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의 의미, 회화에서 일상으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8월 17일 9:00 오전

VISUAL ART

영적인 숭고함에 대하여 &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숭고의 의미

 

Barnett Newman (American, 1905-1970)
Vir Heroicus Sublimis “Man, Heroic and Sublime” (1950-51)
MoMA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City.

 

 

 

 

 

 

 

 

 

 

 

 

 

 

 

 

 

 

 

 

 

어려서부터 무용을 전공하며 내 몸을 움직이게 한 음악은 장르가 무엇이든 간에 늘 즐겨듣고 좋아했다. 그에 반해 미술관에 가면 그림 앞에서 어떤 느낌을 받고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내 모습이 멋쩍게 느껴지곤 했다. 그랬던 내가 매주 작가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작품을 감상하며 점차 미술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KBS 아나운서 근무 시절에 1TV에서 방영한 ‘TV미술관’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작품을 만나기 위해 미술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둡고 서늘한 공간을 마주하면 일상과 철저히 분리되는 것 같은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전시 공간이 마치 제의적 공간처럼 느껴지는 마법 같은 경험을 받기도 하였다. 2011년부터 2년 가까이 진행한 이후, 미술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어렵고 난해한 작품들을 더 잘 이해해보고자 미술사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런데 맙소사! 한국에서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는 것은 당연히 열악한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미술 작품은 구글 이미지나 도록을 뒤져서 볼 수밖에 없었고, 작품 감상 보다는 작품에 대한 텍스트를 더 많이 읽어야 했다. 유럽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지인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휴관일에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찾아가 직접 눈으로 그림을 보고 공부한다는데 말이다. 그리고 미술이 좋아 대학원까지 진학했는데 바넷 뉴먼(1905~1970)의 ‘영적인 숭고함에 대하여’에 대한 수업 이후 또다시 미술에 삐딱한 시선을 갖게 되었다.

미국의 색면추상 화가 뉴먼의 ‘영적인 숭고함에 대하여’는 거대한 캔버스를 빨간색으로 가득 채우고, 자신이 ‘지퍼(zip)’라 이름붙인 수직선을 그려 넣은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쳇, 나도 그릴 수 있겠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당황스러움은 비단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자료를 보니 당시 이 작품을 본 그의 동료들 역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듯한 캔버스를 보고 난처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뉴먼은 자신이 느낀 기묘한 감정을 관객들에게도 전달하고자 했는데, 바로 그 효과를 ‘숭고’라 불렀다. 또 이 작품을 위해 수개월 동안 신중하게 색을 고르고 물감층을 켜켜이 쌓아가며 작품을 완성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영적인 숭고함’이라 표현하였다. 커다란 캔버스와 빨간 페인트만 있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작품을 두고 ‘숭고함’을 논하다니. 꿈보다 해몽이 뛰어난 작품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 해 겨울, 사진으로만 보던 작품을 직접 감상해야겠다며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뉴욕으로 무작정 떠났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한쪽 벽에 설치된 이 작품 앞에 선 순간, 나는 한 방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캔버스의 크기는 무려 가로 5.4미터와 세로 2.4미터. 그 거대한 크기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게 했다. 작품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전체적인 아름다운 형태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먼은 관객에게 자신의 작품과 1미터를 사이에 두라고 명했다. 그래서 그의 요구대로 그림 앞에 바짝 다가서니 빨간색의 강렬한 벽이 나를 그대로 덮쳐 버릴 듯했다. 커다란 작품에 압도된 그 순간,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황홀감에 사로잡혀 내 눈앞에 마주한 빨간 벽이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왜인지 모를 불안함에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작가가 말한 ‘숭고’를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한눈에 다 보이지 않는 압도적 규모의 캔버스 위에는 평면과 색채의 결합만이 존재한다. 일상적인 감각과 이성만으로 포착될 수 없는 그 작품을 보며,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심하고 단순한 지식을 바탕으로 작품 그 자체를 이해하고자 했던 나의 오만함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숭고의 미학을 잘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를 대표한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이다. 우뚝 솟은 바위 위에 한 남자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풍경을 내다보고 서 있다. 안개를 그린 필치를 보면 마치 맹렬하게 요동치는 파도를 연상시킨다. 광활한 대자연에 마주선 남자의 뒷모습만으로는 그가 느끼는 감정을 알 수 없다. 지팡이에 기대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은 고독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면의 중앙에 위치한 그의 몸을 중심으로 허리에서부터 뻗어나가는 구도를 통해 대자연에 맞서려는 듯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음을 느끼게 된다. 거칠고 사납게 위협하는 자연에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집념. 이 작품이 주는 미적 긴장감이다.

몇 년 전, 해발 1563미터 오대산 정상에 올라 구름 아래 풍경을 내려다 본 적이 있다. 산 정상에 올랐다는 성취감도 잠시, 발이라도 잘못 헛디디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과 대자연 앞에선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불안함에 머리가 쭈뼛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바다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산 앞바다와 광안대교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일반 객실에 비해 무리한 가격을 지불하여 유리 너머 바다와 마주했던 그 때.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뭔지 모르게 공포스럽게 느껴지던 그날의 낯선 경험을 나는 아직도 지울 수가 없다.

임마누엘 칸트는 ​‘자연은 그 혼돈 속에서, 또는 그것의 가장 야생적이고 불규칙한 무질서와 황폐 속에서 숭고의 이념을 가장 잘 불러일으킨다’며 무질서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감정을 ‘숭고’와 함께 논했다. 에드먼드 버크도 ‘숭고는 당연히 모든 숭고의 공통된 원천인 공포에서 비롯된다’며 숭고의 감정이 어떠한지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처럼 미술과 철학에 자주 등장하는 ‘숭고(崇高)’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존엄하고 거룩함’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다. 그런데 요즘은 코로나19 관련 뉴스 기사에서 ‘의료진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이라는 문장이나, 영웅적 희생을 감내한 위인에게 붙이는 ‘숭고한 희생’ 등의 표현과 문장을 종종 볼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힘을 가진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은 그저 불안하고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전 세계에 퍼진 바이러스에 맞서 싸우는 의료진의 희생은 ‘숭고’라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최근 동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 박사의 인터뷰를 본 적 있다. 인류의 동물 학대와 자연에 대한 무례함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과 같은 질병을 불러왔다고 지적하며 자연 과잉개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요즘, 숭고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뉴먼과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감상하며 ‘숭고의 의미’을 일상 속에서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된다.

 

글 박은영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KBS 공채 아나운서로 재직(2007~2020)하며 여러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했고, 현재 ‘문화n공감’(국악방송), ‘닥터홈즈’(JTBC) 등 MC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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