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음악 전반을 아우르려는 손열음의 의욕은 알캉ㆍ카푸스틴ㆍ볼컴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나타나고 있었다. 피아노 마니아를 넘어선 ‘피아노 파일’들의 관심사까지 충족시키는 독특한 경지에 다다르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3월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사진 크레디아
음악회의 첫머리가 쇼팽과 연주자의 ‘탐색전’으로 시작된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독주회의 도입을 위한 탐색이 아닌, 앞으로 손열음이 연주할 이 작곡가에 대한 총체적인 관점에 대한 정리가 느껴졌다. 다소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시작한 쇼팽의 레퍼토리들은 발라드 2번ㆍ마주르카ㆍ왈츠ㆍ스케르초 등으로 이어졌는데, 무엇보다 다이내믹 배열의 독창적인 시각이 눈길을 끌었다. 이로 인해 나타난 예상 밖의 뉘앙스와 작품 전체를 살피며 연출한 아고긱은, 템포 루바토를 양념처럼 사용하며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연주들과 차별되며 짙은 음영을 남기는 해석을 보였다. 주저하듯 숨어있는 비극적 서정성을 적절히 포착해낸 발라드 2번, 부드러운 음상으로 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낸 왈츠 G♭장조, 리듬감과 템포의 교묘한 재배치를 통해 피아니스틱한 매력을 극대화시킨 스케르초 2번 등이 탁월했다.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는 알캉의 대표작인 12개의 단조 에튀드 Op.39 중 마지막 곡 ‘이솝의 향연’은 아마도 이 작곡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청중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신선한 인상을 오랫동안 남긴 무대라고 보여진다. 단순한 화성 진행 속에 나타나는 비르투오시티의 극단적인 강조, 다이내믹 레인지를 최대한 넓혀 그려지는 그로테스크한 정서, 블랙 코미디적인 스토리텔링 등 손열음은 작품이 요구하는 안팎의 과제들을 너끈히 처리해내는 ‘괴력’과 함께 피아노 문헌에서 아직은 마이너리티로 분류되고 있는 알캉의 매력 중 일부분을 정확히 재현했다. 일반적인 피아노 독주 무대에서 우리가 접하던 피아노라는 악기의 ‘목소리’와 전혀 다른, 신경지의 음향을 살짝 엿보는 순간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후반부에서도 거침없는 비르투오소의 면모는 계속됐다.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8번은 작품 속에 내재된 갈등의 해소와 복잡한 음악적 논리를 푸는 데 관심 많은 손열음의 메인 디시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보여진다. 단 ‘전쟁’이라는 비극적 요소를 작품 속에 담기에 그 결말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예상치 못한 줄거리가 될 수도 있는데, 아픔에 대한 치유와 인간 내면에 차오르는 울분에 대한 자기 위안의 정서와는 달리 손열음의 연주는 다소 화려하고 외향적인 마무리를 꾀한 듯하다. 변덕스런 템포 설정과 의식적인 불협화음으로 전쟁의 참상에 대한 비판을 가한 1악장, 작곡가 특유의 낭만성을 담아 여유롭게 그린 2악장의 느린 왈츠를 지나 하이라이트는 역시 3악장 중간부의 장대한 바소 오스티나토. 쾌적한 템포로 밝은 뉘앙스로 밀어붙이듯 연주해낸 해석에서 풍자적인 요소가 생략된 것은 아쉽다. 끝내 해피엔딩의 피날레를 보고 싶은 연주자의 취향이 반영되었다고나 할까. 호불호가 엇갈릴 수 있는 대목이다.
음악회의 엔딩은 러시아의 개성 만점 재즈 작곡가 카푸스틴의 에튀드 세 곡이 장식했다. 쉴새 없이 몰아치는 리듬과 독특한 화성의 향연, 피아노 연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스포티한 쾌감의 극치를 기대할 수 있는 작품인 바, 연주자의 절취부심이 느껴지는 만족스런 호연이 열띤 반응을 이끌어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가득 채운 청중의 함성은 콩쿠르나 기존 연주 무대의 보수적 정서를 극복해내고 새로운 레퍼토리와 피아니즘의 경지를 찾아나선 젊은 연주자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였다. 아마 오랫동안 회자될 일곱 곡의 앙코르 중 필자는 첫 곡으로 연주된 윌리엄 볼컴 작곡의 ‘뱀의 키스’에 주목한다. 미국의 독특한 정서이자 리듬인 래그타임에 대한 진지한 고찰, 청중과 재미있는 호흡을 맞춘 쇼 피스로 양면 모두를 성공시키는 현명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