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 넘치는 대담함과 음표 사이에 녹아 있는 색채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섬세함.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엘렌 그리모의 음악적 지평을 직접 마주할 시간이 돌아왔다. 1월 2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프랑스 출신의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 독주회가 1월 2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2002년부터 DG 전속 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매력적인 스타 연주자인 그녀는 지금까지 DG에서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의 작품을 엮은 ‘리플렉션’, 베토벤과 아르보 패르트의 작품을 수록한 ‘크레도’,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독주곡집, 버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3번 등의 음반을 발표했다. 이번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 K310을 비롯해 베르크의 소나타 Op.1, 리스트 소나타 B단조, 버르토크의 ‘루마니아 민속춤곡’ 등이다. 2009년 12월 첫 내한 공연에 이어 3년 만에 국내 팬들을 만나는 셈인데, 리스트 소나타 B단조는 당시 프로그램에 예고됐다가 베토벤 소나타로 바뀌었기에 더욱 기다려지는 연주다. 내한을 앞둔 현재, 해외 투어로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는 엘렌 그리모의 음악 이야기를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꾸며보았다.
이번 독주회에서 모차르트·베르크·리스트·버르토크를 연주한다. 레퍼토리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2010년에 발표한 음반 ‘레조낭스(Resonances)’에 실린 수록곡들이다. 고전·낭만·현대 등 시대도 다르고 30분이 넘는 대곡과 6분이 채 안 되는 소품이 공존한다. 한때 같은 문화권에 속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활동한 음악가들의 작품이다. ‘다뉴브 강을 따라가는 음악 여행’이라고나 할까. 또 대부분 소나타다. 소나타 형식인 만큼 각 작품에서 주제가 어떻게 ‘메아리’처럼 반복하고 발전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모차르트·리스트·베르크의 소나타는 피아노로 들려주는 오페라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베르크의 소나타 Op.1은 단악장 형식이긴 하지만 주제의 발전과 반복, 변형으로 음악을 전개해 나가는 고전주의 소나타 형식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도 규모는 훨씬 크지만 역시 단악장이다. ‘울림’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은 버르토크의 ‘루마니아 민속 춤곡’이다.
많고 많은 모차르트 소나타 가운데 8번 K310 A단조를 고른 이유가 궁금하다.
이 곡의 분위기는 매우 어둡고 불안하다고 생각한다. 베토벤의 ‘템페스트’ 소나타처럼 고전주의보다는 낭만주의에 가깝다.
*파리에서 발행되는 ‘르 몽드 드 라 뮈지크’는 그녀를 가리켜 “불과 얼음, 열정과 이성을 겸비한 연주자”라고 평했다. 이번 프로그램에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대담함과 디테일에 충실한 섬세함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그녀의 음악적 지평을 골고루 느낄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에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만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 연주에 앞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주자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심적 이미지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소리나 건반 위에서 손끝으로 음색을 찾아가는 즐거움의 노예가 되기 싫었다. 하지만 스타인웨이를 빌려 연주하다가 결국엔 한 대 구입하고 말았다.
특별히 관심이 가는 프랑스 작곡가는 누구인가.
올리비에 메시앙이다. 파리 음악원 재학 시절에 그의 작품을 자주 연주했다. 그도 나처럼 공감각(synaesthesia)의 소유자다. 음악을 연주하거나 들을 때 색깔이 떠오르는 일종의 능력이다.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출신인데 프랑스에서는 자주 연주하나. 살고 있는 곳은 베를린과 미국이다.
프랑스에서 왜 자주 연주하지 않느냐는 불평을 들을 때가 있다. 사실 독일과는 달리 프랑스의 음악 생활은 파리에 너무 집중되어 있다. 내가 프랑스나 프랑스 문화와 결별했다고들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그냥 음악적 지평을 넓히려는 노력으로 이해해 달라.
라벨 협주곡 음반을 제외하면 프랑스 레퍼토리가 거의 없다.
드뷔시나 포레를 연주하려면 음색의 마술사가 되어야 하는데 나와는 좀 거리가 먼 것 같다. 첼리스트 솔 가베타와 듀오일 때는 드뷔시도 가끔 연주한다.
왼손잡이로 알고 있는데, 피아니스트로서 느끼는 장점과 단점이 있는가.
내 연주에서 왼손이 두드러지고 오른손이 약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왼손잡이라는 사실 때문에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다. 자연스레 남들과 다르게 연주하기 마련이다.
당신의 연주를 글렌 굴드에 비교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라이브 연주의 묘미와 개성 있는 연주를 끝까지 추구한다는 점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사실 열정적으로 연주하다가 틀린 음이 튀어나오는 것과 무대 공포증 때문에 틀리게 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루바토를 최대한 사용하고 프레이징도 새로운 각도로 해석해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와의 ‘예술적 견해 차이’로 2011년 루체른 페스티벌과 그해 10월 런던 연주가 취소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초지종을 설명해 달라.
아바도와 함께 호흡을 맞춰온 지 15년도 넘었다. 음악적 파트너십의 약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은 아니다. 아바도는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연주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작업하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게 너무 분명하다.
*아바도는 위암 수술 이후 연주 횟수를 줄이는 대신 자신이 연주하고 싶은 곡목, 연주하고 싶은 연주자를 엄선하는 편이다. 아바도가 그리모와 처음 연주한 것은 1995년 베를린 필하모닉 수석지휘자 시절이다. 아바도는 DG에서 나온 DVD ‘러시아의 밤’에서 그리모와 함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녹음했다. 루체른 페스티벌 실황이다. 2011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는 브람스 협주곡 D단조를 연주할 예정이었는데 라두 루푸가 대신 연주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녹음 당시, 1분 20초짜리 카덴차 서른 마디 때문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던데.
볼로냐에서 아바도가 이끄는 모차르트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협주곡 23번을 녹음했다. 모차르트가 직접 쓴 카덴차가 있고,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극찬했던 부소니의 카덴차가 있는데 아바도는 모차르트 카덴차, 나는 좀더 화려한 부소니의 카덴차를 넣자고 했다. 18세 때 호로비츠의 음반을 들은 후부터 난 부소니의 카덴차에 흠뻑 빠졌다. 카덴차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독주자의 권한 아닌가. 일단 모차르트와 부소니 카덴차 모두 녹음을 끝내고 헤어졌는데 음반 편집 과정에서 아바도가 모차르트 카덴차를 고집하기에 음반사에 전화를 걸어 다른 오케스트라와 다시 녹음하겠다고 했다. 결국 DG에서 나온 모차르트 협주곡 음반에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건반 앞에서 직접 지휘하게 된 것이다. 나에겐 첫 모차르트 음반이자 첫 라이브 레코딩이다.
*음반 해설지에는 카덴차에 대한 별다른 언급은 없다.
너무 유명한 얘기지만 늑대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앳되어 보이는 여성 피아니스트와 늑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연주에서도 늑대 같은 야성을 기대해도 좋은가.
1999년 플로리다에서 우연히 처음 늑대를 만났다. 사실 반은 늑대이고 반은 개였다. 나에게 다가오더니 왼손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펴는 순간 늑대가 머리를 들이댔고 내 품에 어깨를 기댔다. 찌릿한 전기가 내 몸을 통과했다. 그 후 늑대보호재단(WCC)을 설립했다. 뉴욕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시골집 근처에 늑대가 사는 농장이 있다. 늑대, 늑대와 환경, 이들의 미래를 보호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 등을 가르친다. 멸종 위기에 놓여 있는 늑대를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뭔가를 가르칠 수 있는 매력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늑대 보호에 관해 ‘야생의 화음’ ‘특별 수업’ 등 두 권의 책을 썼다. 괴상한 취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교육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키우는 늑대를 보러 많은 학생들이 찾아온다. 클래식 음악처럼 교육이 중요하다. 늑대가 위험한 동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동물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 있나. 늑대와 함께 살면서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은 것 같다. 하지만 연주에 그대로 반영되는지는 청중이 판단할 문제다.
글 이장직 객원전문기자(lully@) 사진 유니버설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