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 ‘LA 필하모닉 100년의 전환점을 마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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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3월 25일 9:00 오전

올해 창단 100주년을 맞은 LA 필하모닉이 100주년 기념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을 찾는다. 구스타보 두다멜의 지휘와 피아니스트 유자 왕의 협연으로 존 애덤스의 신작과 존 윌리엄스의 영화 음악, 그리고 실내악 작품까지, 명문 악단이 전하는 다채로운 음악의 세계로 초대한다

PART 1      자신의 과거와 차세대의 미래를 연결하다

구스타보 두다멜의 지휘를 실제로 처음 본 건 2008년이었다.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현재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모습은 예술의전당과 성남아트센터 청중들의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켰다. 클래식 음악 공연에서 어깨춤을 추며 행진하고 점퍼를 객석에 던지는 단원들을 그때 처음 봤다. 두다멜이 객석에 있던 스승인 지휘자 곽승에게 다가가 베네수엘라 국기 점퍼를 입혀주며 포옹하던 인간적인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두다멜을 낳은 ‘엘 시스테마’는 정체상태에 빠진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호세 아브레우 박사가 만들고 베네수엘라 정부가 지원한 이 제도를 통해 두다멜은 15세부터 지휘를 공부하고, 18세 때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됐다. 그는 스웨덴 예테보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를 거쳐 LA 필하모닉의 음악감독까지 올랐다. 뜨거운 열정과 건강하고 유연한 활력은 보수적인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체질을 변화시켰다.

 

아이의 마음으로 마주한 세계 무대
두다멜은 1981년 베네수엘라 태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살사를 연주하는 트롬본 연주자였다. 어린 두다멜은 늘 살사를 들었다. 클래식 음악은 할머니의 영향이었다.

14세의 나이로 지휘에 입문한 두다멜은 17세부터 그의 분신이 되는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22세 때 로린 마젤 지휘 콩쿠르 결선에 오른 두다멜은 2년 뒤에 밤베르크 심포니가 주최한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수개월 후인 2004년 본 베토벤 축제 폐막 콘서트에서 몸이 아픈 프란스 브뤼헨을 대신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유럽 무대에 신성이 등장한 사건으로 기록됐다. 2005/2006 시즌의 유럽 투어는 두다멜의 이름을 유럽 청중들에게 각인시켰다.

2005년 두다멜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네메 예르비의 대타로 BBC 프롬스에서 예테보리 심포니를 지휘했다. 그는 이후 2006년 예테보리 심포니의 수석지휘자로 임명되어 2007년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또 두다멜은 2005년 9월 13일, 할리우드 볼에서 LA 필을 지휘,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과 레부엘타스의 작품 등을 연주하며 미국 데뷔무대를 가졌다. 현장에 있었던 청중들과 관계자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2007년 1월 두다멜은 LA 필의 본거지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연주했다. 2007년 4월 시카고 심포니를 객원 지휘하던 두다멜은 자신이 에사 페카 살로넨의 후임으로 LA 필하모닉의 차기 음악감독에 임명되어 2009/2010년 시즌부터 임기를 수행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임기는 2019년 시즌까지 연장됐다.

“제 DNA에는 늘 살사 음악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트롬본을 연주하기에는 제 팔이 너무 짧았죠. 그래서 대신 엘 시스테마에서 바이올린을 시작했습니다. 그 2년 뒤에는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열여섯 살 때였을 거예요, 많은 사람 앞에서 지휘봉으로 그들을 움직이는 것이 제게는 게임처럼 느껴졌죠. 맞아요, 게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자연스럽게 흘러갔습니다. 어느 날 지휘자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는데, 제가 그곳에 있었고, 지휘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게임처럼요.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는 진지하게 바뀌어 나갔습니다. 심각하지만, 아주 재미있는 방향으로 말이죠. 왜냐하면 제게 지휘는 아직도 게임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훌륭한 뮤지션이자 아티스트인 오케스트라에 대한 존경심은 갖습니다. 저는 아직도 지휘할 때면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임합니다. 물론, 음악에 관해서 만큼은 열심히 연구하고 인지하고 있어야 하지만요.

”게임에 몰입하는 아이처럼 두다멜의 지휘에서는 순수한 열정이 용솟음친다. 그 건강한 에너지는 듣는 이를 행복하게 한다.

두다멜과 LA 필하모닉의 내한 무대 

2015년 3월 나는 두 번째로 두다멜의 실연을 봤다. 자신의 악단인 LA 필하모닉을 이끌고 왔을 때였다. 1982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정명훈과 첫 내한, 2008년 에사 페카 살로넨과 두 번째 내한 이후 LA 필하모닉의 세 번째 내한 무대였다. 첫날 말러 교향곡 6번, 다음날 드보르자크 ‘신세계로부터’에서 휘황한 오케스트라의 음색도 장관이었지만 대규모 작품에 힘을 불어넣어 일사불란하게 펼쳐내는 두다멜의 역량이 더욱 성숙했음을 알 수 있었다.

4년이 흘렀다. 2019년 3월 두다멜의 세 번째, LA 필하모닉으로선 네 번째 내한 무대가 클래식 음악계를 달군다.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LA 필하모닉이라 더욱 뜻깊다.

“지난 10년간 LA 필하모닉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동안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죠. 동시에 다양성과 포괄성을 추구하면서 지역 사회와 보다 많은 접점을 만들어내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LA 필하모닉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며 전율을 느꼈죠. 올해 100주년을 맞아 예술적 돌파구와 탁월한 교육 프로젝트들에 중점을 둔 이번 시즌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3월 16일 예술의전당에서 피아니스트 유자 왕은 존 애덤스가 그녀를 위해 쓴 피아노 협주곡 ‘Must the devil have all the good tunes?’를 국내 초연하고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연주한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2번을 유자 왕과 함께 녹음한 두다멜은 그녀를 뛰어난 아티스트라고 칭찬한다. “유자 왕의 개성(personality)과 능력(ability)은 그녀의 음악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이어 17일 두다멜과 LA 필하모닉은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존 윌리엄스 영화음악 콘서트’를 선보인다. 클래식 음악 감상에 익숙지 않아도 웅장하게 육박하는 사운드 속에서 노스탤지어를 느껴볼 기회다. LA 필하모닉을 지휘해 존 윌리엄스를 연주할 두다멜. 그는 윌리엄스의 작품 가운데 어떤 곡들을 좋아할까. ‘매우 어려운 질문’이라며 그가 답한다.

“아주 많은데… ‘E.T’ ‘스타워즈’ ‘쥬라기 공원’…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음악들입니다. 어렸을 때 영화와 영화음악에 빠져있었습니다. ‘스타워즈’ ‘E.T’ ‘인디애나 존스’ 등을 보면서요. 어떤 이들은 영화음악이 클래식 음악보다 뛰어나지 못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음악 작곡가들은 매우 위대한 음악가들이며, 훌륭한 편곡자(Orchestrator)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존 윌리엄스는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하나입니다. 윌리엄스의 음악은 매우 풍부하고 아름답습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정의 요소를 갖고 있죠.”

18일에는 롯데콘서트홀에서 유자 왕,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 LA 필하모닉의 수석 주자들이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브람스 피아노 4중주 등을 연주하는 체임버 뮤직 콘서트를 연다. 사흘간 서울에서 족적을 남길 LA 필하모닉의 연주가 기대된다.

1975년 11명에서 시작돼 40만 명 이상이 혜택을 본 엘 시스테마의 신화는 알려졌다시피 현재 베네수엘라의 국가적인 위기로 개점휴업 상태다. 그럼에도 두다멜은 자신이 받은 걸 다음 세대에게 돌려주려 한다. 2007년 창단한 LA 유스 오케스트라(Youth Orchestra of LA, YOLA)를 통해서다. LA 및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소외계층 아동을 대상으로 음악교육을 제공하는데, 수만 명의 아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를테면 LA판 엘 시스테마다.

“우리 YOLA의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예술적으로 보여주는 변화는 정말 놀랍습니다. 아이들은 음악을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관해 음악을 통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앞으로 이들이 성장해 나가면서 로스앤젤레스의 클래식 음악계는 더욱 두텁고 풍성해질 것이다. 그때 베네수엘라의 아이들이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처럼.

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음악 칼럼니스트)

PART 2      창단 100주년을 맞은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역사와 미래

LA 필하모닉의 어제

20세기 초반 LA를 대표하는 악단은 LA 심포니였다. 윌리엄 앤드루스 클라크 주니어는 몬태나 주의 구리 광산을 소유한 가문 출신으로 LA 필하모닉을 조직했다. 말러의 조수 출신인 헨리 로스웰의 지휘로 1919년 10월 24일 첫 공연을 가진 이후 LA 심포니는 멸종됐고, LA 필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창단 초기 본거지는 필하모닉 오디토리움으로 40년 넘게 근거를 이뤘고 1922년부터 야외 소풍지로 쓰이던 할리우드 볼에서 야외 콘서트를 시작했다. 1927년 초대 감독 로스웰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핀란드 출신의 조지 슈니보이그트도 2년간 짧게 LA에 머물렀다. 1928년 유진 굿센스의 지휘로 빅터에서 내놓은 음반은 사상 첫 야외 심포니 녹음이었다.

창단 후원자인 클라크는 아무런 재산을 악단에 남기지 않은 채 1934년 세상을 떠났고, 폴란드 출신의 저니맨 지휘자 아르투르 로진스키에 이어 오토 클렘페러가 1939년까지 음악감독으로 일했다. 클렘페러 재임 당시 악단은 재정난에 처했지만 LA 정주를 모색하는 스트라빈스키와 협업을 증진했다. 1940년 LA에 정착한 스트라빈스키는 가끔씩 할리우드 볼 지휘를 맡으며 악단의 이미지를 제고했다. 클렘페러의 인적 네트워크는 쇤베르크로 이어져, 캘리포니아 주 여러 대학과의 연계를 통해 LA 필은 쇤베르크를 자원으로 품었다.

뇌수술로 감독에서 물러난 클렘페러를 대신해 1943년 악단 감독으로 온 알프레드 월러스타인은 미국인이었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폭군의 성미였지만 포디엄 위에서는 권위가 없었다. 혼란기에 구세주는 관리 영역에서 나타났다. ‘LA타임스’지의 발행인 노먼 챈들러의 부인, 도로시 챈들러는 할리우드 볼 공연부터 임무를 맡아 LA 필의 새 공연장 건립을 주도했다.

1956년 네덜란드 지휘자 판 베이넘이 객원 지휘자로 왔다가 2주 만에 음악감독을 수락했다. 암스테르담에서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감독하면서 장시간 항공 이동을 거쳐 LA 필에서 감독직을 겸임했다. 그는 1959년 콘세르트허바우 리허설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LA 필을 고급 악단으로 발전시킬 기반을 닦았다.

LA 필에 첨단을 안긴 주역은 봄베이 출신의 주빈 메타였다. 20대 중반에 LA로 와서 1962년부터 1978년까지 LA 필에 몸담았다. 1964년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으로 본거지를 옮겼고 새 감독 메타와 함께 맹진했다. 메타는 LA 필과 정통 독일 관현악에 도전했고 투어와 앨범으로 품질을 증명했다. ‘아메리카 빅 5’에 들진 않았지만 ‘빅 7’에 LA 필의 이름이 오른 시기다.

도로시 챈들러는 CBS 레코드 유럽지사장 출신의 어니스트 플라이슈만을 운영감독으로 영입하면서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했다. 플라이슈만은 단원 임금을 두 배 이상 인상했고, 디즈니가의 후원을 끌어내 2003년 디즈니홀 건립을 완성했다. 1978년 노장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를 데려온 것도 그의 수완이다. 녹음을 하면서 가까워진 피에르 불레즈, 마이클 틸슨 토머스, 사이먼 래틀도 모두 플라이슈만의 인맥으로 LA 필과 관계했다. 줄리니는 낭만주의 작품을 담은 DG 앨범으로 세계에 각인했고, 휘하에 신인 정명훈을 두었다.

1985년 후임 감독에 앙드레 프레빈이 왔지만 LA 관객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여타 악단과 구별되는 LA 필의 가치를 보이는 데 프레빈은 임기 내내 소홀했다. 프레빈은 살로넨을 수석 객원 지휘자로 본인 통지 없이 강행한 플라이슈만과 격돌했고, 언론에 먼저 사임을 발표했다.

1992년 새 감독으로 부임한 살로넨을 LA 언론은 어쩌다 감독에 오른 ‘우발적인 지휘자(accidental conductor)’로 규정했다. 하지만 살로넨은 17년을 일하면서 LA 필을 세계 최고의 현대음악 오케스트라로 탈바꿈했다. 1998년 플라이슈만이 물러나기 전까지, 제한된 예산에서 해볼 수 있는 일들이 그런 것이었다. 후임 행정감독 위인버겐이 15개월 만에 악단을 떠났고 뉴욕 필의 스타 데보라 보르다가 서부로 왔다.

보르다는 재정 압박에 시달린 조직에 유연성을 부여했다. 살로넨과 합심해 신축한 디즈니홀에 재즈와 월드뮤직을 넣었다. ‘그린 엄브렐러’로 불리는 현대음악 프로그램을 개설했고, 히스패닉 청소년들을 계몽하는 교육 프로그램(YOLA)을 시작했다. 이전까지 LA 필이 간과하던 계층이 악단과 통했다. 보르다는 뉴욕 필에서 맹활약한 채드 스미스를 YOLA 감독에 임명해 아이슬랜드와 멕시코로 YOLA를 확장했다.

LA 필하모닉의 현재와 전망
2013년 LA 필하모닉 주공연장 월트 디즈니홀이 10주년을 맞을 때 음악감독 구스타보 두다멜은 다가올 2019년, 악단 창단 100주년의 미래를 내다봤다. 설계자 프랑크 게리가 남긴 특이한 건축물이 세월이 흘러도 늘 젊고 에너지가 충만한 공간으로 머물게 하려는 계획은 신작 50여 개 작품을 위촉해 2018/2019 시즌에 공연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두다멜과 전 LA 필 행정감독 보르다는 신작으로 다음 100년을 내다봤다. 2019년 4월 7일 미르가 그라치니테 틸라의 지휘로 진은숙의 신작이 오르는 공연도 같은 계획의 일환이다.

여느 유럽과 미 동부 악단에선 전대 음악감독의 결실을 후대가 선택해 새로운 가치를 이어가는 과정을 반복하지만, LA 필은 예외다. LA 필에서 전통은 ‘새롭게 창조하는 역사’다. 같은 말러 교향곡 6번을 연주해도 LA 필은 투명한 수채화처럼 깔끔한 이미지로 각 파트에 물감을 번지게 한 살로넨과 그 색상을 강렬한 콘트라스트로 완전히 염색해버린 두다멜을 모두 받아낸다. 메타가 힘든 몸을 이끌고 올해 초 다시 악단에 돌아올 때 조직 최초의 명예(Emeritus) 지휘자를 정중하게 허락한 장면도 두다멜과 함께 열광할 때의 LA 필과는 또 다르다.

서부를 찾아온 음악가들은 LA에 입성할 때부터 화창한 날씨가 주는 여유와 헐리우드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풍기는 유쾌한 분위기에 자연스레 젖어든다. 클래식 음악 산업에서 LA와 샌프란시스코는 지금도 골드러시의 종착점이다. 2012/2013 시즌부터 다섯 시즌 동안 LA 필의 단원 평균 연봉은 미국 내 1위를 달렸고, 2017/2018 시즌에서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16만6460달러, 약 1억8800만 원)가 LA 필(16만4476달러)을 미세하게 넘었다. LA 필 1년 예산(1억2천만달러, 약 1355억 원)는 전미 최고 수준이다. 수입은 보통 70%가 티켓 매출과 주차장 및 식음료 수입에서 나오고, 30%가 기부금과 채권에서 발생한다. 시애틀-샌프란시스코-LA를 아우르는 미 서해안 벨트는 지리적 경계만 마주할 뿐 미국 중부, 동부와 확연한 성향 차이를 둔 독립 시장이다.

LA 필의 100년은 늘 앞을 내다보려는 음악감독과 운영진의 노력이 함께 했다. 사회 변화를 다른 어디보다 빨리 받아들였고 미래를 고민했다. 1925년 여성 지휘자 에델 레진스카를 미국 악단 최초로 기용했고, 1948년 흑인계 미국 음악가를 단원으로 처음 채용한 곳도 LA 필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LA 필의 실무진에 가담했고, 인구학도 이들이 고려하는 중요 분야다. 뉴 밀레니엄을 앞두고 LA 필에 부임한 보르다 행정감독은 2002년경 히스패닉이 흑인을 제치고 미국 최대 소수 민족이 된다는 보고서를 접했다. 정치 집회에서 스페인어를 쓰는 정치인이 등장했고, LA가 속한 카운티의 인구 절반이 히스패닉이었다.

살로넨에 이어 차기 감독으로 베네수엘라 출신의 20대 두다멜을 기용하면서 악단은 히스패닉 관객 증가를 기대했다. 줄리니 시절부터 LA 필에서 근무한 노장 비올리스트 리처드 엘레지노는 두다멜이 리허설 안팎에서 스페인어를 구사하면서 LA 필이 실질적으로 라틴 커뮤니티와 소통하는 변화를 체감한 산 증인이다. 야외 공연장인 할리우드 볼의 LA 필 행사에 히스패닉 관객이 가시적으로 늘어나자 보르다는 “더 이상 20대 관객을 위해 말러는 맞지 않다”고 논쟁적인 이슈를 일부러 흘렸다. ‘LA가 가진 인종적 다양성을 50여 명의 LA 필 이사회가 반영하지 않는다’는 비판에도 보르다는 꿈쩍하지 않았다. 라틴 출신 이사의 참여는 미미하고 한인은 전혀 없다. ‘돈은 히스패닉을 상대로 벌고 악단 행정에선 라티노를 배제하는 운영이 지속될 것인가’의 난제를 놔두고 보르다는 2017년 뉴욕 필로 떠났다. 신임 행정감독 사이먼 우즈가 ‘뉴욕타임스’지에 “LA 필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오케스트라”라고 기염을 토했지만, 운영의 묘를 살리지 못하면 언제든 히스패닉 관객이 돌아설 위험도 상존한다.

2018년 LA 필에 부임한 우즈는 1980~1990년대 영국 애비로드 스튜디오 프로듀서 출신으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서 공연기획을 담당했고, LA 필에 오기 전 시애틀 심포니 운영감독을 지냈다. 2010년대 시애틀 심포니는 독창적인 레코딩으로 미 서부를 대표하는 제3의 오케스트라로 부상했다. 우즈는 LA 필에 부임하고 음원 제작에 능한 기본기를 악단에 접목하고 있다. CD 제작과 음원 다운로드 방식이 완전히 사양길에 접어든 상황에서 스트리밍 방식을 통한 수익 배분에 어떤 수완을 보일지가 우즈의 역량을 측정할 리트머스다. 우즈는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LA 필이 더 자주 오를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면서 LA 필과 영화산업의 밀접한 연계를 꾀하지만, 비즈니스 모델의 실체는 아직 없다. 2010년대 후반 들어 라이브 오케스트라 스크리닝으로 악단이 얻을 수익이 한계에 다다른 점도 위기 신호다. 신기술과 소셜 미디어의 집중을 밝힌 전략은 세계 어디에서도 들을 만한 진부한 소재다. 그동안 해외 투어에 소극적이었던 LA 필은 수익 개선을 위해, 보다 자주 도시 밖으로 나올 전망이다. 100주년을 기념하는 아시아 투어도 2018년 가을 일본 투어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겉으로는 호황으로 보이지만 LA 필에 잠복한 위기는 두다멜 개인의 개성에 지나치게 악단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점이다. 단순한 음악적 케미스트리뿐 아니라 120여 명의 현 LA 필 단원은 가족 같은 화목함을 자랑한다. 여타 미국 메이저 악단에선 볼 수 없는 일터 이상의 연대감이 조직에 흐른다. 어느 곳보다 치열한 오디션 과정을 통해 한솥밥을 먹게 된 동료 사이에 흐르는 진한 동료애가 근본이다. 줄리니는 미국 내 군소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다가 LA 필하모닉에 채용되는 과정이 악단 발전에 바람직하다고 했고, 노장 단원들이 새 음악을 적극적으로 포용한다. 나이 어린 연주가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오케스트라 앙상블에 들어와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는 경우는 드물었다.그러나 두다멜이 떠날 경우 현재 절정을 달리는 LA 필의 섬세한 사운드와 정밀 기계와 같은 조직력이 어떻게 변할지, 대안이 마땅치 않다. 두다멜 이외에 할리우드 볼의 여름 음악회를 책임지고 흥행시킬 스타가 없다. 레너드 슬래트킨, 브롬웰 토비, 수잔나 멜키를 수석 객원 지휘자로 기용했지만 히스패닉뿐 아니라 백인 고정 관객의 반응도 미온적이다. 리오넬 브랑기에와 미르가 그라지니테 틸라가 각각 살로넨과 두다멜의 보조 지휘자로 시작해 명성을 쌓았지만 아직 LA 필의 흥행을 책임질 위상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두다멜의 퍼포먼스에 열광하던 LA의 반응이 예전 같지 않다. 두다멜이 일련의 베네수엘라 정치 사태에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엘 시스테마로 추앙받던,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SBYOV)에 대한 팬덤은 미국에서도 급격히 식었다. 세계 각지에서 시몬 볼리바르 악단의 투어가 취소되면서 SBYOV는 믿을만한 파트너에서 제외됐다. 또한 2010년대 중반 들어 테오도르 쿠렌치스가 새로운 음악의 기수를 물려받으면서, 두다멜은 어느새 구세대 인물이 되었다. 쿠렌치스가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에 들어올 경우, 두다멜에 향하던 열광과 환호가 누구를 향할지 LA 필뿐 아니라 미국 메이저 오케스트라는 젊은 영웅의 행보를 주시 중이다. 낡은 인물을 고집하는 게 안주로 비춰지는 순간, LA 필의 결정은 과감할 것이다.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

 

DG에서 한정판으로 발매된 LA 필하모닉 100주년 기념 음반. 두다멜이 선곡에 참여해, 주빈 메타의 말러 교향곡 5번 등 LA 필의 역사적 녹음들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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