당 부분 합창곡과 관현악곡으로 편곡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은거와도 같은 행적을 보였던 그는 해방 후 다시 작곡에 전념하여 여러 작품을 남겼으며, 민요 편곡과 전통음악 발굴에도 힘썼다. 독특하게도 1952년 서울대 상과대학과 숙명여대에서 독일어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바이올린 독주곡을 제일 먼저 썼던 김재훈 

김채훈과 러시아인 아내 기사가 담긴 동아일보 1928년 9월 7일자

홍난파와 6살, 채동선과 2살 차이 나는 김재훈(1903~1951)도 당대의 뛰어난 바이올리스트였다.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김재훈은 보성중학교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동양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1920년에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간 그는 뷔르츠부르크 음악학교에 입학했고, 1924년 베를린 하노버국립음대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전공했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유학 중이던 1928년에 잠시 귀국하여 경성·함흥·평양 등지에서 독주회를 열었으며, 1934년에 귀국했다. 그의 독주회 소식과 함께 러시아 부인의 존재도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번 로서아 「굴란드」의 전 대장경(前 大藏卿) 고(故) 『세스코브』 씨의 령양(令孃) 리타 양과 결혼하야 귀국하얏다는바 『바이올링』에 텬재일뿐 아니라 작곡에도 텬재를 가저서 작곡집까지 발행하야 독일악단의 경탄을 말지 않는다 한다. 우리 사람의 손으로 『바이올링』 작곡이 세상에 나오기는 군이 호시이며 당분간 함흥 본텨에서 휴양 중 십월경 경성에서 연주회를 하리라더라.(동아일보 1928년 9월 7일)’

1937년에 영구 귀국한 그는 잠시 라트비아로 작곡 공부를 위해 떠날 거라는 기사(1937년 6월 22일)도 나왔지만, 그해에 이승학(바이올린)과 함께 정동에 경성음악전문학원을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했고, 이듬해인 1938년 봄부터 신입생들을 받기 시작했다. 전공과목은 피아노·바이올린·첼로로 첫 해의 신입생은 60여명에 달했다. 5월 10일에는 부민관에서 경성음악전문학원 창립기념연주회를 갖기도 했는데, 김재훈을 비롯하여 안기영, 안성교, 이승학, 이관옥 김원복, 계정식 등이 출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학교는 3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1943년에 폐교되었다.

김재훈은 1939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 창작작곡 발표대음악제’에서 합창곡 ‘곡접(哭蝶)’과 ‘추억’, 바이올린 독주곡 ‘비가(悲歌)’ ‘푸레루디움 운트 알레그로’를 발표했다. 아쉽게도 이 작품들은 현재 실체를 확인할 수 없고, 다만 몇 년에 발표했다는 사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이 음악회는 당시 서양음악을 공부한 이들이 작곡한 여러 작품을 발표하는 대대적인 행사였고, 이를 통해 조선에도 서양음악 ‘연주’ 외에 생산(작곡)의 움직임이 연주자들로 하여금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을 알린 공연이었다.

일제말기가 되면서 김재훈도 시대의 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41년, 음악을 통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 수행을 목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음악협회 결성대회에서 이사에 선출되었고, 이를 위한 좌담회에 참석하고 신문지상에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해방이후에는 전반적으로 좌익계열의 색을 드러냈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회원, 조선음악가동맹 위원장 등을 거쳤다가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1951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현민(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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