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고 믿음직스런 자신의 음악 동료들(샹젤리제 오케스트라ㆍ콜레기움 보칼레 겐트)과 한국을 찾은 필리프 헤레베헤의 무대는 지적이고 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학구적인 자세로 악보를 분석하고 파격적으로 바꿔내는 의도와도 거리가 있었으며, 단지 사려 깊고 빈틈없이 자신의 견해를 단원들과, 청중과 나누려는 꼼꼼한 안내자라는 느낌이 강했다. 5월 30일 포은아트홀, 5월 31ㆍ6월 1일 LG아트센터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사진 LG아트센터
예상 밖으로 헤레베헤는 일사불란한 호흡을 요구하는 지휘자가 아니었다. 그저 연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음악이 나아갈 방향을 여유롭게 제시한 후 각각의 요소들이 자연스레 흘러가게 두고 최소한의 통제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단 그가 함께 연주하는 단원들에게서 시종 놓치지 않고 살피는 것은 작곡가 모차르트에 대한 ‘작품관’과 전반적인 기조로 설정된 해석의 일관성이었다. 음색과 루바토, 음량과 그 질감에 이르기까지 헤레베헤는 수시로 그 한계를 실험하고 그때그때 다가오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움직임에 따라 유연한 자세로 대처하여 모든 음표들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5월 31일 용인 포은아트홀에서의 일성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38번 ‘프라하’. 상쾌하고 명랑한 악상의 곡이자, 후기 교향곡 중 특이하게 1악장에 서주를 채택하고 3악장으로 마무리한 작품에서 헤레베헤는 매끈한 음상과 탄력 있는 리듬감을 우선시하는 모습이었다. 이어지는 40번 교향곡 G단조는 다소 공격적인 무게감과 중용의 미학이 느껴졌다. 1악장에서는 우수에 찬 악상을 결코 ‘슬프게’ 처리하지 않는 차분함이 돋보였으며, 2악장 역시 서정성을 과도하게 강조하지 않는 해석이 오히려 쓸쓸한 여백을 만들었다. 알레그레토의 3악장은 스케르초에 가까운 속도감과 모차르트적인 템퍼라멘트가 매력적이었다. 41번 ‘주피터’를 다루는 헤레베헤의 해석은 복잡한 경우의 수를 갖고 고민 끝에 나온 절충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다분히 전 고전주의를 연상시키는 오케스트라의 음색에 현대적인 템포와 리듬감을 적용시키는 문제도 그렇다. 피날레의 거대한 푸가는 그야말로 날렵했다. 정교한 앙상블의 기교, 다성부의 자연스런 균형, 속도감의 고양 등을 모두 ‘정돈된’ 상태로 들려주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이틀 후 LG아트센터에서 들은 ‘주피터’는 한층 그 응집력이 배가된 느낌이었고, 오케스트라의 ‘시대성’도 정의 내리기 쉬워진 듯했다. 홀의 음향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 비교가 힘들지만, 오히려 두 번째의 연주에서 악기들의 개별적 음색이 두드러졌고 자연스러움도 더했는데, 각자의 ‘개인기’가 모여 커다란 앙상블을 이루는 시대악기 오케스트라의 특성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번 내한의 하이라이트인 레퀴엠의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편안함’이다. 작품이 지닌 표제성이나 비극적 정서, 순수한 음향과 모차르트 말년의 중후한 텍스트 등을 모두 갖추었으나, 동시에 그 모든 요소들 중 한 가지가 튀는 법 없이 통합되고 전방위적으로 힘을 발휘했다는 점이 훌륭했다. 1996년 레코딩과 굳이 비교하자면 성부마다 자유로운 표현력이 더해지며 다소 거친 질감이 사운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흥미롭기도 하다. ‘부속가’ 부분이 강조되던 경향도 보이지 않으며,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오케스트라가 한 발 물러서서 합창과 함께 전체 조형에 힘쓰는 모습도 호감이 갔다.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를 이끄는 헤레베헤는 두드러지는 법 없이 노련한 합창 전문 지휘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는데, ‘키리에’ 등 합창이 열띤 곳에서도 과도한 아티큘레이션으로 청중을 결코 압도하지 않는 솜씨가 세련미를 자아냈다. ‘레코르다레’와 ‘아뉴스 데이’의 청명함과 평화로움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네 명의 독창자(임선혜ㆍ크리스티나 함마르스트룀ㆍ벤저민 휼렛ㆍ요하네스 바이서) 역시 합창의 인토네이션에 부담을 주지 않는 안정된 진행으로 통일성을 꾀했다. 바로크 발성과 레퍼토리에 최적화된 임선혜의 가창은 감칠맛 있는 모차르트를 선보였는데, 굳이 ‘꾸밈없이 맑음’을 내세우지 않고도 작품의 본질과 적절히 어울리는 지혜로움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