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레베카(Rebecca)’가 뮤지컬로 제작되어 한국 초연을 갖는다.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레버이 콤비가 만들어낸 ‘어두운 사랑 이야기’가 국내 무대에 펼쳐지는 것.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주인공의 자아 성장기와 존재하지 않는 인물 레베카를 둘러싸고 이어지는 심리극, 여기에 예상치 못한 반전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1월 12일~3월 31일, LG아트센터.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1940년 영화로 잘 알려진 ‘레베카(Rebecca)’가 뮤지컬로 한국 초연된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뮤지컬은 형식 면에서 다양한 스타일이 있지만 주요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심리묘사를 다룬 드라마가 강한 작품을 즐기는 취향의 관객이라면 이 작품에 관심 가져볼 만하다. 원작은 1938년에 출간된 대프니 뒤 모리에가 쓴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이다. 이것을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2년 후 미스터리·로맨틱·스릴러가 혼합된 독특한 질감의 영화로 발표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작품은 일찍 부모를 잃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주인공 겸 내레이터 ‘나(I)’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귀족 부인의 말동무로 일하던 중 우연히 부유하고 미스터리한 남자 맥심을 만나게 된다. 첫째 부인 레베카와 사별한 그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나’는 두 번째 부인이 되지만, 일반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달리 처절한 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첫발을 디딘 맨덜리의 대저택은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 뒤에 레베카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결국 ‘나’는 맥심과 관리인 댄버스 부인을 비롯해 이미 존재하지 않는 레베카와 피 말리는 심리전을 펼치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반전을 경험하게 된다.
‘레베카’는 200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되어 그동안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인기를 얻었다. 뮤지컬 ‘모차르트!’ ‘엘리자벳’ ‘마리 앙투아네트’ 등에서 훌륭한 콤비 플레이를 보여주었던 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레버이는 그들이 선호하는 이러한 어두운 사랑이야기를 또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앞선 작품들과 유사하게 ‘레베카’도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주인공의 자아 성장기이다. 사건 초반에는 순진하고 미숙한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내레이터 ‘나’의 모습이 사건이 진행될수록 다른 등장인물들 누구보다도 강하고 자기 확신에 찬 여성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미하일 쿤체는 고전작품 속에서 이러한 뮤지컬에 적합한 캐릭터를 발견해내는 심미안을 가졌다. 이를 위해서 뮤지컬 코미디적인 요소는 최소화하고, 마치 한편의 심리극을 보는 듯 뮤지컬 드라마의 양식을 따른다. 가사의 기능도 ‘캐릭터 내면의 목소리’라는 원칙에 충실하다. 실베스터 레버이의 힘 있는 음악은 높이 치솟는 감정·분노·광기 등과 더불어 사랑의 순간을 표현하는 빠른 템포의 음악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의 작품들 중 가장 브로드웨이 스타일에 가깝다는 것도 특징이다. 비록 올 시즌에 예정되어 있던 브로드웨이 개막은 투자 부문의 내부 사정으로 아쉽게 성사되지 못했지만 쿤체·레버이 콤비처럼 유럽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 뮤지컬 창작자들의 브로드웨이 진출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레베카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나’의 운명
‘레베카’는 원작 소설과 영화에 굉장히 충실한 스토리라인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막이 열리면 ‘나’는 황폐해진 맨덜리 저택의 잔재와 과거의 그림자들 앞에서 화려했던 저택이 있었던,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과거의 한때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기적이고 수다스러운 밴호퍼 귀족부인의 말동무로 고용되어 함께 떠났던 몬테카를로에서 신사적이고 매력적인 영국의 귀족 맥심 드 윈터를 만나게 된다. ‘나’는 그가 최근에 부인을 잃고 상심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맥심은 ‘나’의 가식 없는 순수한 모습에 반해 딸의 급작스런 약혼식에 참가하기로 미국행을 결정한 밴 호퍼 부인을 따라가는 대신 자신과 함께 맨덜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청혼을 한다.
하지만 달콤한 신혼여행 후 맨덜리의 대저택으로 도착한 ‘나’는 저택에서 풍기는 엄숙한 기운과 저택의 음산한 관리인 댄버스 부인의 존재와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맥심의 전 부인 레베카의 흔적에 압도당한다. 심신을 짓누르는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나’는 맥심에게 맨덜리 저택의 연례 가면무도회를 열자고 제안하고, 댄버스 부인은 처음으로 ‘나’에게 친절함을 보이며 집안의 전통인 흰색 드레스를 입도록 조언한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희망과 자신감이 생긴 ‘나’는 산책 중 저택 주변의 보트 보관소에서 지능이 떨어지는 벤을 만나 레베카에 관해 이해할 수 없는 얘기들을 듣게 된다. ‘나’를 찾으러 보트 보관소 쪽으로 온 맥심은 자제력을 잃고 ‘나’에게 분노를 보인다. 가면무도회 날. ‘나’는 아름다운 흰색 드레스를 입고 처음으로 자신이 저택의 안주인이 된 느낌을 가지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온다. 하지만 손님들은 ‘나’를 보며 당황한다. ‘나’의 드레스는 바로 레베카가 죽기 직전 마지막 파티에서 입었던 드레스와 같은 디자인인 것. 맥심은 분노하며 ‘나’에게 옷을 갈아 입을 것을 명령하고, 댄버스 부인은 사악한 미소를 띠며 ‘나’의 당황한 모습을 바라본다.
2막은 파티 다음 날 아침. ‘나’는 댄버스 부인에게 레베카의 드레스를 입으라고 권유한 이유에 대해 해명을 요구한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나’에게 “레베카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자살을 요구하고 최면에 걸린 듯한 ‘나’는 난간에서 떨어지기 직전, 해안가에서 요란한 경보가 울려 죽음 직전에서 빠져나온다. 정신을 차린 ‘나’는 레베카가 타고 있던 보트와 시체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맥심을 찾아 헤매다가 보트 보관소에서 나오는 그를 만난다. ‘나’는 지난밤 자신의 드레스 선택에 대해 사과하고 레베카를 여전히 사랑하는 그를 이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있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반전이 시작된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기에 무대 위에서도 실재하지 않는 캐릭터인 레베카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나’와 맥심의 운명이 새로 발견된 그녀의 시신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일 것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나’의 모습이 펼쳐질 것인지는 후반부까지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무대 장치 면에서도 거대한 저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화려한 세트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는 무대 등 강렬한 시각적인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
한국 초연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먼저 유준상과 류정한, 오만석이 사고로 죽은 레베카의 어두운 그림자를 안고 사는 남자 맥심 드 윈터 역을 나눠 맡았다. 맨덜리 저택의 집사로 죽은 레베카를 숭배하는 댄버스 부인 역에는 옥주현과 신영숙이 더블 캐스팅됐다. 저택의 집사 프랭크 크롤리 역에는 박완이 출연한다. 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인 ‘나’ 역은 임혜영과 김보경이 맡았다. 그 밖에도 선우재덕은 레베카의 사건 조사를 맡은 사법관 줄리언 대령 역에, 최민철과 에녹이 레베카의 사촌이자 내연남인 잭 파벨 역에, 이경미와 최나래가 소란스럽고 수다스러운 미국의 부유층 여성이자 ‘나’를 말동무로 고용하는 밴 호퍼 부인 역에, 이정화가 맥심의 누나 베아트리스 역으로 각각 출연한다.
글 조용신(뮤지컬 연출가·칼럼니스트) 사진 EMK뮤지컬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