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것에 매료될 준비 가객 하윤주

새 음반 ‘추선(秋扇)’. 가을 닮은 목소리가 이끄는 낯선 소리정원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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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9월 5일 9:00 오전

TRADITIONAL+TREND

동양화 한 폭을 치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과 하윤주의 음반 ‘추선’에 담긴 아홉 곡조를 듣는 것은 같은 느낌일 것이다. 음반 속 전지훈의 피아노는 영락없는 서양 현대음악의 곡조들이다. 그 소리들은 복잡하게 얽혀 있지 않다. 건반을 훑어 간단히, 무조성의 점들을 뿌릴 뿐이다. 그 사이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잔잔히, 그리고 느리다. 그 노래를 따라 뿌려진 점, 그 씨앗에서 줄기가 돋고 잎과 꽃이 피어난다. 이렇게 피아노와 목소리가 뒤엉키며 정원을 이룬다. 소리의 정원이다. 하윤주가 부르는 여창가곡은 전통음악의 한 갈래이다. 아정(雅正)한 노래라 하여 정가(正歌)라고도 불리는 이 노래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이다. 하윤주는 가곡 이수자로 활동 중이다. 이번에 나온 ‘추선’은 그녀 특유의 정가 창법을 살려 극작가 배삼식이 가사를 짓고, 작곡가 최우정이 선율을 붙였다. 낯선 소리들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배어나오는 ‘낯섦의 친숙함’이 있다.

‘정가보컬리스트’라는 명칭으로 활동 중이다. 새로운 장르를 암시하고 대변하는 신종 예술가 같은 직종(?)처럼 느껴진다.  판소리나 경기민요를 부르는 성악가들을 ‘소리꾼’이라고 부르고, 정가를 부르는 성악가는 ‘가객’이라 한다. ‘정가’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이 시대의 감성과 나의 색깔이 담긴 노래를 부르고 싶은 다짐을 담은 말이다.

극장무대나 유투브에서의 활동과 달리 음반에는 목소리‘만’ 담겨 있다. 기존 활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청각과 시각을 아우르는 매체를 통한 활동이 부쩍 늘었는데 어느 순간 소리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양한 소리를 모아 편안한 정원 같은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그곳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꽃과 나무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우주 같은 작은 정원이다. 그래서 내 목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러 소리들과 그 조화를 통해 나만의 ‘소리의 정원(Jardin du Son)’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사들이 한 사람을 위한 고백 같다.  사랑하다 헤어진 쓸쓸한 여자의 마음을 담고 있다. 누구나 마음 깊이 새길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사랑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감정을 애틋한 사랑 노래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작사에는 극작가 배삼식, 작곡에는 최우정이 함께 했다. 이들과 함께 한 이유는.  두 사람이 함께 한 음악극 ‘적로’(서울돈화문국악당 제작)에 산월 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메인테마곡이 ‘세월은 유수와 같이’였는데, 전통가곡과 서양 예술가곡이 만나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통해 전통가곡이 품고 있던, 내가 잘 몰랐던 현대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곡이 하나씩 세상에 나오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사계절과 닮았다는 생각. 봄 햇살의 따스한 바람, 뜨거운 여름 속의 시원한 그늘, 가을바람에 담긴 그리움, 그리고 떨어지는 눈송이로 겨울을 보내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계절의 변화가 느리지만 미묘하게 움직인다.

모든 게 빠르게 흐르는 시대에 ‘느린 노래’가 갖는 미학과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것의 깊이를 느끼기도 전에 그 존재마저 사라지는 시대이다. 음악은 이렇게 놓친 여러 상황과 감정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예술이다. 느린 음악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느린 음악과 함께 하는 시간이 짧을지라도 그 사유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9월의 잔비가 내리는 풍경으로 시작한 노래가 여름의 숲과 가을을 지난다. 꿈 속에도 가보고. 아홉 곡들이 연결되며 그리는 풍경은 무엇인가.  서로 답가를 하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맞물려 있다. 첫 곡 ‘추선’은 누군가 다녀간 쓸쓸한 자리에 나비가 내려앉아 선 꿈에 젖어 아련한 추억을 떠올린다. ‘여름의 숲’은 숲에서 바람과 노니는 풍경을 연상시킨다. 어느덧 피아노선율에 이끌리다 보면 가을이 찾아온다. 물속에 노니는 물고기를 바라보는 마음이 ‘가을물’에 녹아있고, ‘꿈에 다니는 길이’에는 손을 저어 쫓아 따라간 곳엔 떠난 임의 얼굴만이 아련히 남아 있다. ‘공산명월’ ‘거울 속의 눈썹’을 지나면 어느덧 겨울이다. ‘겨울 가지를 향하여’에 담긴 봄을 부르는 소리는 나 몰래 찾아온 그 사람을 부르는 소리다.

‘추선’에 수록된 아홉 곡을 들으면 낯설게 느껴지는 전통 가곡도 한발 더 가까이 올 수 있을까.  전통 여창가곡의 순서는 가장 느린 ‘이수대엽’으로 시작하여 제일 빠른 ‘편수대엽’을 부르고, 남녀가 함께 부르는 ‘태평가’로 마무리 한다.  이번 음반도 이러한 전통적인 맥락과 닮은 흐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정가’ ‘하윤주’ ‘한국음악’을 낯설어 하는 이라면 가을부터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가을 물’을 먼저 들어보라. 길지 않은 가사지만, 또 함축적인 언어지만, 듣고 나면 그 의미가 어느덧 가까이 느껴진다.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과 아름다운 화성도 두루 포함되어 있고.

공연 ‘소리의 정원’(9월 14일 덕수궁 석조전)을 시작으로 ‘추선’은 하반기에 국경을 넘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연(11월 17일)과 도쿄 다이칸야마 츠타야 티사이트(11월 21일)에서의 첫 번째 쇼케이스를 시작으로 일본 투어도 준비 중. 12월에는 서울돈화문국악당 음악극 ‘적로’로 관객과 다시 만난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프로덕션 고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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