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멤논’

그리스 비극의 새로운 변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8월 1일 12:00 오전


▲ 배우 박성연

게릴라극장의 희랍극 시리즈에서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극단 하땅세의 ‘아가멤논’이다. 연출가 윤시중은 이번 작품을 두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그리스 비극이 될 것이라는 말을 건넸다. ‘아가멤논’을 여배우 한 명의 모노드라마로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던 차에 방문한 극단 하땅세의 연습실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스물다섯 명의 단원들이 매일 머리를 맞대고 24시간 연극을 함께 고민하는 집단, 이들에게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 없을 듯 싶다.

우리가 연극 동네를 찾아 나서야 하는 이유
여름은 연극계의 비수기다. 더위와 장마, 휴가철까지 겹쳐 극장은 물론 도심이 텅텅 비기 일쑤이다. 게다가 올해는 날씨까지 수상하다. 장마인지 우기인지 무덥고 습기 찬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여름철 극장 공간은 주로 제작 규모가 작은 젊은 연극인들의 무대로 채워지곤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은 젊은 연출가전과 같은 기획전 공연을 띄엄띄엄 챙겨보는 정도로 한산하게 지나갔다.
그런데 온갖 신인 인큐베이팅 사업이 계절과 마케팅에 유리한 봄·가을에 집중되고, 봄에 열리는 서울연극제나 가을에 열리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국내 참가작 공연에 제작 규모가 작은 공연들이 몰리면서 최근 들어 일종의 역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여름 비수기에 젊은 연출가나 신생 극단의 공연보다는 오히려 중견 연출가나 극단의 공연들이 연달아 무대에 오르고 있다. 연희단거리패의 3시간짜리 대작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스 3부작’(김소희 외 공동연출)이 6월 무대에서 기염을 토했고, 극단 골목길의 신작 ‘그 사람의 눈물’ ‘피리 부는 사나이’(박근형 연출)가 7월 한 달 내내 공연됐다. 극단 백수광부의 신작 ‘죽음의 집 2’(이성열 연출)도 8월 공연을 앞두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학로 연극계의 중심으로 떠오른 혜화동일번지 5기 동인 페스티벌의 ‘국가보안법’ 공연 릴레이는 6·7월에 포진됐다.
한편으로 이는 안정적인 제작비가 투자되는 공공 제작극장의 시즌 공연이 정착되고, 시즌공연에 러브콜을 받았던 중견 연출가들이 자신이 맡은 극단의 정기공연을 비수기에 집중해서 올리면서 생긴 결과이기도 하다. 극단의 생존법 혹은 공공제작극장과 극단의 상생 전략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박근형·이성열·김광보 등 중견 연출가들이 집중 배치되어 있는 선돌극장의 ‘선돌에 서다’ 시리즈와 게릴라극장의 ‘희랍극’ 시리즈의 기획전들이 만만치 않고, 혜화동일번지의 ‘국가보안법’ 기획전은 비장하다.
이 덕분일까? 실제로 공연장마다 관객들이 차고 있다. 공공제작극장의 대극장뿐만 아니라 소극장 공연도 살아나고 있다. 선돌극장·게릴라극장·혜화동일번지소극장 등 민간극장의 기획력이 살아나고 있고 관객들도 꾸준히 차고 있다. 흡사 대학로 연극계의 중심 공간이 그동안 변방이었던 혜화로타리 방면으로 옮겨가는 듯한 인상도 든다. 여름의 달라진 풍경이자, 연극계 변화의 한 풍경이다. 물론 반가운 변화의 모습이다. 8월에도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부지런히 연극 동네를 찾아 나서야 하는 이유다.

하늘부터 땅 끝까지 세게 간다!
연극계 변화의 풍경으로 뉴페이스의 등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가장 뜨거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연극인 중 한 사람으로 극단 하땅세의 연출가 윤시중을 꼽을 수 있다. ‘타이투스 앤드로니커스’ ‘천하제일 남가이’ ‘파리대왕’은 최근 2~3년간 극단 하땅세의 공연 목록이다. 윤시중은 연출가이자 무대 디자이너이다. 유학 시절 뉴욕의 한 극장에서 상임 무대 디자이너로 일하며 서른여섯 개가 넘는 무대에 참여했고, 국내에서도 무대 미술 콘셉트가 강한 독특한 연출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타이투스 앤드로니커스’는 관객들이 서 있는 사이로 무대가 움직이는가 하면, ‘파리대왕’에선 과감하게 커튼 하나로만 무대 공간을 연출했다. 윤시중은 ‘타이투스 앤드로니커스’로 제48회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천하제일 남가이’는 현재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오프에서 만석 공연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극단 하땅세는 2009년 창단한 5년차 신생 극단이다. 그럼에도 짧은 기간 내 연극계의 중심으로 맹렬하게 파고들고 있다.
게릴라극장의 희랍극 시리즈 공연을 챙겨보던 중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극단 하땅세의 ‘아가멤논’이 공연 목록에 올랐다. 극단 하땅세는 올해 3월 ‘파리대왕’을 올렸고, 국립극단과 10월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3부작 기획전에 ‘새’ 공연이 예고되어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신작이라고? 한 극단이 한 해에 신작 공연을 세 편이나 올린다고? 반가움을 넘어 어리둥절할 정도다. 극단 하땅세, 완전 상승세다.
8월 공연작 ‘아가멤논’의 연습실을 찾았다. 극단 하땅세의 연습실은 성북구 삼선교의 한 지하 공간이다. 연습실에 들어서니 스무 명이 넘는 젊은 배우들이 한꺼번에 인사를 한다. 당황했다. 공연에 대한 대략의 윤곽을 미리 듣기로는 ’아가멤논‘을 여배우 한 명의 모노드라마로 진행한다고 했다. 그런데 연습실에는 극단의 배우 전원이 참여하고 있다. 뒤따르는 윤시중의 설명은 더더욱 놀랍다. 모든 연습에 단원 모두가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매일 참여한다는 것이다. 다른 극단과 달리 배우들의 아르바이트도 일절 금지한다. 그 조건에 동의할 수 없다면 극단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결연한 원칙을 강조한다. 물론 그만큼 공연의 수익 창출에 열성적일 수밖에 없고 배우와 연출 모두 공정한 배분에도 철저하다.
그러고 보니 극단 하땅세의 작품들은 원작을 해체·재구성하거나 소설 원작을 새롭게 무대화하는 공동창작 작품들이다. 배우들의 역량뿐 아니라 무엇보다 배우를 비롯한 스태프들 전원, 단원들의 공동체적 참여가 없다면 불가능한 제작 방식이다. 스물다섯 명의 단원들이 매일매일 머리를 맞대고 24시간 연극을 함께 고민하는 집단,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 없겠다. 또한 이것이 극단 하땅세의 힘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감이 잡히는 부분이다. 그동안의 궁금증이 풀린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고, 세상을 살펴본다.” 극단 하땅세의 소개 문구이다. 그러나 이 외에 도발적인 문구 하나를 더 덧붙이고 있다. “하늘부터 땅 끝까지 세게 간다.” 연습실 풍경을 둘러보니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극단 하땅세는 처음부터 ‘세게’ 가고 있다.

‘아가멤논’이 여배우의 모노드라마가 된 까닭은?
연습실 벽 한쪽에 ‘아가멤논’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이것 또한 단원 중의 한 사람이 디자인한 것이란다. 주연을 맡은 배우 박성연의 얼굴을 붉은 천으로 반쯤 가린 강렬한 포스터다. 그런가 하면 연습실의 다른 벽면엔 온갖 새 그림이 도배되어 있다. 마분지와 색종이로 오리거나 접은 기기묘묘한 형태의 공작물들도 가득하다. 연극 연습실이라기보다는 흡사 미술 공작실처럼 보인다. 연습실 공간을 한쪽은 ‘아가멤논’, 한쪽은 ‘새’로 나눠 연습을 준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또 지하 공간의 특성상 물이 새는 곳 아래에는 아예 작은 화단을 만들어 정원을 가꾸고 있다. 연습실 이곳저곳이 재미있는 아이디어들로 가득하다. 연습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연습실에 갖추고 있는 온갖 조명기구며 소품들, 악기들을 소개하며 즐거워하는 윤시중을 바라보며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의 순수한 열정과 몰입 그리고 즐거움이 느껴진다. 가요계에 악동뮤지션이 있다면, 연극계에는 극단 하땅세와 윤시중이 있다.
‘아가멤논’을 여배우 한 명의 모노드라마로 만들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박성연은 배우 오달수가 대표로 있는 극단 신기루만화경 소속이다. 배우 박성연과 연출가 윤시중의 만남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극단 하땅세만의 연습 스타일은 어떤 것일까? ‘아가멤논’의 무대 콘셉트는 어떤 것일까?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질문들이다. 궁금함과 질문의 속도를 추월하여 더 빠르고 많은 이야기들을 윤시중과 박성연이 들려준다. 두 사람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유쾌하게 질주해나간다.
“저 배우다!” 윤시중은 ‘어느 날 문득 네 개의 문’에서 박성연을 처음 보았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후 2011년 극단 신기루만화경의 내부 워크숍 낭독공연 ‘아메리칸 환갑’ 때 처음 같이 작업했고, 2012년 극단 하땅세의 ‘천하제일 남가이’에서 본격적으로 함께 작업하게 됐다.
이어 박성연이 들려주는 극단 하땅세만의 연습 과정이 흥미롭다. 보통 극단에서의 작업이 이미 완성된 대본에서 시작한다면, 성석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천하제일 남가이’에서는 매일매일 장면별로 즉흥이 이루어지고 서바이벌 방식으로 장면이 구성되었다. 단원 전체가 참가하는 공동창작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아가멤논’ 연습도 마찬가지다. 전체 배우가 매일 연습하면서 일단 공연의 모든 가능성을 찾은 후 최대한 생략해서 배우 한 명의 강렬함만을 남기겠다는 것이다.
박성연은 “과거 처음 접했던 극단 하땅세의 작업 방식이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것이기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지만, 늘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공연만 올려왔기에 자신이 없었다. 또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과부하가 걸려 도망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윤시중은 “무언가 제시하는 대신 마당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배우들이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무대를 만들고 채워넣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지인들도 부르지 않고 자신감 없는 상태에서 첫 공연을 올렸는데, 공연이 끝나고 나서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다른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달랐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극단 하땅세의 무대는 다른 공연과 다르다. 단순히 감각적인 세련됨이나 배우들의 열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대와 배우가 유기적으로 함께 움직여 공연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극단 하땅세의 공연은 극장주의의 감각적인 체험에 충실하게 하면서 무대 너머 보이지 않는 공간의 감각을 열어주고 호기심을 갖게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예술이란 용감하게 계속 가는 거예요”
대화의 바통을 윤시중이 이어받았다. “공연의 70퍼센트는 배우들의 연기력을 믿고 가고, 나머지 30퍼센트에서 관객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최대한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해요. 관객들은 비와 더위를 뚫고 극장을 찾아오겠죠. 저 같아도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지, 극장에 ‘아가멤논’을 보러 가진 않을 겁니다. 일단 흥분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관객들이 오고 싶은, 매우 다른 형태의 그리스 비극을 만들 겁니다. 충격적인 무대가 올 겁니다!”
공연도 올라가기 전에 연출가의 입에서 직접 “충격적인 무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다니! 그 사실이 더 놀랍다. 용감함만은 ‘천하제일’이다. 말의 틈을 주지 않고 윤시중이 말을 이어간다. “한 번 했던 것, 기존에 했던 것은 다시 안 하려고 합니다. 5년 전, 10년 전에 생각했던 것은 지금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완성이 안 됐을지라도,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이란 용감하게 계속 가는 거예요. 완성될 수 없는 영역이죠. 나이들 때까지 계속 가보고 싶습니다. 스스로와 경쟁하면서요. 한 작품이 잘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얼마만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용감하게 가려고 합니다. 그 끝이 어디일지 가보고 싶습니다.”
문득 연극인으로서 윤시중이 궁금해졌다. 그를 이토록 용감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그의 개인사가 궁금해졌다. “고등학교 때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극작가 윤조병)의 반대로 하지 못했어요. 대신 서울예술대학에 들어가서 연기를 공부했죠. 그런데 연기를 너무 못했어요. 미술도 포기했는데, 연극마저 포기할 순 없었어요. 연기 트레이너를 마음에 두고 유학을 떠났는데, 무대 미술을 접하면서 비로소 연극이 좋아졌습니다. 바닥에서 다시 시작한 것이죠. 미국에서 저의 존재를 찾았어요. ‘이것이 라이프다!’ 외쳤죠.” 현재 용인대 뮤지컬연극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윤시중이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내용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너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가 되는 순간 비로소 인간 누구누구가 되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는 미국에서 극장 상임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연극을 자유롭게 좋아하게 됐지만, 어느 순간 그토록 싫어하던 극장의 규칙들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의 느낌과 생각들은 지금의 극단 작업으로 이어졌다.
윤시중에게 연극은 곧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에게서 질주하는 자의 단단함과 반짝거림이 보인다. 결국 “충격적인 무대가 올 것이다!”라는 장담은 오만한 확신이기보다는 윤시중 자신과의 다짐인 것이다. “극장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대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아가멤논’을 통해서 우리는 펄펄 끓는 섭씨 100도의, 그리고 순도 100퍼센트의 연극인들을 만날 수 있다. 이열치열이다.

글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극단 하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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