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혜

서정적이면서 극적인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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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월 1일 12:00 오전

정은혜의 소리는 맑고 밝다. 높이 질러내는 소리와 낮게 이끌어가는 소리가 고루 아름답다. 판소리의 서정적 아름다움과 극적 표현을 제대로 표출해내는 젊은 소리꾼 정은혜는 관객들과 단숨에 호흡을 나누는 기량을 갖추고 있다.

귀신이 곡하는 소리
판소리는 극음악이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목구성을 가져야 한다. “바람은 지동 치듯 불고”와 같은 가곡을 부르는 가객은 두성을 통해 내는 고음을 서정적(lyric)으로 표출해내는 다른 차원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오페라 가수와 리트 가수가 엄밀하게 구분되듯, 판소리 가수와 정가 가수는 그 음악적 영역이 서로 다르다. 그런데 정은혜는 이 두 영역의 기교를 동시에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좋은 소리꾼이다.
여섯 시간 동안 장대하게 진행되는 서사의 강과도 같은 정정렬제 ‘춘향가’를 정은혜는 몇 차례나 완창했다.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비장하게 ‘춘향가’는 흘러간다. 이렇게 흘러가는 이야기 가운데서 서정적으로 아름다운 노래에서 정은혜의 별난 특장처가 영락없이 드러난다. 아주 높은 소리인 시시상청으로 질러내는 대목에서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제대로 그려내는 빼어난 기교를 갖고 있다. 정은혜가 부른 옥중의 춘향이 꿈에 귀신 만나는 ‘귀곡성’ 대목의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진양조) 천지삼겨 사람나고 사람삼겨 글만들 제, 뜻 ‘정’자, 이별 ‘별’자를 어이하여 내었는고. 뜻 ‘정’자를 내었거든 이별 ‘별’자를 없애거나. 이 두 글자를 내던 사람은 날로 두고 준비헌가. 천운우습 깊은 밤에 모진 광풍이 불어닥치어 바람은 우루루루 쇄에 지동 치듯 불고, 궂은비는 퍼붓는데, 도채비는 ‘휫 휫’ 밤새 소리는 ‘부우 부우’ 귀신 불은 번듯번듯, 처마 끝 들보 위에서 ‘두런두런 두런두런’ 바람결에 문풍지는 ‘드르르르르’ 옥이라 하는 데가 험지로구나. 형장 맞아 죽은 귀신 난장 맞아 죽은 귀신, 횡사·즉사·오사·급사 죽은 귀신 사면에서 나오는데, 칼 쓰고 수갑헌 놈, 머리 헙숙 키 큰 놈과 행주치마 산발헌 여자 죽어 사귀혼신, 아이 죽어 동자혼신.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움실움실 웃음 치며 훌쩍훌쩍 울음 울며, ‘으으으으 으으으으 히히 어으’ 울음을 우니, 춘향이 기가 막혀, “네 이 몹쓸 귀신들아, 나를 잡어 갈랴거든 조르지 말고 잡아가거라. 내가 무슨 죄 있느냐? 나도 만일 이 옥문을 못 나가고 죽거드면 저것이 모두 다 내 동무로구나. 거울을 들고 보니 예전 얼굴이 간 곳 없고, 치마를 둘러보니 예전 허리가 아니로구나. 도련님이 이제라도 나를 보면 누군 줄을 모르겠구나.”

옥중의 춘향은 칼을 쓰고 앉아있는데, 비몽사몽으로 정신이 혼미하다. 이날따라 날씨가 궂어 비바람이 옥중으로까지 몰아친다. 어디서 ‘두런두런’ 혼잣말 내뱉는 소리가 들린다. 문풍지가 ‘드르르르’ 날려도 그 소리가 섬뜩하게 무섭다. 밤새 소리가 ‘부웃’ 하고 들려오면 도깨비가 ‘휫휫’ 날아다니고 귀신불이 번듯거린다. 음습한 날씨에 마침맞게 귀신이 나타난다. 매 맞아 죽은 귀신들이 나오고, 갑작스레 원한을 품고 죽은 귀신들이 열병식을 하듯 사면에서 나타난다. 이들 귀신은 칼 쓰고 수갑을 찼거나 머리와 키가 크거나 산발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아이 귀신도 있는데,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춘향 주변을 다니면서 울음을 운다. 여러 귀신들의 울음소리를 의성어로 길게 ‘으으으으 으으으으 히히 어으’라고 풀어내는 장면에서 정은혜의 특징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음산한 느낌을 중하성으로 표현하다가 고음으로 질러내는 장면에서 오싹한 느낌이 절정에 이른다. 노래를 듣노라면 저절로 그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 대목이 ‘귀곡성’, 즉 귀신들이 모여 곡하는 소리다. 그런데 정은혜가 부르는 ‘귀곡성’을 듣고 있노라면, 진짜 귀신도 감탄해 그 자리에 와서 함께 곡할 경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은혜가 다니던 남원국악예고에는 소리연습실인 득음굴이 있다. 득음굴은 소리의 공명을 잘 이용해 소리를 연습하기에 아주 적합한 연습실이다. 정은혜가 여기서 ‘귀곡성’을 연습하고 있노라면 으레 기숙사 사감선생님이 스피커에 대고 “정은혜! 남자기숙사 애들 잠 못 잔다. 니 귀신소리 때문에!”라고 연습을 중단시키곤 했다 한다. 정은혜의 ‘귀신 곡하는 소리’에 여러 사람이 잠 못 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녀의 귀곡성은 그만큼 매혹적이다.

정은혜의 소리내력
정은혜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전통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는 분이었다. 은혜는 어려서부터 노래에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한번 유행가를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불렀다. 초등학교 시절에 은혜는 덕진에 있는 전북도립국악원에서 판소리를 공부했다. 전북도립국악원은 당대의 명창들이 모여서 교수진을 구성해 학생과 동호인들을 교육시키는 지역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녀의 스승 최승희 명창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초등학생으로 참여했는데도 대명창인 최승희 선생이 직접 학생들 열 명을 이끌고 수업을 했다. 열 명의 학생이 올망졸망 모여서 스승이 불러주는 대목을 차근차근 받아서 따라 부르고 외워 나갔다. 최승희 명창은 어린 은혜가 처음 공부하러 와서 만났을 때의 모습을 “키도 작고 까만 꼬마 여자아이가 눈치를 보며 소리를 따라하는 모습이 귀여웠다”고 기억한다. 은혜는 처음에 최 명창에게 눈에 확 띄는 소질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 같다. 3년쯤 지난날, 어느 수업 시간도 여전히 열 명 정도의 학생들이 명창의 소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스승은 불쑥, 한 명씩 소리를 시켰다. 은혜는 자신의 차례 때 배운 대로 부끄러움을 타지 않고 소리를 했다. 은혜의 소리기량을 비로소 알아본 스승은 깜짝 놀라 무릎에 앉히고 “그놈 영락없이 허겄다”라고 말하면서 흐뭇해했다. 그때부터 은혜는 최승희 명창의 진짜 소리제자로 거듭나 개인지도를 받게 되었고, 이후 최승희의 소리를 전승하는 전령사가 된다.
최승희 명창은 작은 키에 강단이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특히 정악을 중요하게 생각해 판소리를 배우러 오는 이에게 시조와 가곡도 가르친다. 엄정하고 절제된 성음을 구사하며, 사설을 정확히 발음하고 시김새를 이면에 맞게 구사하는 데 철저한 명창이다. 발림이 진중해 소리의 품격과 어울린다. 은혜는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까지 8년 동안 단 하루도 수업에 빠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최승희 선생이 건강 악화로 위 수술을 받게 됐다. 그래서 은혜도 부득이 소리공부를 쉴 수밖에 없었다. 은혜의 아버지는 한창 기량을 발휘하는 딸을 지속적으로 공부시키려고 다른 판소리 명창을 권했다. 은혜는 다소 강압적인 아버지의 권유에도 “우리 선생님 아니면 소리를 그만두겠다”고 대거리를 했다. 최승희 명창이 나중에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은혜에게 더 열심히 자신의 소리를 전수시켰다.
정은혜는 남원국악고에 진학해 최승희 명창의 지도를 지속적으로 받게 된다. 은혜가 최승희 명창에게 가장 먼저 받은 소리는 정정렬제 ‘춘향가’이다. 정정렬은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전기에 주로 활약하다가 1930년대 중반에 죽은 그 시대 진정한 명창이다. 그는 기존에 있던 ‘춘향가’ 가운데 좋은 더늠은 발췌해 쓰고 그 밖의 더늠은 덜어낸 다음, 거기에다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에 부합하는 사설을 창작했다. 그리고 그 사설에 맞게 새로 작곡해 또 하나의 아름다운 소리를 완성했다. 정정렬의 ‘춘향가’는 고스란히 김여란 명창에게 이어졌고, 이 소리가 다시 최승희에게 전승되었다. 현재 이 소리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은혜는 이 격조 있는 ‘춘향가’를 가장 공들여 배웠으며, 완창도 몇 차례 한 바 있다.
다음으로 그녀는 스승으로부터 강산제 ‘심청가’를 전수받았다. 최승희 명창은 강산제 ‘심청가’를 명고수 김명환 선생에게 배웠다. 김명환 선생은 보성에서 오래 기거하면서 강산제 ‘심청가’를 완전히 터득해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사람이다. 김명환 선생은 속목으로 최승희 명창에게 강산제 ‘심청가’를 전수했다. 정은혜는 강산제 ‘심청가’를 배워서 완창했다. 그리고 완창 실황을 음반으로 제작했다. 이후로도 최승희 명창은 은혜에게 박록주제 ‘흥부가’와 박초월제 ‘수궁가’까지 전수시켰다. 그리고 정은혜는 2009년에 ‘흥부가’와 ‘수궁가’를 완창해 기염을 토했다.
오직 한 명의 스승인 최승희 명창에게서 판소리 네 바탕을 완전히 이수한 정은혜는 서울대학교 국악과 재학 중 송순섭 명창에게서 박봉술제 ‘적벽가’를 사사하게 된다.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6년 동안 재학하면서 송순섭 명창에게 배운 박봉술제 ‘적벽가’는 2011년에 완창했다. ‘적벽가’는 정통 동편제 소리이며, 정은혜의 또 다른 도전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제였다. 이미 동편제의 소리인 ‘흥부가’를 배웠기 때문에, 같은 동편제에 속하는 ‘적벽가’의 판소리 어법에 대해 제대로 확인해가면서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여인의 시간
정은혜는 오랜 기간 판소리를 했음에도 목소리가 맑고 곱다. 높이 질러내는 소리에서 특히 그 기량이 돋보인다. 대학 시절에 은혜는 서양성악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한없이 서양성악에 매료되었던 은혜는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국악원 연수단원을 마친 뒤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 초청을 받았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각색한 실험 오페라음악극 작업에 참여했다. 이 작업을 하며 은혜는 독일에 눌러앉아 본격적으로 성악을 공부하려고 작심했다. 함께 작업한 연출가는 “은혜, 네 소리는 정말 현대적이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라고 평했다. 그것은 은혜에게는 아주 특별한 충격이었다. 자신이 늘 동경해 왔던 서양성악의 전공자에게서 판소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완벽하게 아름답다”라고 듣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은혜는 자신의 소리가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 것인가에 대해 새삼스럽게 깨닫게 됐다.
독일에서의 체험은 자신의 판소리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한동안 자신이 걸어온 판소리에 대해 가졌던 방황을 마치고, 귀국해 석사논문을 완성하고 소리공부에 정진했다. 정은혜는 판소리 완창공연에 힘쓰는 한편, 다양한 장르의 노래와 음악극 작업을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장해나갔다. 서울대학 시절 멘토였던 오용록 교수의 권고로 정은혜는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계획을 세우고 이행하게 된다. ‘정은혜 歌 시리즈’는 전통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하려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 동안에 걸쳐 완창 했다.
정은혜는 올해 들어 특히 활약이 정점에 오른 듯하다. 여섯 시간이 걸리는 ‘춘향가’ 여섯 번째 완창무대를 마련해 도전했다. 그리고 국립창극단의 창극 ‘장화홍련’과 국립극장의 국악뮤지컬 ‘화선 김홍도’에 배우로 출연했다. 또한 아시아 민요음악을 주제로 한 공연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공연의 타이틀은 ‘여인의 시간’이다. 한 여인이 보따리를 움켜잡고 길을 떠나는 포스터의 한 장면이 인상적이다. 판소리 너머에 있는 다양한 소리를 찾아 보따리에 담고, 그 보따리에 담아온 노래를 실타래 풀 듯 들려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시아 민요를 통해 여자의 일생을 담아내고자 하는 뜻을 담은 콘서트다. 정은혜는 말한다. “옛 사람이 민요를 부르는 이유는 망각을 위한 것이다. ‘여인의 시간’에서 민요의 의미는 쾌락과 추억이 아니라, 시간의 망각이다. 시간은 불행했던 과거일 수도 있고, 사랑했던 남자일 수도 있고, 자기보다 먼저 죽은 자식일 수도 있다. 민요의 서글픈
노랫소리가 흐를 때 여자는 시간의 멈춤을 느낀다.”

글 유영대(고려대 교수) 사진 노승환(www.rohsh.com)


▲ 국악방송 새 음원 시리즈
‘젊은 명창이 꿈꾸는 판소리 사랑’
정은혜의 ‘춘향가’ 중 ‘춘향이 이도령 만나는 대목’이 이상호의 북반주로 실려 있다. (국악방송, 2003)


▲ 젊은 소리꾼 5인 ‘판소리’
정은혜가 부른 ‘춘향가’ 중 ‘오리정 이별대목’과 ‘옥중가’ 대목이 임현빈의 북반주로 실려 있다. (2CD, 신나라뮤직, 2003)


▲ ‘정은혜 심청歌’
2008년 남산국악당에서 완창한 ‘심청가’ 실황 음반이다. (3CD, 악당이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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