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무대 위에 써내려 간 슈베르트의 이야기는 너무 고요해서, 너무 깊어서, 너무 강렬해서 한 달이 지난 후에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독자들, 혹은 아쉽게 공연을 놓친 독자들을 위해 피아니스트 김주영이 그 가을을 복기해본다. 쓸쓸한 계절이 아직은 남아있고, 다행히 우리에겐 공연과 똑같은 프로그램의 음반도 남아있다.
어느 때부터인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공연 날이 되면 은연중에 퇴근길 교통 사정을 걱정하게 된다. 그의 독주회는 중간 휴식은 물론이고 첫 곡이 끝난 후 ‘중간 입장’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주자가 지닐 수 있는 집중력의 총합을 모두 모아, 한번 피아노에 앉으면 일어서지도 않고 내리닫이로 연주하는 백건우의 음악적 ‘습관’은 자신이 맞닥뜨린 작곡가의 영감을 포함한 실체의 전부를 스캔하듯 내면으로 샅샅이 받아들여 세밀한, 그러나 모든 요소를 망라한 ‘거대 화첩’을 구상하는 데 기인하고 있다. 크건 작건, 그가 연주하는 공간이라면 우리가 그의 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공연장에 서둘러 착석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 9월 가을이 그 빛을 살짝 보이려는 틈에 만난 슈베르트의 무대 역시, 계절에 맞춰 적당히 바랜 색채의 여유로운 서정성을 기대하는 청중을 어느덧 곡절 많고 다양한 인간사 감정의 굽이굽이를 넘는 깊은 이야기로 인도하는 모습이었다. 늘 그렇듯 백건우의 이야기 솜씨는 느릿하고 깊다. 70여 분의 이야기는 그 시간이 어느 곳으로 향해 갔는지 알기 힘들 정도로 흡인력 있고 매력적이었고, 소박하고 인간적인 멜로디의 소유자 슈베르트의 가곡에서는 맛보기 힘든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즉흥곡, ‘음악의 순간’, 세 개의 피아노 소품 등의 악장들을 새롭게 재배치하여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작곡가의 새로운 이야기를 연출해낸 백건우의 아이디어는 이미 그 발상부터 독보적이다. 연주자 자신 이 스토리에 깊이 빠져 있음은 연주와 동시에 출시된 음반에서 작품들이 정확히 같은 순서를 지키고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선입견일지 모르나, 필자는 이 기발한 ‘재배치’를 통해 백건우가 피아노로 연주하는 또 다른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하나를 탄생시킨 것처럼 느껴졌다. 음악사를 거슬러올라가 볼 때 ‘겨우’ 100여 년 전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들이 멘델스존 등에 소중한 영감을 제공했던 존재라는 사실, 즉 ‘피아노로 연주하는 무언가’의 선구자 역할을 맡았음을 온전히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음악회장 문 앞에서 시간을 놓쳤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리를 잡고, 눈을 감은 채 음반을 플레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단 하나의 주의 사항은 음반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
#1 슬픔
떠들썩한 슈베르티아데의 향연이 지나간 후, 혼자 남은 작곡가에게 일상처럼 찾아오는 감정. 괴로울수록 오롯이 떠오르는 슬픔의 요소는 목소리가 아닌 건반의 울림을 통해 더욱 아련하게 떠오른다. 공연의 첫 문이자 소개인 즉흥곡의 가락은 고조되는가 하면 어느덧 우울함으로 치닫는다. 묵직하면서도 담담하게 울리는 백건우의 타건은 음표들을 통해 많은 것을 설명하는 대신 작곡가의 가슴속을 담백하게 비춰낸다. 즉흥곡 1번 D890
#2 춤
힘든 내일이 기다리면 어떠리, 아니 그 내일이 오지 않으면 또 어떠리.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현실 속에 놓여 고민했던 슈베르트 역시 낙천적인 빈 기질의 소유자였을까. 가벼움 속에 우아함과 센티멘털적인 요소를 정확히 담아낸 음반 속의 백건우는 밝고 말쑥한 톤으로 작품을 전개해 간다. 이따금 드러나는 어두운 그늘도 적절한 농도를 지니고 있어 명랑한 분위기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비르투오소적 면모도 충분하다. 피아노 소품 3번 D946
#3 추억
흔들리는 시칠리아노 리듬에 맞춰 나타나는 달콤했던 사랑의 기억은 어느덧 작곡가의 환상을 거쳐 분노와 체념으로 향해가며, 아름답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굵은 선으로 노래하는 백건우의 해석은 모노톤이나 세밀한 음영을 음표 하나하나마다 제공하여 다채로운 뉘앙스를 낳고 있다. 사색적인 동시에 듣는 이들에게도 생각의 공간을 여유롭게 제공하는 무대에서의 모습이 멋지다. ‘음악의 순간’ 2번 D780
#4 설렘
조심스럽게, 조금은 불안하게 내딛는 슈베르트의 모데라토. 그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연주자는 그 떨림의 순간을 변덕스럽지 않고 차분하게 그려낸다. 음반에서의 톤 컬러는 화사하고 그 음상은 은근한 물기를 머금고 있다. ‘음악의 순간’ 4번 D780
#5 동경
기도하듯 아름다운 선율과 샘솟는 듯한 아르페지오의 수줍은 만남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마도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의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그리움일 것이다. 시종 들뜨지 않은 채 고전파적 정서를 간직해 연주해낸 백건우가 그려내는 동경의 목소리는 정중동, 그 자체를 들려준다. 즉흥곡 3번 D890
#6 정열
두터운 화음, 극적인 도약음 등은 슈베르트의 정열과는 거리가 있다. 끝간 데 없이 이어지는 자유로운 전조, 분방하게 이어지는 스케일과 크레셴도, 스포르찬도… 많지 않은 그의 음표들이 우리의 심장 박동수를 올리게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다. 루바토와 아고긱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다이내믹 레인지의 폭을 넓힌 공연장에서의 해석은 백건우가 생각하는 슈베르트의 정열이 상당히 큰 스케일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명인기적인 포인트도 충분히 등장하나 그것을 번쩍임으로 포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훌륭하다. 즉흥곡 2번 D890
#7 바다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는 슈베르트의 마음속 바다는 어떤 모습의 파도를 품고 있을까. 알레그로 아사이와 안단테를 자유롭게 오가는 비교적 대규모의 이 곡에서 작곡가가 평생 숨기며 살았던 기백과 용기를 느낄 수 있다. 음반 속에서의 백건우는 특별히 외향적 표현을 꾀하지 않지만 작품이 지닌 거대한 구상과 존재감을 명확히 그려내고 있으며,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농염한 서정성을 감추지 않는다. 피아노 소품 1번 D946
#8 용서
모든 것을 ‘그래, 그럴 수 있어’라고 받아들이는 작곡가의 마음은 진정 삶에 대한 초연함일까. 공연과 음반 모두에서 프로그램의 중심이자 클라이맥스인 이 작품은 작곡가 특유의 서정성이 다채롭게 숨 쉬고 있는 걸작이다. 달콤함과 씁쓸함, 달관과 체념이 교차되는 악상은 가히 슈베르트의 ‘발라드’라 부를 만하다. 나약한 감상을 배제한 채 굵직한 톤으로 정공법적인 해석을 보이는 백건우의 연주는 긴 프레이징과 세심한 페달링, 명암을 순발력 있게 오가는 음색 변화 등에서 탁월하다. 피아노 소품 2번 D946
#9 환희
짧은 일생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결코 크게 내보지 못한 슈베르트의 음악은, 그래서인지 환희도 수줍은 모양을 띠고 있다. 작곡가 특유의 끝없이 상승하는 전조가 인상적인 이 즉흥곡에서 백건우의 타건은 신중한 무게감을 띠고 있으며, 선율선의 과도한 강조로 작품의 구조를 변형시키는 일 없이 깔끔한 조형미를 지향한다. 즉흥곡 4번 D890
#10 미소
짧고 곤궁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삶은 해피엔딩이었을까. 이 짧은 곡에서 그 결말을 느끼기엔 그의 미소가 너무 옅다. 오히려 갑작스레 찾아오는 느닷없는 비극적 결말의 종지와 긴 휴지부가 차마 음악으로, 말로 다하지 못한 작곡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모음곡의 엔딩이자 공연의 에필로그로서의 역할을 소품 속에서 충분히 이끌어낸 백건우의 연출은 지극히 담담하지만 짙은 뉘앙스를 자아낸다. 온갖 희로애락을 겪어낸 예술가의 평온한 뒤안길과 모든 것을 수용하는 넉넉한 위로가 녹아있는 대단원이다. ‘음악의 순간’ 6번 D780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사진 유니버설 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