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꾼들’

환상과 현실의 경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속도가 생명인 퀵서비스와 힘·기술이 핵심인 이종격투기를 소재로 한 ‘싸움꾼들’. 2012년 창작팩토리 우수작품 제작지원 선정작으로, ‘그게 아닌데’로 2012년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연출가 김광보의 올해 첫 작품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작품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컸다. 제목도 꽤 도발적이지 않은가? 2월 7~17일, 설치극장 정미소.
글 이은경(연극평론가) 사진 극단청우

이 작품의 중심 서사는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청년과 타자의 트라우마를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확인하는 최교수와의 갈등이다. 이들에게서 오이디푸스와 메피스토펠레스가 연상된다. 서사는 사실적인 흐름을 의도적으로 해체하여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파편화된 이미지로 제시된다. ‘퀵 27호’로 불리는 청년은 속도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만 왜 달리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름이 아닌 직업군의 표기로 스스로를 명명한다는 것은 이미 개인의 정체성이 부재하는, 익명 속에 자신의 존재를 은폐시킨 인물임을 의미한다. 왜 그런지는 조각조각 던져지는 존속살해의 기억을 통해 드러난다.
청년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는 무대는 들쭉날쭉한 나무 판자를 얼기설기 이어놓고, 무대 중심에 같은 재질의 사각 링을 놓아 폐허의 이미지를 담아낸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러 어머니까지 죽음에 이르게 한 청년의 숨겨진 기억은 교수와의 심리 상담으로 인해 고스란히 떠오른다. 조종하고, 명령 내리는 최교수에 의해 청년은 내면적 자아와 맞서게 된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응집된 내면적 자아는 마스크로 환치되어 현실적 자아인 청년과 링이라는 무의식 속에서 대결한다. 이들의 갈등은 이종격투기를 통해 격렬한 몸의 부딪침으로 표현된다. 사각의 링은 무한경쟁의 현실세계도 은유하기에 중의적 공간이다.
겉으로 드러난 두 남자의 갈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존재이다. 이 작품에는 세 명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청년의 어머니는 폭력 남편으로부터 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가족의 울타리에서 아들을 밀어내기만 한다. 청년이 어머니를 위해 부친을 살해한 후에서야 죄를 대신 뒤집어쓰는 것으로 뒤늦게 희생하고자 한다. 최교수의 아내이자 윤의 어머니는 남편이 주는 약에 의존해 현실에서 도피하여 딸을 보살피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들의 모성은 왜곡되거나 거세되었다. 청년이나 윤은 어머니라는 최소한의 안전망도 갖지 못한 채 가부장적 아버지 밑에서 어두운 기억만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윤이 청년에게서 동병상련의 연민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반해 청년의 옆방에 사는 임신한 여자는 모성이 넘치는 인물이다. 청년의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주고 싶어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뱃속 아이를 사랑으로 대한다. 청년의 갈등을 위로하고, 조건 없이 지켜봐주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청년은 결국 자신의 트라우마인 마스크를 쓰러뜨린다. 공연 내내 작은 링 위에서만 움직이던 청년이 비로소 링에서 내려와 현실의 최교수에게 도전한다. 마침내 청년이 비극적 영웅처럼 자신의 운명을 휘두른 그 누군가를 향해 “어딨어! 나와! 한판 붙어보자고”라고 외칠 때 밝은 조명, 파열음과 함께 급작스레 공연이 끝난다. 열린 결말로 인해 청년이 과거를 딛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지, 아니면 무모한 도전으로 실패에 머무를지에 대한 판단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이러한 의도는 배우들을 무대 밖으로 퇴장시키지 않고, 무대에 그대로 앉아있게 한 서사적 연출을 통해 무대와 객석 간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타는 반복 장면에서 속도감이 표현되지 않아 청년의 절망감이 잘 드러나지 않은 점, 의욕은 넘쳤지만 젊은 배우들의 연기력이 미숙했던 점 등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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