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불의 전차를’

활활 타오르지 못한 불의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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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남사당의 꼭두쇠와 일본인 교사의 우정을 통한 화해를 그려낸 ‘나에게 불의 전차를’은 한일 양국 배우가 펼친 마이너리티 리포트였다. ‘불의 전차’를 끌고 가는 연료에 웃음과 울음은 있었지만 진정성과 집요함, 무엇보다 한국적인 신명은 부족하게 느껴졌다.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1993년 도쿄. 꼭 20년 전이다. 일본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나(月はどっちに出ている)’(최양일 감독)가 큰 화제가 됐다. 흥행에 성공한 배경에는 정의신이 있다. 영화는 양석일의 원작소설 ‘택시광조곡(タクシ狂躁曲)’(1987)을 소재로 만들었는데 재일교포인 택시 운전사가 주인공으로, 감독과 함께 정의신이 공동각색을 했다. 정의신의 희극적 역량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작품이다.
일본에서 재일교포를 다른 작품은, ‘달은 어디에 떠 있나’ 전과 후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이전에는 어둡고 비극적인 분위기가 다수였던 반면, 이때를 계기로 밝고 희극적인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교포 사회나 일본 내 일부 지성인들만 찾던 재일교포 이야기에 일본의 일반 대중이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일본 내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소수자로 살아온 정의신은 ‘마이너리티’에 관한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다. 그는 민족적 ‘마이너’뿐 아니라, 성적 소수자·신체적 장애인 등 소외자를 적절히 결합시키면서, 사람들에게 일종의 마이너리티 연대감을 갖게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보편적 다수라 할 ‘메이저’를 향한 설득력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더 나아가 ‘마이너가 메이저에게 상품이 된다’는 대중성까지 획득하게 됐다. 정의신 특유의 경쾌하고 발랄하게 풀어가는 연출이 만들어낸 성과다.
2013년 서울. 꼭 20년이 지났다. 연극 ‘나에게 불의 전차를’(이하 불의 전차)이 국립극장 무대에 올랐다. 당신은 껄껄 웃었는가? 나는 몹시 착잡했다. ‘정의신표 연극’은 절정을 이뤘으나, 한계도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출 방식이라기보다, 그가 갖고 있는 가치관과 연관된 부분이었다.

쉬운 웃음 뒤에 이어진 교훈극
일제강점기 서울 근교의 농촌이 배경인 ‘불의 전차’의 초반부에 일본인 탈영병을 오무라 마쓰요(히로스에 료코 분)가 숨겨주면서 생기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여기에서 탈영병 신분을 감추기 위해 탈영병에게 여자 한복을 입힌 것은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탈영병은 치마 속에 일본 남성의 훈도시를 찬 채, 이것을 매우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상업 TV의 버라이어티쇼에 나온 예능인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민망(憫?)을 넘어선 엽기(獵奇)의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암리학살사건’을 언급할 때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정의신의 철학과 작품에는 유통 기한이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에서 해방시켜주었다고 좋아할 순 없었다.
나는 대중극이 좋다. 통속극의 웃음과 감동이 좋다. ‘불의 전차’는 웃음이 많아도, 감동이 덜하다. 작품이 가진 대중성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일본식 슬랩스틱과 한국식 개그의 적절한 활용이었다. 궁극적으로 양국의 대중감성을 잘 아는 연출자는 진정성을 작품적으로, 연극적으로 드러냈다고 보여주기 어렵다. 작품에는 저마다 아픈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있다. 그리고 이것을 용서라는 이름으로 포용하려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두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첫째, 각자마다 상처를 극복하는 방식에서 깊이가 덜하다. 둘째,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식에서 울림이 덜하다. 왜 그럴까? 정의신이 만들어낸 인물 모두가 스테레오타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요, 그가 만들어낸 사건이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대립되는 것을 두루 포용하려는 마음이 너무도 강했던지, 대중극을 교훈극으로 끝내려는 느낌마저 들었다. 작품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을 가졌다면, 동양연극의 ‘변사극’ 같은 전통이라고 억지스럽게 변호할 수는 있을까? ‘변사극’은 여러 상황이 끝난 후에, 변사가 주제 혹은 철학이 되는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구호’처럼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내 눈에 비친 ‘불의 전차’가 딱 그랬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형제애’다. 여기에는 일본인 야나기하라 나오키(구사나기 쓰요시 분)와 조선인 이순우(차승원 분)의 우정이 주축이 된다. 나오키는 조선의 백자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 관점의 연장선에서 “지금은 남사당의 기예가 천대를 받고 있어도, 100년 뒤엔 빛을 발할 것”이라는 말을 순우에게 전한다. 일자무식 꼭두쇠인 순우에게 초등학교 교사 나오키의 이야기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순우는 추석날 나오키를 찾아가고, 두 사람은 학교 지붕 위에 올라가 보름달을 보며 의형제가 된다. 극에서 두 사람은 너무나 쉽게 형제가 되고, 쉽게 화해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순수’하기 때문에 그럴까? 분명 이 작품과 내용과 형식은 평면적이고,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가져온 소재들은 일차적이다.
작가가 작품의 철학 혹은 주제를 작품 속에 제대로 녹여내지 못할 때의 방식이 있다. 이를 주인공의 ‘대화’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것이 여의찮을 때는 특정인의 ‘대사’ 속에 넣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모면하거나, 조금 ‘있어 보이게’ 하는 방식이 있다. ‘인용’이다. 기존의 시·소설·영화 등에서 가져와, 살짝 기대는 방식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나오키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연출자는 이전에 나왔던 대사만으론 만족하지 못했는지, 중간에도 슬쩍 삽입했던 시(詩)를 이 장면에서 다시 한 번 인용한다. 그리고 나오키는 월리엄 블레이크의 ‘나에게 불의 전차를’을 목청껏 외친다.
백자와 남사당, 같으면서도 다른 지향점
‘불의 전차’에서 정의신은 줄을 앞에 두고 서투른 곡예를 하는 느낌이다. 실제 남사당에서 줄타기를 잘하는 사람은 이쪽으로 쓰러질듯, 저쪽으로 쓰러질 듯하다 결국 어느 쪽에도 쓰러지지 않고 줄을 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조선의 줄꾼’이다. 정의신은 그 좌우 기울기의 정도가 너무 약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그가 정말 좋은 배우들을 만났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차승원이란 배우가 실제로 줄타기를 하지 않았다면, ‘불의 전차’는 어떤 작품으로 자리매김 됐을까?
전통예술에 관여하는 입장에서 보면, ‘남사당’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가! 하지만 아쉽게도 남사당의 종목을 일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 이외에 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남사당의 공연 종목 중 박첨지놀음을 통해서 극적 진행의 복선적인 의미나 극 속 인물과의 복합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불의 전차’가 갖고 있는 최고의 한계는 ‘조선예술’을 바라보는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의 시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조선 식민지시대 일본의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백자와 같은 민간 예술품에 큰 관심을 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조선예술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식민지 지배국 지식인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한국의 예술을 쓸쓸한 정서가 느껴지는 적요(寂寥)의 정서로 생각했다.
과거 전통예술을 한(恨)이란 단어로 통칭하는 데 익숙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한(恨)보다는 흥(興), 더불어 ‘신명’이란 단어로 한국 예술의 미를 설명하게 됐다. 식민지 시대를 다룬 작품이기에, 그 작품 속 철학이나 미학도 거기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불의 전차’는 백자와 남사당을 함께 본다. 백자와 남사당은 당시 조선 서민의 삶 가운데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되, 그 미학적인 지향점이 서로 다르다. 정의신의 마음에 품은 뜨거운 전차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의 작품을 끌고 가는 연료에는 웃음과 울음, 엽기까지는 있어도 진정성과 집요함, 무엇보다 한국적인 신명은 상대적으로 부족해보였다.
정의신은 남사당놀이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남사당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자신의 작품 속에 평면적으로 늘어놓았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입체가 아니다. 남사당의 중심 악기인 장구로 비유한다면, 그는 복판을 힘껏 ‘떵’ 내리쳐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했다. 그저 변죽을 ‘기덕’ 혹은 ‘다닥’ 여러 번 연타했을 뿐이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불의 전차는 아니었다. 신명을 연료로 해서 가지 않았기에.

글 윤중강(음악평론가)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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