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산울림극단은 노년의 삶을 그린 윤대성 3부작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 ‘동행’에 이어 치매노인을 다룬 ‘나의 황홀한 실종기’까지 노년연극을 연이어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들 모두 작가·연출가·중심배우가 노년에 이른 ‘노인에 의한 연극’이며, 이 공연들을 기반으로 소극장 산울림은 노년연극의 메카가 되고 있다.
글 이은경(연극평론가) 사진 산울림극단
연기 50주년을 맞은 배우 손숙과 연극계의 거목인 연출 임영웅 그리고 불문학자인 작가 오증자의 의미 있는 협업으로 탄생한 ‘나의 황홀한 실종기’는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치매환자 윤금숙의 이야기이다. 파편화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게 되는 과정이 중심사건이다. 80세 생일을 맞은 금숙은 오랜만에 미국에서 온 딸과 함께 옛집을 찾는다. 장독대·툇마루·꽃밭으로 기억되는 모습과 달리 카페가 있는 모던한 건물로 재개발된 집에서 금숙은 과거와 마주한다. 그녀를 현실로 돌아오게 하려는 딸과 의사의 노력이 더해져 기억을 막고 있던 상처의 벽이 무너진 것이다. 남편의 외도와 가출, 어린 아들의 죽음 등 그녀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상처들이 내면의 균열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다 결국 절규처럼 터져 나온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은폐했던 기억들과 마주하는 과정은 금숙의 독백으로 설명된다. 이야기의 힘으로 카타르시스에 이른 그녀는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
공연은 암전 속 금숙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치매환자에게도 80년 인생의 이야기는 살아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살아있는 한 나는 세상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암흑 속으로 가라앉는 것은 이 세상이다”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에 이 작품의 주제가 선명하게 담겨 있다. 그녀의 파편화된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것에 집중하는 이 작품은 금숙의 모노드라마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탁자와 의자 등 최소한의 가구가 놓인 심플한 무대 중심에는 잎 하나 달리지 못한 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가 놓여 있다. 이 나무는 옛집을 환기시키는 유일한 대상으로 메마른 그녀의 내면을 상징한다.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를 안고, 초등학생용 꽃무늬 배낭을 멘 그녀의 모습은 어린 아들의 죽음에서 멈춘 채 나아가지 못하는 그녀의 시간을 시각화한다.
이번 공연은 치매노인의 삶을 그린 시의성 있는 노년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많았다. 금숙의 개인적 삶에 매몰되어 그녀의 넋두리, 한풀이에 머물렀기 때문에 노년에 대한 성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금숙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점도 작품의 밀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특히 간병인은 극적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못해 등장의 이유조차 찾기 어려웠다. 의사 역시 상식적이며 반복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역할이 한정됐기 때문에, 이 부분을 심리치료사인 딸이 충분히 대신할 수도 있었다. 죽은 자들에게만 집중하느라 살아있는 딸과의 관계를 약화시킨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금숙과 딸에게 긴밀한 관계를 부여해 모녀갈등으로까지 나아갔다면 금숙의 삶이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인물의 성격을 구축하지 못해 사실적이기보다 양식적으로 보였다. 손숙 역시 금숙을 무난하게 재현했지만 ‘어머니’와 같은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세심한 연기의 감동을 객석까지 전달하지는 못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젊음에 대한 찬양과 외모지상주의 문화가 확산되는 동안 노인은 우리 연극 속에서 쇠락하고 소외된 존재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우리 연극 속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노인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노인혁명’을 이루기 위해서 주체성을 갖춘 대안적 노인 캐릭터를 제시하는 ‘노인을 위한 드라마’가 많이 창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 ‘산울림’이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