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데보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4월 1일 12:00 오전

우고 살세도의 ‘가객들의 여행’을 극단 물결이 ‘돈데보이’란 제목으로 무대에 올렸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멕시코 작가의 작품으로 티르소 데 몰리나 수상작(1989)이다. 화물칸에 숨어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던 열여덟 명의 멕시코인들이 잠긴 열차 문을 열지 못해 질식사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다. 이 작품의 탁월함은 현실의 비극성을 환기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인간의 존재의미와 구원이란 철학적 문제로까지 주제의식을 확장했다는 데 있다. 3월 14~17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글 이은경(연극평론가) 사진 극단 물결

최소한의 조명과 음악, 그리고 움직임이 어우러진 인상적인 인트로에서 유일한 생존자 미키의 고통과 계속되는 불법 밀입국의 현실이 침묵과 어둠으로 표현된다. 대극장의 깊이와 높이를 충분히 활용한 무대는 다양한 오브제의 활용으로 입체적이며, 역동적인 공간으로 살아난다. 사다리는 철로·기차·계단 등 다양한 대상으로 변주된다. 밀폐된 화물칸을 상징하는 철골 구조물은 높이가 다르게 변용되면서 죽음 앞에서 삶을 갈구하는 인물들의 희망과 절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여행 가방은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까지 담보하는 밀입국 현실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공연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며, 참극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비극적 현실을 환기시킨다. 특히 무대 바닥을 연결해서 기차 타는 행위를 표현해 미국 역시 멕시코처럼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냉철한 현실인식까지 담아낸다.
‘돈데보이’(송현옥 연출·김선욱 번역)는 극단 물결의 정체성을 드러내듯 움직임과 무용 중심에 음악의 비중까지 커졌다. 인트로에서 불법 밀입국의 비애를 노래한 ‘돈데 보이(Donde Voy)’와 신에게 깨달음을 청하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Across The Universe)’를 배경음악으로 활용하여 주제를 암시한 것처럼 음악을 적극 활용하여 비극적 현실을 서정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열차 안 인물들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 ‘모르는 사람’이 그들 각각의 손을 잡으며 “우리를 위해 기도해요”라고 위로할 때, 여인들이 ‘우리를 위해’를 합창하며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는 그 어떤 대사보다 울림이 있었다.
이 작품은 미키가 진술하는 열차에서의 비극적 사건, 남은 여자들의 슬픔, 사건 이후의 현실 세 층위의 서사가 교직되어 있다. 서사가 얽히면서 시공간은 교란되고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 욕망과 영성의 경계는 무너진다. 이렇게 복잡한 구성의 작품이 풍부한 청각적 언어와 인물 내면의 시각적 재현으로 명료하게 전달된다.
기차 속 배불뚝이와 차요의 환상이 딸과 연인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장면처럼 죽은 자의 고통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한 프레임 안에 담는다. 가족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무대 전면과 후면으로, 인물들의 위치를 이동시켜 입체적으로 연출한 것 역시 떠난 자뿐만 아니라 남은 자의 입장까지 반영한 것이다. 철골 구조물 위 사다리에 올라 불안하게 흔들리며 “내가 살아있긴 하는 겁니까?”라고 절규하는 미키의 외로운 모습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잔상으로 남을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모스코의 할머니와 차요의 연인이 서로의 고통을 위로하는 장면이나 ‘모르는 사람’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맞은 예수로 언급되는 미사 장면이 설명적으로 연출되어 상징적이며 함축적으로 전개된 공연의 맥락이 흐트러진 점은 아쉬웠다. 또한 참혹한 현실을 소재로 했지만 현실의 어두움까지도 미학적으로 연출되어 인물들이 드러내는 공포·광기·폭력이 절박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을 덮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공연이었다. ‘돈데보이’는 원작의 진지함에 감각적이며 세련된 연출, 배우들의 조율된 연기가 더해져 서정적으로 표현된 한 편의 시와 같았다. 관객은 진심으로 스스로를 향해 ‘Donde Voy(어디로 가야만 하는 건가요)’라고 되묻게 된다. 멕시코의 비극이 탈북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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