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서범석

그의 눈에서 세상을 본다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9월 1일 12:00 오전

서범석의 눈에는 세상이 담겨 있다. 한없이 부드러울 것 같다가도, 한순간 맹수를 떠올리게 만드는 눈빛은 그 어느 것과 닮지 않은 또 다른 세계이다.

내년이면 데뷔한 지 스무 해. 그간 ‘명성황후’ ‘지킬 앤 하이드’ ‘노트르담 드 파리’ ‘라디오 스타’ ‘모차르트’ ‘서편제’ ‘맨오브라만차’ ‘아르센 루팡’ ‘두 도시 이야기’ 등 뮤지컬 무대를 중심으로 서범석은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일궈왔다.
오랜 시간 서범석이 쌓아올린 그 층위들은 아무리 단순한 캐릭터도 그가 맡으면 그 뒤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전 늘 단순하게 표현해요.” 대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자신은 텍스트에서 길어 올린 본질을 그저 무대 위로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는 8월 31일부터 무대 위에 오르는 연극 ‘클로저’도 그에겐 크게 다르지 않은 듯보였다. ‘클로저’에서 박학다식한 피부과 의사지만 사랑에서는 미성숙한 면모를 보이는 래리 역을 맡은 그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로운 사람, 현대인의 외로움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를 그려낼 생각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저 역시 철저하게 제 입장에 초점을 두고 연기하려고 해요. 상대방의 모습을 미리 설정해, 철저하게 제 중심적으로 사고한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야 다른 등장인물들과 자연스럽게 부딪히고 갈등이 쌓여나가는 거죠. 드라마가 더 재밌어지고요.”
모두가 똑같은 텍스트를 마주하지만 해석의 깊이는 다르다. 게다가 그 차이가 배우에게 주는 자신감이란, 무대를 장악하고도 넘쳐 객석에 앉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억을 지배하기에 그가 보여줄 새로운 세상이 어떠할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듣고 싶었다. 지금껏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던 그의 이야기와 인생은 어느 작품, 어떤 노래와 닮아있는지 말이다.

‘명성황후’의 ‘나의 운명은 그대’
10여 년. ‘명성황후’ 안에서 서범석이 살아온 시간이다. 그중에 절반 이상은 앙상블이었다. 뮤지컬 배우로서 인정받기 위해 꼭 필요한 수순인 동시에, 배우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라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 ‘명성황후’였다.
“학생 시절, 군대에 있는 동안 앞날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입대 전엔 학교를 다니면서 연극 동아리인 중앙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었죠. 산업정보학과로 입학했지만 전공에는 관심도 없었고, 마치 운명처럼 연기에 빠져들었죠. 군대에서 고민 끝에 뮤지컬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릴 적부터 노래를 좋아했거든요. 당시 친한 선배들은 연극을 권했어요. 그래야 진짜 연기자가 된다고요. 하지만 저는 연극배우만큼 연기하고, 가수만큼 노래하고, 댄서만큼 춤을 출 수 있는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죠.”
그가 ‘명성황후’로 발걸음 한 이유 역시 보다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큰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것은 마음속에 자연스레 떠오른 다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명성황후’ 연습실에 들어가면서부터 송스루 뮤지컬 특성상 매일같이 노래에 노래를 거듭해 부르고 또 소화해야 했다. 여기에 춤과 무술까지 배우다 보니 연습실은 가장 혹독하면서도 이상적인 배우 훈련소였다. 발음·발성뿐 아니라 몸을 다루는 방법을 명성황후를 통해 확실하게 배워나갔다. 잘해내고 싶다는 마음과 인정받고 싶은 욕심은 그를 뜻밖의 기회로 이끌었다. 평소 서범석을 눈여겨본 보이스 코치에게 레슨을 받게 되고, 매 시즌 참여를 거듭하면서 노래 한 마디 없던 그에게 한 마디, 한 소절, 한 곡이 차근차근 주어졌다. 해마다 조금씩 성장해나가길 거듭하던 끝에 그는 홍계훈 장군 역에 다다랐다. 무대 위 누군가에서, 작품 속 그 사람으로 관객 앞에 선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서범석이 아닌 홍계훈이 되었다. 그리고 명성황후를 바라보며 부르는 ‘나의 운명은 그대’는 무대를 향해, 배우라는 인생을 위해 부르는 진심 어린 노래가 됐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파멸의 길로’
천사와 악마. 이야기를 건네는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 유명 소설의 제목이 떠올랐다. 그 눈이 너무 깊어서 제대로 쳐다보기만 해도 왠지 속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그에게 한없이 솔직해지고 싶다가도, 순간 이유 모를 두려움이 슬쩍 들기도 했다.
“제가 잘생기진 않았는데 웃으면 착해 보이고, 인상을 쓰면 악해보여요. 그래서 어느 작품을 해도 ‘서범석이 보인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어요. 단점이자 장점인 것 같지만, 그게 다 얼굴 덕분이죠.” 이러한 그의 면모가 가장 극대화된 작품은 ‘노트르담 드 파리’였다. 서범석은 에스메랄다를 향한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괴로워하면서 인간의 욕망 속 검은 얼굴을 드러내는 프롤로 주교를 맡아 파멸의 길을 선택하는 처절한 악역 그 자체를 보여줬다.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 속 프롤로의 모습 그대로를 무대 위에서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텍스트 행간에 있는 욕망과 번뇌, 고통을 모두 담아 보여주고 싶었죠. 그 면모를 많은 분들이 초연 무대에서 발견해주신 것 같아요. 덕분에 몇몇 배우들과 초연 이후 실제 노트르담 성당에 가게 됐죠. 작품의 배경이 된 공간에 서니 프롤로가 에스메랄다를 어떤 시선으로, 마음으로 바라봤을지 조금 더 알겠더라고요. 소설이나 공연 속 무대와는 또 다른 감정들이 차올랐죠. 그 전율을 고스란히 다음 무대에 담아냈어요.” 총 3년간 200여 회의 무대에 오른 그에게 주어진 제14회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조연상. 한없이 떨어질 것만 같은 어둠을 선택한 것이 오랫동안 찬란한 빛을 안겨준 역설적인, 하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서범석의 힘이 아니라 배역의 힘이에요. 프롤로는 상을 받아야 하는 배역이었어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처럼요. 물론 배역이 완성 안 된 상태에서 시작해 배우가 그 간극을 채워내 상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작품이든 온전히 배역으로 인해 상이 주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서범석이 아닌 프롤로가 상을 받은 것이죠.” 배우가 아닌 배역만이 남는 무대를 쫓는 삶. 얼핏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마음가짐 같아 보이지만, 현실 속에선 이득보다 손해를 자처해야 할 때가 많다. 그 순간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지극히 작품을 위해, 배역을 위해서 사는 것이 배우 서범석이 사는 법이기 때문이다.

‘맨오브라만차’의 ‘이룰 수 없는 꿈’
지난해 ‘맨오브라만차’에서 세르반테스이자 돈키호테 역으로 캐스팅된 서범석의 이야기는 꽤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꿈꿔온 배역”이라는 그의 말에 엄청난 진심이 뚝뚝 묻어나서였다. 그래서 서범석이 무대 위에서 부르는 ‘이룰 수 없는 꿈’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노랫말이었고, 인생이었다.
“작품에 앞서 ‘이룰 수 없는 꿈’을 먼저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워낙 유명한 곡이기도 하고,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제 안에 꿈틀거리는 것들이 있었죠. 그러다 이 곡을 제대로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뮤지컬 넘버 하나만을 독립적으로 부르는 것과 작품 안에서 감정들을 잘 쌓아올려 부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니까요. 작품이 주는 감정들을 꼭 느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맨오브라만차’를 하겠다고 나섰고, 정말 원 없이 했어요.” 때문에 그가 무대 위에서 부른 ‘이룰 수 없는 꿈’의 가사 속에는 간절함이 녹아있고, 겸허함이 흐른다.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스스로도 인정하듯, 그는 거대 산업으로 불리는 뮤지컬계에서 일 순위 캐스팅이 아니다. 적지 않은 나이이고, 인지도도 아이돌에 비해 낮고, 게다가 유부남이다. 이런 조건들이 연기·노래·춤을 잘하는 것과는 하등 상관없지만, 티켓 파워에서는 적잖이 걸림돌이 될 만한 부분이다. 그런 부담을 안고 매번 “도전한다”라고 말하는 그는 ‘이룰 수 없는 꿈’을 부르며 오랜 시간 그림자 아래의 길을 걸어왔다. 싸움에 이길 수 없고, 슬픔을 견딜 수 없고, 길이 멀고 험해도 그만의 정의를 위해 묵묵히 버텼고, 또 돌진했다. 그리고 꿈은 욕심을 만들었다. 배우를 위한 작품이 아닌, 작품 그 자체를 살리는 배우가 되고 싶은 착한 욕심 말이다.

‘두 도시 이야기’의 ‘피날레’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 시드니 칼튼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루시 마네트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기로 결정한다. 단두대로 향하는 칼튼은 담담하다. 때문에 그의 노래는 슬프고도 아름답다. “기억 안 나/내 인생이 이렇게 달콤했었나/천국이 나를 반기고 별들이 노래를 하네.”
칼튼으로 분한 서범석 역시 매순간, 무언가를 빼앗기보다는 차라리 잃어버리는 편을 택해왔기에, 희생과 구원에 관한 ‘두 도시 이야기’는 그가 정말로 외치고 싶은 이야기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늘 하셨던 말씀이 있어요. 타인을 이기지 말고 지면서, 배려하면서 살라고요. 어릴 적에는 그 말이 참 이해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고나니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겠더라고요.” 포기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 그 가치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시공을 초월해, 세상을 일궈나가는 원리임에 분명하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삶의 순간순간마다 체득해온 서범석은 자신이 외치는 메시지가 인생에 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 더 나아가 관객의 삶을 변화시키길 간절히 바란다.
“난 내가 했던 그 어떤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려 합니다. 난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휴식처보다 더 평온한 곳을 향해 갑니다.”

글 김선영 기자(sykim@) 사진 박진호(studio Bob)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