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그동안 세 가지 버전의 ‘심청’을 관람했다. 굳이 비교 평가한다면, 화려한 장식이 갈수록 풍성해진 반면 통일감이나 그에 따른 감동은 약화된 느낌이다. 물론 초연 시절과 20년 이상 다양한 창작물을 접한 현재의 감수성이 동일할 수 없다는 점은 유의할 조건이다. 그렇더라도 ‘지젤’과 ‘돈키호테’가 입증하듯, 발레공연에서의 예술성과 대중성은 그다지 멀지 않다는 관점에서 ‘심청’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5월 9~12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글 문애령(무용평론가)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지젤’처럼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도 우연한 계기로 만들어졌다. 발레단이 소개한 에피소드에 의하면, ‘심청’은 동화책을 선물하려 서점을 찾았던 안무가 에이드리엔 델러스가 한국인의 효도에 관심을 가져 탄생한 대작이다. 시인 테오필 고티에가 ‘독일에 관하여’라는 전설 모음집을 읽다가 ‘윌리의 사랑’을 만들었다는 일화와 비슷하다. 1984년 창단된 유니버설발레단 초대 예술감독을 지낸 에이드리엔 델러스는 문훈숙·김인희·강수진을 키운 훌륭한 스승이기도 하다.
1986년 초연에서 심청 역을 맡은 문훈숙 단장은 이후 여러 예술감독이 새롭게 해석한 ‘심청’의 역사를 지켜왔다. 로이 토비어스·올레크 비노그라도프·유병헌을 거치며 변화된 ‘심청’은 발전이냐 퇴보냐를 따지기 전에 한국의 발레문화가 깊어졌다는 기쁜 사실을 알리기에 충분한 무형문화재다.
‘심청’이 보여준 27년의 성공적 변화는 시각적 다양성이다. 구체적인 무대장치와 각종 배역의 화려한 의상, 디베르티스망의 장식 효과는 충분한 시각적 볼거리를 제공한다. 왕비의 붉은 대례복과 몇 년 전부터 영상으로 처리한 인당수 장면이 끊임없는 작품 다듬기를 대변한다. 올레크 비노그라도프가 용궁 장면을 고전발레처럼 연출했던 것을 유병헌이 완화시킨 구성도 현대성 차원에서 바람직한 변화다. 그러나 여전히 델러스나 토비어스 시절의 ‘심청’에 대한 향수도 남아있다.
이번 무대에서 찾은 문제점은 안무 형식의 혼동이다. 드라마틱 발레로 만들어진 작품에 고전 형식을 접목하고, 거기에 다시 사실적 상황묘사 기법을 덧입혀 현대판 ‘액션 공연물(발레 닥시옹)’이 되었다. 18세기 발레 닥시옹은 줄거리 설명이 곧 존재의 이유였다. 하지만 200년 후 모리스 베자르가 “발레는 줄거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던 감각이 현대물과 보다 어울린다. 인당수에 뛰어드는 심청, 왕과 심청의 2인무 등이 춤의 독자성을 살렸다면 연꽃을 타고 물 위로 올라온 여인이 전혀 놀랍지 않은, 기생점고와도 같은 왕비 간택 중인 궁전 장면은 주역의 몫을 빼앗은 액션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줄거리 연계가 편하지도 않다.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쳤음에도, 심청이가 제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봉사는 어째서 맹인잔치에 갈 때까지 눈을 뜨지 못했는지, 심청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잔치를 베풀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용왕으로부터 전생의 일과 앞으로의 운명을 듣게 된다”라거나, 초기 ‘심청’에서처럼 “어머니 혼령”이 약속된 행복을 암시해야 스님의 도력이나 고진감래가 더욱 빛을 발할 것 같다.
또한 ‘심청’만의 춤사위가 보이지 않는 점도 안타깝다. 토요일 3시에 주역을 맡은 팡멍잉은 가녀린 라인이 심청 역을 연기하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고, 각 상황극에서 자신의 배역을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발레리나의 실력이 탁월하다는 특별한 인상이 남지 않은 원인은 중요한 문제다. 남자 주역이라 할 왕의 솔로가 없는 점도 불균형적이다. 혹여 관객의 관심을 놓칠까 노심초사하는 불안감이 전해지는 해프닝 중심의 전개는 득보다 실이 많은 선택으로 보인다.
“명작에는 빛나는 순간이 있다”라는 아를렌 크로스의 평문에서 ‘빛나는 순간’은 모든 단점을 덮을 수 있는 고유한 매력이나 감동의 절정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여러 안무자를 거친 ‘심청’이 혹여 빛을 축소시키지 않았는지, 확고한 명작의 반열에 올릴 조건이 무엇인지 점검할 적절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