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젊은 연출가전 ‘알리바이 연대기’는 작품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김재엽의 가족사와 맞물린 현대사의 궤적을 추적한다. 193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굴절의 현대사에 얽힌 삼부자의 삶을 실명 그대로 풀어놓아 다큐멘터리적인 특징을 강하게 드러낸다. 우리 자신과 동일한 역사 세계에 속해 있는 타인의 삶을 엿보게 하지만, 개인의 미시사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국가의 공권력과 제도가 개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한다. 9월 3~15일, 소극장 판.
글 이은경(연극평론가) 사진 국립극단
‘알리바이 연대기’는 부당한 권력이 자신의 부조리함을 은폐하기 위해 끊임없이 알리바이를 생산해온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개인 역시 자신의 삶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왔다는 깨달음을 제시한다. 여기에 초시간적 글쓰기를 통해 ‘알리바이’의 필요성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넘나드는 사건 구성은 시간의 간극을 약화시킨다. 아버지의 출생부터 현재까지 80년이 넘는 통사적 배경이 객관적 관찰자인 재엽의 내레이션에 담겨 현재 시점으로 설명되면서 현재성이 강조된다. 시간의 순차성을 초월하는 이 작품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재를 환기시킨다.
무대 좌우에는 대학 도서관과 아버지의 서재가 놓여 있고, 시간의 무게가 느껴지는 고서들이 책장 가득 꽂혀 있다. ‘아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외국 서적’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 뿌리 내리고 싶은 열망을 숨기려는 아버지의 ‘알리바이’로 그려진다. 특히 진짜 책들과 그림으로 처리된 가짜 책들이 뒤섞인 책장은 진실과 거짓이 혼재한 아버지의 삶을 상징적이고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어디 가든 무얼 하든 맨 앞에 나서지도 말고, 맨 끝에 뒤처지지도 말고, 무조건 중간에 서는 게 제일 중요하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르던 아들들은 사회와의 불화에 갈등하면서도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어가며 현재에 이른다. 부당한 권력의 알리바이 만들기가 결국 개인에게도 사회를 외면하기 위한 알리바이 생산을 강요해왔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음을 앞둔 순간 평생 숨겨온 진실을 토로하면서 오래된 우리 사회 ‘알리바이 연대기’의 고리는 진실과 마주하는 것으로 끊을 수 있다는,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결말로 나아간다.
극에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삼부자의 삶 속에 기억을 환기시키는 사진이나 영상 자료가 중간중간 삽입된다. 실제 자료들을 몽타주해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허구가 아닌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삶의 내력’을 추적해온 동양화가 정재호의 그림들이 극장 입구부터 전시되어 있고, 작품 속 공간 배경으로 활용되어 공연의 의도를 미리부터 전경화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만나서 소통하게 한 것은 결국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객관화이다. 이 같은 서사적 장치들로 인한 이화효과를 통해 관객의 주체성을 회복시켜 현실 인식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의도한다.
공연 시간이 2시간 20분이 넘었지만 생생하게 인물의 성격을 구축한 배우들의 열연으로 긴 시간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를 연기한 남명렬은 ‘중간의 삶’을 살면서도 사회에 부대끼는 인물의 복합적인 성격을 세심하게 표현했다. 1인 다역으로 희극적 이완을 능숙하게 보여준 지춘성·유병훈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아버지에게 자전거는 중요한 오브제이다. 자전거를 타고 무대 외각을 반복적으로 달리는 것으로 체제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한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일상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항상 동일한 속도로 자전거를 타는 아버지를 좇아 재엽도 자전거를 탄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재엽은 걷다 달리다를 반복하며 다른 속도를 낸다. 그리고 엇갈리던 동선이 무대 중심에서 만나고, 그들의 시선은 동일하게 객석으로 향한다. 다른 방향과 속도이지만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은 ‘어린왕자’에서처럼 부자 간 사랑의 확인이자, 이들이 관객에게 ‘알리바이’에 대해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