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피고바트의 레퀴엠 ‘홀로코스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0월 1일 12:00 오전


▲ 보리스 피고바트의 레퀴엠 ‘홀로코스트’
도널드 모리스(비올라)/마르크 타데이(지휘)/벡터 웰링턴 오케스트라
Atoll ACD 114 (DDD)

20세기만큼 전쟁의 폭압적 위력에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뒤틀린 적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많은 음악학자들은 가스실에서 이슬처럼 사라진 수많은 유대계 음악가들의 신원을 밝혀내는 것은 물론 수용소 포로들이 강제 노역을 할 때나 휴식할 때, 그리고 가스실에 차례로 들어갈 때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누가 무슨 음악을 연주했는지에 대해 다각적인 연구를 해왔다. ‘홀로코스트 음악’이라면 작곡가들이 쓴 추모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펜데레츠키의 ‘분노의 날’,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 등이 그것들이다. 여기에 한 곡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러시아 태생의 이스라엘 작곡가 보리스 피고바트의 레퀴엠 ‘홀로코스트’(1995)다. 진혼 미사곡은 대개 독창자와 합창, 오케스트라를 동반하는데, 피고바트의 작품은 노래나 합창 없이 비올라 독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다. 가사가 있는 노래라면 성악 특유의 깊은 호소력은 있지만 전 세계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전달력이나 자주 연주될 수 있는 가능성 면에서는 아무래도 기악이 낫다. 비올라는 첼로와 더불어 사람 목소리를 가장 닮았다. 음울한 분위기의 이 곡에서 주인공은 첼로보다 비올라가 제격이다. 2001년 10월 2일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홀로코스트 추모 행사에서 초연된 이 곡은 2008년 크리스탈나흐트 70주년을 기해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다시 연주되었다. 크리스탈나흐트는 깨어진 수정(水晶)의 밤이라는 뜻으로, 1938년 11월 9일 나치 대원들이 독일 전역의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시너고그(유대교 사원)에 불을 지르면서 유대인 학살의 전주곡을 울린 날을 가리킨다. 음악적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조성음악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날카로운 불협화음으로 당시 처절했던 참상을 리얼하게 전해준다. 나치 독일군의 군화 발자국 소리도 들리고 수용소 포로들의 외마디 절규도 들리는 것 같다.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의 리얼리즘 음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영원한 휴식’ ‘분노의 날’ ‘눈물의 날’ ‘영원한 빛’,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지막 악장 ‘영원한 빛’에서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인류의 상처와 아픈 기억을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20세기 러시아와 동유럽 음악의 키워드였던 ‘영성’(靈性)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함께 수록된 실내악의 테마도 ‘레퀴엠’이다.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기도’에서는 유대인의 전통 민요가 간간이 흐르면서 유대민족이 겪었던 고통을 담담하게 되새긴다. 비올라와 하프를 위한 ‘조용한 음악’도 같은 계열이다.

글 이장직 객원전문기자(lu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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