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시민문화회관 대극장이 낯선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무대 안쪽에서부터 객석으로 향하는 짧은 런웨이는 무대 끝에서 T자형으로 벌어진다. 그 옆으로 난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 런웨이 오른쪽 객석, 즉 ‘패션쇼 관람석’에 자리 잡았다. 공연티켓에는 R열과 L열(등급이 아니라 열이다), 낯선 알파벳이 등장하는데 각각 무대 위 오른쪽ㆍ왼쪽 객석을 뜻한다. 헨델의 오페라 ‘세멜레’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패션쇼가 하나 된 이 프로덕션을 어느 장소에 올릴지, 통영국제음악제는 긴 시간 고민에 빠졌다. 실내ㆍ실외를 막론하고 통영 시내의 여러 공간이 후보로 언급됐으나 결국 시민문화회관 대극장이 낙점됐다. 구관은 정말 명관일까. 차악(次惡) 정말 최선일까. 무대의 깊숙한 ‘측면’에 앉아 저 멀리 객석 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가수의 입 모양 같은 연기 디테일을 매 순간 관찰하는 건 일찌감치 포기한다.
악단은 런웨이의 오른편에서 객석을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펑크족으로 분한 칼라이도스코프 앙상블의 주요 단원들이 런웨이로 슬렁슬렁 걸어나오면, ‘세멜레 워크’(루드거 엥겔스 연출)라는 한 편의 쇼는 시작된다. 커다란 테오르보를 끌고 등장한 연주자. 그 묵직한 체격과 펑키한 의상 탓인지, 방금 악기로 뭔가 한 대 치고 나왔다 해도 믿을 만큼 대단한 불량스러움을 과시한다. 첼로든, 바이올린이든, 테오르보든 이 쇼에서는 악기도 악기 이상의 이미지를 ‘입는다’.
머리를 귀 옆으로 날렵하게 붙인 지휘자 올로프 보만이 등장하고 드디어 연주가 시작된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팀이 일찍이 내한해 직접 선발한 10여명의 국내 모델들은, 부피는 크지만 꿈처럼 가벼워보이는 의상을 입고 캣워크를 펼친다. 그 가운데서 천연덕스럽게 걷던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자모이스카는 드디어 목소리를 내며 자신이 세멜레임을 밝힌다.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처녀 세멜레는 런웨이 바닥에 엎드려 처절히 울기 시작한다. ‘지상’에서 그녀가 입은 의상은 마름모 네크라인이 가슴을 훤히 드러내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특유의 드레스이다. 소재며 색감이며 특별할 것 없다. 이렇다 할 무대 장치 하나 없지만, 이 옷이 세멜레를 정확히 정의한다. “인간이다. 한낱 인간.”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세멜레의 한탄을 들은 주피터는 그 처지를 딱하게 여겨 세멜레를 ‘신계’로 데려간다. 여기서 모델들의 두 번째 런웨이가 펼쳐지는데, 전에 없이 화려하다. 금은보화 저리 가라 할 금빛ㆍ은빛 드레스를 입은 모델들의 도도한 캣워크는 그야말로 ‘신들의 향연’이다. ‘세멜레 워크’의 통영행이 결정됐을 때, 이 ‘오페라 무대’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 오트쿠튀르 의상을 우리 모델들이 잘 소화해낼 수 있을지, 동양인 모델들과 서양인 연주자들 사이에 시각적 괴리감은 없을지,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기우였다. ‘서로 다름’은 오히려 작품의 주제를 확고히 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의상은 ‘세멜레 워크’의 배경이자 메타포이다. 신계를 암시하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표정 없는 얼굴로 천천히 직선 보행을 하는 모델들은 ‘신은 아름답다, 신은 화려하다, 신은 엄격하다, 신은 인간과 다르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무언으로 전한다. 특히, 대한민국 통영 무대에 선 여신들은 가수 및 악단과 너무 다른 외모를 하고 있어 ‘신은 인간과 다르다’라는 메시지를 더욱 명확히 드러냈다. 동양 모델ㆍ서양 모델을 떠나 ‘모델’이라는 비현실적 존재가 주는 압도는 예상보다 컸다. 자를 대고 선을 그은 듯 곧고 긴 다리, 골격과 근육이 고스란히 비치는 얇고 탱탱한 피부, 도자기 빛 살결, 작은 머리, 뒤로 젖혀진 어깨와 활처럼 휜 허리, 아슬아슬한 휘청거림. 런웨이 바로 옆에서 지켜본 그 모습에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나와 같은 인간이세요?” 이 순간만큼은 가수들의 제스처를 모든 각도에서 정확히 관찰할 수 있는 정면 객석이 부럽지 않다!
이야기의 배경이 신의 공간으로 넘어간 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반짝인다. 캐주얼한 차림으로 지상세계에 내려왔던 주피터는 신계에서도 여전히 펑키하고 편안한 차림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입은 타탄 체크의 킬트 스커트 역시 작고 정밀한 은장식을 자랑한다. 신계로 간 인간 세멜레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런웨이를 걷는다. 그러나 그녀의 드레스에는 은붙이는커녕 쇠붙이 하나 없다. 전보다 화려해지긴 했지만, 잠자리 날개처럼 반짝이는 얇은 옷감에 꽃과 풀, 흙색이 어우러졌을 뿐이다. 세멜레가 울고 있었던 그 땅을 그려내듯이. 다시 ‘옷’이 말한다. “인간이다. 한낱 인간.”
인간은 욕심을 부린다. 인간이라 만용을 부린다. 세멜레는 스스로를 영생의 여신으로 만들어달라고 주피터를 조른다. 주피터는 자기가 완전한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인간인 세멜레가 그 신성을 견디지 못하고 타 죽을 것을 경고하지만, 인간의 욕심에 브레이크 따위는 없다. 신과 인간 사이의 갈등은 무대 위 실질적인 혼돈과 폭력성으로 드러난다. 세멜레는 모델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그들을 모욕한다. 런웨이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도 똑같은 무례를 범한다. 세멜레의 괴성을 받아내는 나도 신인가? 아니다. 곧 주피터가 나타나 ‘인간’인 관객을 다시금 조롱한다.
전자음향으로 변형된 칼라이도스코프 앙상블의 사운드는 우리의 욕심이 낳은 광기를 표현하고, 동시에 그 예견된 최후를 재촉하고 있는 듯했다. “어서 그냥 불태워버려!” 테오르보ㆍ하프시코드ㆍ오르간, 그리고 전자음향이 뒤섞인 ‘간극’의 사운드는 무대 위 여러 시각적 자극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드디어 주피터가 진정한 신의 모습을 하고 세멜레 앞에 나타난다. 무대 안쪽 정면으로 커다란 전구 여러 개가 격자 무늬로 달린 조명판이 내려온다. 세멜레가 기다렸다는 듯 환한 조명 앞으로 다가가고, 곧이어 극장은 암흑에 빠진다. 암흑은, 주피터의 신격에 불타버린 인간 세멜레의 소멸을 상징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불태운다는 신의 위대함과 막강함을 얼마나 제대로 표현하느냐는 이 프로덕션을 올리는 극장 혹은 공간이 갖는 숙제일 것이다. 지난 1월 시드니 공연에서, 이 조명은 순간적으로 무척 밝게 터졌다가 서서히 사라졌고 공간은 암흑으로 변했다. 옆으로 퍼진 프로시니엄 무대가 아닌, 길고 좁은 실제 런웨이였기에 가능한 효과였다. 공간의 기본 형태에 따라 대미의 효과는 달라질 여지가 있는데, 이번 통영 무대의 신격 노출은 파괴력 없이 ‘너무’ 소박했다. 세멜레는 신격의 불구덩이가 아닌, 뜨뜻한 불가마로 다가가는 모양새였다.
진짜가 필요해
통영의 ‘세멜레 워크’는 음악적으로 훌륭하고 신선했던 ‘세멜레’, 주제를 더욱 견고히 한 비비안 웨스트우드 ‘캣워크’의 환상적인 만남이었다. 다만 공간이 불러온 아쉬움, 즉 객석에 앉은 관객은 런웨이 관객을 부러워하고, 런웨이 관객은 객석의 관객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대미의 파괴력이 줄어든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았다. 런웨이라는 공간을 염두에 둔 작품을 프로시니엄 무대에 올린다고 했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세멜레 워크’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연이 있었던 축제의 둘째 날, 3월 23일. 통영시민문화회관 티켓 부스에는 ‘세멜레 워크 매진’ ‘루토스와프스키 4중주단 매진’이라고 적힌 종이가 나부꼈다. 극장 앞의 활기와 열기는 근 몇 년 사이 본 것 중 최고였다. ‘세멜레 워크’라는 카드에 운명을 건 2013년 통영의 선택은, 위험천만했으나 성공인 듯했다. 그러나 축제의 후반부를 취재한 유혁준 필자는, 쓸쓸함에 대한 씁쓸함을 전한다. 도전보다는 도박에 가까웠을까. 더 나은 차원으로 이동하려는 세멜레의 과욕은 오늘 통영의 자화상일까.
올해 통영의 기형적 프로그램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도박이든 도전이든 ‘환기’가 필요했음은 분명하다. ‘세멜레 워크’로 환기가 되었음은 더욱 분명하다. 통영이 아니면 누가 이러한 무모한 도전을 일삼고, 누가 이런 파격의 프로덕션을 가져오겠는가. 통영이 아니었으면 이 땅에서 볼 수 없었을 작품들이 많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크고 화려하게 머리를 키우고 몸통과 꼬리에 힘을 빼야만 했던 통영의 선택. 아마도 그들은 눈물을 머금었을 것이다. 그 눈물이 차악이 아닌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기 위해서 내년이 중요하다. 매년 머리만 큰 용을 하늘에 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멜레 워크’의 신선한 감동을 가슴에 안고 다음 날인 24일 낮에 윤이상기념공원 메모리홀을 찾았다. 파르칼 뒤사팽의 ‘모모’가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사랑스런 아이들을 꼭 품고 자리한 100여 명의 가족들 사이에서 어린이를 위한 음악극을 봤다. 클라리넷ㆍ기타와 만돌린ㆍ바이올린ㆍ첼로를 잡은 네 명의 연주자와 한 명의 배우가 무대를 채운 전부다. 아! ‘옷걸이’를 빼놓을 수 없다. 옷걸이는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눈ㆍ코ㆍ입이 그려진 흰 풍선을 머리 격으로 올리고 할아버지를 연기했다. 배우 이창수는 서커스단에서 나고 자란 꼬마 모모, 모모가 어서 줄타기를 익히길 바라는 할아버지 위베르토, 그리고 내레이터를 홀로 연기했다.
할아버지의 성화에 줄(이라 설정된 평형대)에 오르는 모모, 그 위태로운 걸음걸음을 지켜보는데 가슴 깊숙이에서 뭔가 울컥 하고 쏟아졌다. 초라하다면 초라한 무대, 처음 보는 배우, 처음 듣는 음악, 그리고 내 동료는 꼬마 관객들. 이 모든 미완성의 조합이 나를 울컥하게 했다. 그 순간이 완성이다.
‘세멜레 워크’와 ‘모모’를 평행선에 놓고 제작비ㆍ작품성ㆍ의미 등을 비교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다만 말하고자 하는 건, 통영의 봄은 그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로만 채워져야 한다. 누군가는 ‘진짜가 뭔데’라고 물을 것이다. ‘세멜레 워크’와 ‘모모’라는 양극의 무대는 진짜였다.
진짜는, 당신들만 할 수 있는 것. 그게 진짜다.
글 박용완 기자(spirate@) 사진 통영국제음악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