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부터 시작된 김선욱의 베토벤 소나타 사이클이 끝자락에 다다랐다. “잘 알려진 작곡가임에도
쉽게 접근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라는 말로 그는 2년 간 베토벤을 탐구해온 날들을 회고했다.
약관의 젊은이에게 가혹하고도 험난한 도전이자, 스스로의 지평을 넓혀나간 수많은 시간 가운데,
그가 그려낼 전곡 연주의 마지막 무대는 어떤 모습일까. 11월 21일, LG아트센터.
지난해 3월 29일, LG아트센터는 스물네 살의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베토벤 연주를 직접 보기위해 몰려든 청중으로 가득 찼다. 사실 피아노 소나타 1번에서 4번에 이르는 프로그램 자체는 유명한 작품도 아니었다. 오로지 ‘김선욱’이라는 이름 석 자를 내건 베토벤 소나타 사이클의 시작을 기념하는 의식과도 같은 열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김선욱은 앙다문 입만큼이나 진중하고 투쟁적인 자신의 베토벤을 올곧게 건반 위에 쏟아 부었다. 그는 같은해 6월 21일 ‘비창’을 선보였고, 11월 8일에는 ‘월광’과 ‘전원’을, 올해 4월 13일에는 ‘템페스트’와 ‘발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중기의 걸작들을 연이어 연주했다.
올해 1월 18일에는 김선욱의 베토벤을 서울시향과 함께 협주곡 ‘황제’로 만났다.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성 안에서 굳건히 문을 잠그고 튼실하고 강력한 베토벤을 구현하던 김선욱이 드디어 성문을 열고 나아가 날아올라 테두리를 벗어난 자유로움을 찾고 있다는 것을. 이 같은 느낌은 6월 20일 에너지로 충만한 소나타 ‘열정’에서도 발견됐다. 9월 14일 김선욱은 드디어 초월(transcendency)의 경지에 이른 후기 소나타로 접어들었다. 2년에 걸친 베토벤 여정의 끝자락에 다다른 것이다. 약관의 젊은이에게 2년이라는 세월은, 적어도 베토벤을 탐구한다면 가혹할 만큼 시련의 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험난한 도전을 통해 향후 자신의 음악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좋은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베토벤 Op.111의 천국적인 아리에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음악을 넘어선 음악’의 결정체를 김선욱은 어떻게 풀어낼까. 어쩌면 후기 현악 4중주 15번의 몰토 아다지오에 작곡가가 쓴 ‘신께 바치는 추수감사의 찬송’과도 같은 음악으로 재창조할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는 베토벤 시리즈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다음은 김선욱과의 일문일답.
김선욱에게 베토벤은 언제, 어떻게 다가왔나요.
피아노를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 사실 베토벤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베토벤의 악보를 보면 다른 작곡가들보다 많은 음표에 당황스러웠거든요. 대신 바흐·슈베르트·모차르트를 더 좋아했어요. 서점에서 샀던 두 권의 두꺼운 베토벤 소나타는 마치 성스러운 경전처럼 구석에 고이 모셔둔 채 잊고 있었는데, 예원학교 시절 콩쿠르와 실기시험에 베토벤이 끊임없이 등장해 마주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베토벤과의 만남이 지금까지 제 음악인생에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가 됐죠. 베토벤 소나타를 포함한 공연이 그렇지 않은 독주회보다 많고, 2009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했어요.
어릴 시절, 그리고 현재 느끼는 베토벤은 어떻게 다른가요.
중학교 때 러시아 음악에 흠뻑 매료되어 있었어요. 소콜로프와 가브릴로프의 연주를 좋아했고 차이콥스키 콩쿠르 비디오를 거의 매일 봤어요. 라흐마니노프와 프로코피예프를 탐닉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베토벤을 놓을 수 없었죠. 음악도라면 베토벤을 ‘잘’ 배워야한다는 생각이 컸고 음악 이론 수업이나 화성학에서 베토벤의 중요성을 깨우치면서 이 작곡가는 평생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지금도 변함없어요. 베토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로크(바흐)와 낭만(슈만·슈베르트·브람스)을 연결해주는 끈이자 중심이죠.
베토벤 소나타 사이클 외에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한 공연 중 기억에 남는 무대는 언제입니까.
서른두 개의 소나타 중에서 예전에 연주했던 곡도 있었지만 이번 프로젝트로 새롭게 배운 작품이 훨씬 많아요. 무대에서의 경험이 전무한 소나타들은 공포 그 자체였죠. 마치 책 한 권을 딱 한번 읽고 외워서 발표하는 느낌을 매 공연에서 한 번씩 경험했어요. 하지만 이 시간이 언젠가 엄청난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해요. 게다가 전곡을 다 연주할 수 있는 무대와 청중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자 선물이죠. 기억에 남는 베토벤 협주 무대는 너무 많아서다 나열하려면 끝이 없어요. 2009년 피아노 협주곡을 하루에 끝냈을 때는 무대에서 눈물을 흘렸어요. 그땐 마치 산을 정복하고 감격한 느낌이었는데, 소나타 전곡 연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어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로 대표되는 김선욱식 베토벤 해석의 변화는 6월 20일, 소나타 ‘열정’ ‘고별’에서도 잘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베토벤 작품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하나의 곡을 해석하기 위해 여러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에요. 독일 본에 직접 가서 자필 악보와 베토벤이 쳤던 피아노로 연주해보기도 하고 곡마다 베토벤의 감정변화를 유추해서 연주에 대입하기도 했어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 해석과 연주에 스스로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것이죠. 특히 베토벤은 A부터 Z까지 모든 점을 체크해야 돼요. 페달의 양·한 음·화음마다 건반을 누르는 무게·트릴·템포·악장 사이의 시간조절 뿐 아니라 자필악보·초판본·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악보를 비교하는 작업 등 무대에 오르기 전에 체크해야 할 부분이 상상을 초월해요. 무대에 올라가서 그 실연의 희열 때문에 자연스럽게 음악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죠. 대중적인 작곡가임에도 쉽게 접근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타티야나 니콜라예바의 베토벤 시리즈 실황 음반을 들어보면 미스 터치가 간혹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단히 인간적으로 노래한다는 인상을 받곤 합니다. 컴퓨터처럼 완벽한 연주와, 미스 터치가 있지만 음악성을 앞세운 인간적인 연주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수 있을까요.
가장 이상적인 연주는 연주자의 인간미와 음악성이 연주에 녹아들어, 음표가 시작할 때부터 없어질 때까지 생명력을 가지고 음악이 가진 에센스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실수가 없으면 더 좋겠죠. 그런 연주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요. 음악적 사전 지식이 있든 없든 좋은 연주는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죠. 몇 년 전 라두 루푸의 독주회에서 그의 실연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어요. 미스 터치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의 슈베르트는 마치 천국의 음악 같았거든요.
베토벤은 평생에 걸쳐 교향곡·피아노 소나타·현악 4중주를 작곡했습니다. 이 가운데 다른 두 장르와 피아노 소나타와의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번 시리즈가 끝나면 해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하나 있어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Op.111 이후의 디아벨리 변주곡과 6개의 바가텔이에요. 베토벤의 피아니즘은 확실히 소나타에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베토벤은 32번이 자신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임을 작품에서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2악장 아리에타가 그렇죠. 베토벤은 한 시기에 여러 곡을 작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요. 후기 소나타 세 개를 쓰면서 ‘장엄미사’와 디아벨리 변주곡까지 2, 3년간 완전히 다른 음악장르를 같이 작곡했어요. 그에게 악기는 그저 도구일 뿐이었던 것 같아요.
15년 뒤 불혹이 되어서, 혹은 35년 뒤 60세가 되어서 다시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경험이 많아지고 시야가 넓어져 있지 않을까요. 똑같은 곡을 다시 연주하더라도 해석은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니, 계속 연주하다보면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해석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 기대해요. 그때도 출판 순서대로 연주하는 것을 다시 택할지는 미지수예요.
베토벤 소나타 전곡 시리즈 음반 녹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지금 당장은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10년 후에나 생각해보고 싶네요.
이번 베토벤 소나타 사이클의 마지막 공연에서 선보일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하머클라비어’에 비해 마지막 세 개의 소나타는 규모는 작지만, 그 당시 베토벤이 추구한 다양한 음악적 모티프가 농축되어 있어요. 그래서 마지막 한 음까지 소홀할 수가 없어요. 아름다워도 마냥 아름답지 않고 슬퍼도 슬퍼할 수 없죠. 그만큼 음 하나하나가 내포하는 무게가 엄청나요. 사실 서른두 개의 소나타 중 이 마지막 세곡을 그동안 가장 많이 다뤄왔어요. 심지어 32번은 리즈 콩쿠르 준결승 프로그램에도 있었죠. 30번은 2010년 예술의전당 독주회 첫 곡이었고요. 그만큼 무대에서의 경험이 많아 내심 이번 마지막 사이클을 기대하고 있어요,
베토벤 이후, 앞으로 어느 작곡가와 작품에 도전할 생각인가요.
2014년에는 되도록 베토벤을 피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거의 10년간 베토벤에 미쳐 있었거든요. 이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고 싶어요. 내년 리사이틀 프로그램에는 지금껏 해보지 않은 작곡가가 포함되어 있어요. 스크랴빈·프랑크를 비롯해 슈베르트의 후기 소나타, 슈만의 소나타를 연주할 생각이에요. 라벨과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등 도전해보고 싶은 게 많아요.
결혼 이후에 생활이 안정되었으리라 생각하는데, 음악적으로도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결혼을 일찍 하고 싶었고, 또 최고의 동반자를 만나게 됐어요. 그래서 결혼한 순간부터가 제 인생 최고의 시간이라 말하고 싶어요. 음악적인 변화 뿐 아니라 삶이 변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가족, 가정이 있다는 것은 인생의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연주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진은숙의 피아노 협주곡 개정판 연주·녹음이 계획되어 있어요. 독주회와 협연도 계속되고요. 바이올리니스트 가이 브라운슈타인·비올리스트 이마이 노부코·첼리스트 지안 왕과 함께하는 실내악 프로그램도 예정되어 있어요. 그리고 최근에 웹사이트(www.sunwookkim.com)를 만들었어요. 앞으로는 이곳에 연주 일정이 업데이트될 예정이니 자주 찾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