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속삭임의 데시벨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8월 17일 9:00 오전

 

 

 

 

 

 

 

 

 

 

 

 

기억에는 줄거리가 없다. 갑작스러운 비에 눅눅하게 젖었던 신발의 습기, 쿵 떨어진 심장 위로 쏟아지던 햇살, 귓속말로 목덜미를 간질이던 친구의 숨결, 바람맞고 돌아오던 길에 맡았던 찬란한 꽃향기…. 기억은 기승전결 없이 그 순간의 감각과 정서로 남는다. 억울하고, 분했던 그 시간을 끈질기게 붙잡아 한 덩어리로 만든다. 그렇게 남겨진 과거는 자꾸 오늘을 향해 돌팔매질 한다.

 

사람을 기억하는 이야기

1994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중학교 2학년 은희는 떡집을 하는 부모님과 언니, 오빠와 함께 살고 있다. 툭하면 은희를 때리는 오빠, 그런 오빠에게만 관심 가지는 부모님, 공부를 못해 대치동에 살면서 강북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언니는 은희에게 관심이 없다. 친구 지숙과 남자친구인 지완과의 관계가 유일한 위안이다. 어느 날 은희가 다니는 한문학원에 김영지라는 선생님이 온다. 영지 선생님은 다른 어른들과는 달리 은희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고, 성수대교가 무너졌던 그해의 사건은 역사로 기록됐지만, 그 시간을 살아가는 개인의 삶은 어디에도 남지 않고 흘러간다. 평범한 사람의 죽음은 이름도 남기지 않는다. 김일성의 죽음은 역사로 기록되었지만, 성수대교 붕괴로 사망한 사람들은 32명이라는 숫자로만 기록되었다.

그런 점에서 ‘벌새’(2018)가 바라보는 시간은 남다르다. 과거를 되짚지만 한 사람의 시간을 덩어리나 감각, 사건이 아닌 이야기로 기억한다. 카메라는 은희라는 한 소녀의 평범한 일상에 내밀하게 들어가, 소소해 보이지만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소녀의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인다.

영어학원이나 수학학원도 아닌, 한문학원이라는 변두리 공간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오며 ‘벌새’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자꾸 중심에 놓는다. 성수대교 붕괴로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 직접 등장하지 않았지만 철거 현장에서 끝내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잠깐 멈춰 서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다.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와 속절없는 소리만 하는 외삼촌, 그가 떠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 꺼지지 않는 현관 불빛처럼 김보라(1981~) 감독은 사람의 흔적을 기억하고 존중하며 화면에 담는다.

첫 장면, 은희는 현관문을 거세게 두드리며 엄마를 부른다.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한 은희의 외침은 간절하지만 끝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문득 은희는 호수를 보고 깨닫는다. 다른 집이다. 은희는 가끔 헷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똑같은 집들이 나란히 위치한 복도식 아파트에 살고 있다. 가장 내밀하고 안전해야 할 소녀의 방은 늘 개방되어 있다.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를 향해 창이 나 있는 은희의 방에는 언니의 남자친구도 불쑥 찾아와 자고 간다. 똑같은 크기, 비슷한 가격, 평준화된 삶 속에 갇힌 것 같은 은희는 오롯이 자신으로 빛나고 싶다.

 

심장은 유리 같은 것

‘벌새’는 굳이 뭔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당사자는 알 수 있는 미묘한 감정의 퍼즐들을 툭툭 던진다. 관객의 마음에 비슷한 모양의 빈칸이 있다면 꼭 들어맞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마음에 끼워 맞추지 않아도 상관없다. ‘벌새’는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나와 같은 조각을 발견하는 영화다.

저만 힘들다고 소리치느라 옆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은희 가족의 모습에서 관객은 상처 때문에 못나진 마음을 발견한다. 은희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엄마를 큰소리로 외쳐 부른다. 하지만 엄마는 끝내 은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멍하니 무언가를 바라보다 사라진다. 늘 곁에 있지만 사실 내 외침을 듣지 못하는 엄마의 존재는 은희에게 근원적인 불안이었다. 죽어라 싸우던 부모가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시시덕거리는 모습은 이상하게 아프다. 엄마가 휘두른 스탠드에 유리 조각이 박힌 것은 아버지의 살갗이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은희는 소파 밑에서 유리 조각을 발견한다. 다 치웠다고, 다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불쑥 흉터처럼 남아 떠도는 기억은 여전히 뾰족하다.

뭉툭해지지 않는 마음을 줄곧 환기하지만 감독의 시선은 한문 선생님 영지처럼 사려 깊다. 전후 사정을 캐묻지 않고 꼭 필요한 정서와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으로 마음을 보듬어낸다. 극중 영지의 낮고 읊조리는 편안한 목소리가 마음을 감싸듯, 이야기는 줄곧 낮고 고요하다. 평화로워서가 아니라, 공기 속 울렁이는 온도가 적당해서 평온함을 준다.

이제껏 어른들에게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극 중 영지는 흔히 만날 수 없는 진짜 어른이다.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반말하지 않는 어른, 신기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어른, 얼굴이 아닌 마음을 아는 어른이지만 문득 사라져 마음에 얼룩을 남기고야 만다.

어쩌면 영지의 모습으로 자라날 것 같은 은희는 펄럭이며 살아있다. 누군가가 사라진 후에도, 매일 겪는 슬픔이 무겁고, 자기를 좋아한다던 남자친구와 후배가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꿔 서운하고, 잔뜩 들뜬 친구들의 소음 속에 섞이지 못하지만 은희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 플래카드처럼 계속 펄럭인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세밀하게 귀 기울여야 들리는 속삭임 정도의 외침이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OST

벌새

뮤직앤뉴 레이블 , 마티아 스턴이샤(작곡)

영화에는 1970~90년대의 익숙한 가요들이 흘러나온다.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1994), 원준희의 ‘사랑은 유리 같은 것’(1988), 윤복희의 ‘여러분’(1979) 등이다. 영화의 정서에 어울리는 가사를 가진 노래들로, 1990년대의 추억이나 복고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쓰인 것만은 아니다. ‘벌새’는 독립영화로서는 드물게 해외 아티스트가 참여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가지고 있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약하는 음악감독 마티아 스턴이샤가 작곡한 음악은 사려 깊고 조용하다. 단 한 번도 음악이 인물의 감정을 넘어서지 않는다. 영화의 흐름과 리듬에 부드럽게 코러스를 넣는 것 같다.

 

 

트랙 리스트

1 Tender Loneliness (타이틀) 2 Butterflies 3 Mother 4 First Kiss 5 Family’s Politics 6 Furniture’s Bits and Pieces 7 Oolong Tea 8 Breeze of Love 9 Bus Sister 10 Ignorants Pitty Others 11 Going Home 12 Brothers and Sisters 13 Months Later 14 Faith 15 Loss Changes Us All 16 Everyone is here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