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극이 연달아 올려진다. 지난봄 레프 도진이 연출한 ‘세 자매’가 관객과 만났고, 그 뒤로 ‘벚꽃동산’을 재구성한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 명동예술극장의 ‘바냐 아저씨’, 예술의전당의 ‘세 자매’가 공연을 예고하고 있다. 이로써 일 년 내내 체호프 공연을 만끽할 수 있게 됐다. 관객에겐 취향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는 만찬이 차려진 셈이다. 그 가운데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는 차이콥스키 피아노 소나타 선율로 시작되고 끝나는 조금 독특한 형식으로 관객과 만난다. 6월 20~30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선율에 흐르는 체호프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지하 연습실. 문 앞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문이 열리자 한꺼번에 여러 명의 인사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출연 배우만 16명. 웬만한 극단에서는 엄두도 못 낼 규모의 극이다. 또한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저력과 체호프 극에 대한 열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연습실 바닥에는 무대 디자인의 구분선들이 마킹되어 있고 바로 런스루 장면이 진행된다.
공연의 형식은 기존 체호프 극과 달리 독특하다.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등장하고 공연 내내 피아노를 연주한다. 단순히 공연의 음향 효과나 반주 차원이 아니라 피아니스트의 콘서트 안에 ‘벚꽃동산’ 공연이 삽입되는 형식이다. 객석에 앉아있던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라가면 공연이 시작되고 연주를 끝내고 무대를 내려오면 공연은 끝난다. 연주되는 작품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소나타 Op.37이다. 실제로 차이콥스키와 체호프는 동시대에 활동한 예술가들이고 서로 친분 관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단순한 친분 관계를 넘어 ‘마지막 낭만주의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4악장 피아노 소나타 형식이 ‘벚꽃동산’의 4막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체호프와 차이콥스키라고? 체호프 극의 특성 중 하나로 공연 전체가 음악적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논평하는 연구자들은 많다. 러시아 연출가 메이에르홀드 또한 체호프의 마지막 희곡 ‘벚꽃동산’을 교향곡에 비유하면서 특히 소리의 차원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체호프 극은 결말을 향한 단일하고 집중된 극행동이 중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음악처럼 첫 장면의 주제음이 극 전체에 걸쳐 다양하게 변주되는 특성을 갖는다. 체호프의 극이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비극처럼 강렬하지는 않지만 일상적 주제를 풍부하게 변주해내면서 서정적인 색채를 갖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체호프 작품 속에는 음향 효과와 음악의 활용이 빈번하다. 공연의 감초 역할처럼 기타를 치는 인물이 꼭 등장한다. 체호프가 잡아내는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서,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주제가 저주가 아닌 다독거림처럼 들리는 것 또한 음악의 힘이 크다.
체호프는 단편 유머작가로부터 출발했다. 체호프의 극은 아무리 비극적인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벚꽃동산’에 등장하는 불행의 아이콘 ‘스물두 가지의 불행’ 예피호도프는 전형적으로 희극적인 인물이다. 나이 쉰한 살의 주인을 여전히 애 취급하면서 졸졸 따라다니는 늙은 하인 피르스는 또 어떠한가.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는 비장하게 권총을 빼 들지만 제대로 겨누지도 못한다. 비극적 순간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나버리기 일쑤다.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엎어지고 자빠지는 등장인물들도 많다. 그럼에도 체호프 극은 우스꽝스럽지 않다. 채플린 영화처럼 낄낄거리며 웃을수록 묘하게 코끝이 시큰해온다. 웃음과 음악은 체호프 극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다.
어느 피아니스트의 봄날, 체호프와 함께 떠난 인생 여행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이하 벚나무 그늘)’ 공연에서 음악이 중심 코드를 이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부쩍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차이콥스키라고? 무언가 범상치 않다. 그러고 보니 실제 피아니스트이자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공양제의 존재가 이채롭다. 공양제는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2011년 작 ‘맹진사댁 경사’에서부터 음악 부분에 참여하고 있다. 체호프 극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소나타와 연결시키는 아이디어도 공양제의 적극적인 제안에서 비롯됐다. 공양제는 차이콥스키를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소개하면서 지나간 세월에 대한 향수가 소나타 형식의 순환 구조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점이 과거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반복적으로 되새기고 있는 체호프 극의 순환 구조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공양제는 술 취한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등장한다. 지금은 낡고 쇠락한 극장의 무대 한 편, 먼지를 뒤집어쓴 피아노를 열고 손가락을 주무르는 그의 모습에서 묘한 감정이 전이된다. 그가 어떻게 무대에 서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공양제는 대진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음악사와 작곡을 전공한 피아니스트다. 그러나 졸업과 함께, 한창 음악에 대한 열정이 높았던 때의 도전들이 연이어 실패로 돌아오면서 어느 순간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좌절감을 느꼈다. 인생의 바닥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PC방에서 배우로 활동 중인 중학교 동창을 만나고 키보드 연주자가 필요했던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 연극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연극과의 첫 만남은 ‘아직 내가 쓸모가 있구나, 내 손이 쓸모가 있구나’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이었고, 이후 음향을 비롯해 극단의 일들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벚꽃동산’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르스가 “여기가 내 자리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지금은 연극을 하고 있는 이곳, “무대 위의 피아노 앞이 바로 내 자리”라고 말할 정도로 연극인으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벚나무 그늘’ 첫 장면에서 자신의 빈손을 주무르는 장면이 예사롭지 않았던 데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아직은 무대 위에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다”라고 말하는 신인 연기자이지만, 체호프 공연 안에는 또 한 편의 인생 드라마가 흐르고 있었다.
더불어 공양제는 이미 극단 워크숍 작품으로 ‘불사 햄릿’이라는 2인극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바 있다. “셰익스피어보다 체호프가 더 좋은 것이냐?”라는 질문에 되돌아온 대답이 재미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강렬한 감정들이 표현되는 극이다. 마치 라흐마니노프나 차이콥스키처럼 화려한 기교의 극이다. 그런데 체호프는 그렇게 후벼파는 강렬함은 없지만 빨려드는 매력이 있다. 마치 모차르트 음악과 같다. 단순한 음 몇 개만 가지고 사람 마음을 움직인다. 한 음 한 음이 마음을 울린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보다 체호프에게 더 마음이 간다. 체호프의 극에는 말이 하나하나 살아있다. 앉아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는데 그 말들에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다.” 옆에 있던 연출가 김승철은 “공양제는 드라마와 연기에 대한 이해가 깊고 빠르다”라며 논평한다. 공연 포스터 사진에서 우는 듯 웃고 있는 모습이 바로 공양제이다. 그 모습에서 이 공연이 다루고 있는 ‘봄의 몰락’이 곧 인생 끝의 절망의 모습이 아니라 ‘여름으로의 새 출발’이기도 하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의 봄의 몰락, 그리고 새로운 출발
“사랑이라고? 그건 제정 러시아 시대에나 가능했던 일 아냐?” 최근 개봉한 톨스토이 원작 ‘안나 카레니나’의 도입부에 나오는 대사다. 각색을 맡은 톰 스토파드의 위트 넘치는 대사다. ‘벚꽃동산’도 마찬가지로 제정 러시아 시대의 화려했던 귀족 영주들의 쓸쓸한 몰락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사랑의 몰락, 낭만주의의 몰락, 시대의 전환기를 배경으로 한다. 체호프가 그리는 인간 군상의 파노라마가 일상을 다루면서도 역사적 긴장감을 잃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체호프는 혁명의 시대에 더 깊숙이 들어가 있다. 벚꽃동산의 나무를 벌목하는 도끼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려온다. 시대의 변화와 혁명의 분위기는 이미 임박한 현실이다. 라네프스카야는 안나 카레니나보다 더 나이 들었고, 남편과 어린 아들을 잃었으며, 파리의 젊은 애인은 병들어 라네프스카야의 돈을 축내고 있다. 라네프스카야는 자신이 태어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길렀던 정든 고향 영지를 팔아야 할 정도로 몰락했다. 그리고 아무 희망 없는 파리의 병든 젊은 애인에게 돌아간다.
이렇게 쓸쓸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영원한 청년 톨스토이에 비한다면 체호프는 늙은 사람이나 가질 만한 냉담한 관조의 시선을 가졌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현대적이다. 라네프스카야는 시대의 전진을 말하는 열혈 혁명 투사 트로피모프와 신랄한 논쟁을 벌인다. 서른도 안되어 대머리가 된 만년 대학생 트로피모프는 말한다. “이제 당신의 시대는 끝났다. 현실을 직시하라.” 그렇지만 라네프스카야는 자신의 사랑이 가망 없는 걸 알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지겨운 사랑! 난 그 무거운 돌덩이와 함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어. 하지만 내 목에서 그 돌덩이를 끌어내고 싶진 않아. 난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당신이 사랑을 알아?” 라네프스카야는 울컥하는 심정에서 갑작스럽게 말을 토해내고, 트로피모프는 흥분해서 나가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체호프의 클리세인 슬랩스틱 코미디를 의도적으로 보여주지만 시대가 변해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흘러가는 존재라는 점을 냉담하면서 절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연출가 김승철 또한 이 공연의 중심을 트로피모프의 관점으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김승철은, 대학교 2학년 복학생 시절에 동국대 연영과 졸업공연에서 트로피모프 역을 맡았다고 한다. 이후 어떤 강렬함 때문에 이 작품이 계속 뇌리에 남아있었고, 살면서 점점 더 강렬해지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40대에 들어서는 이 작품을 꼭 공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 창작공동체 아르케 창단 공연의 후보작이었다고 한다. 연출가 김승철에게 이 공연은 오래 준비하고 숙성시킨 작품이다.
창작공동체 아르케는 작품의 중심 코드를 음악으로 잡고, 이미 1년 전부터 단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합창단을 조직해서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3막 첫 장면의 파티 장면에서 부르는 합창은 단지 공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랜 동안 화음을 맞춰온 젊은 열정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자작나무’ ‘칼린카’ 등 러시아 민요가 단원들의 활기로 인해 우수에 차고, 때로는 장엄하고 시적으로 무대를 가득 채운다. ‘벚꽃동산’은 몰락이 예고되면서 시작하고 어김없이 몰락과 함께 끝난다. 몰락을 그리면서도 시적이면서 아름답다.
연출가는 술 취한 피아니스트의 설정에 대해서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인생이란 술 한 잔 하고 살짝 취했다가 깨어나는 것이다.” 트로피모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몰락’의 해석도 흥미롭다. “이 공연의 제목이 ‘몰락사’이다. 몰락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역사와 자연의 순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역사는 순환하면서 진보한다. 트로피모프는 로파힌에게도 말한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서 온 그 자리가 예전의 그 자리일까? 가난해도 나는 전진하고 있다.” 그는 역사의 몰락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처럼 새로워지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트로피모프가 말하는 ‘인간의 긍지’를 오늘날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돌아보고 있다.
그렇기에 벚꽃이 환할수록 진해지는 ‘그늘’을 동시에 그릴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라는 긴 제목이 탄생한 것이다. “4막의 마지막 장면 또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한 출발이다. 비극이 아니다. 4막을 절대 슬프게 그리지 않을 것이다. 1막의 도착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설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등장과 퇴장도 빠른 속도로 오버랩 시키고 결코 주저앉게 하지 않을 것이다.” 26년 전의 젊은 트로피모프가 세월이 흘러 더 확신에 찬 모습으로 돌아왔다. 체호프의 극은 이미 한국 연극사에서 역사성을 갖기 시작했다.
글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창작공동체 아르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