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은 연주 단체에게는 명함과도 같다. 베를린 필이 어떤 오케스트라인지는 연주하는 레퍼토리를
보면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슈만과 브루크너는 베를린 필의 오랜 단골 레퍼토리이고 프로코피예프 협주곡은
러시아 작곡가라는 점에서 함께 연주하는 스트라빈스키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사이먼 래틀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는 곡은 역시 스트라빈스키와 불레즈다.
깊어진 래틀, 젊어진 베를린 필
2005·2008·2011년에 이어 2년 만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수석지휘자 사이먼 래틀과 함께 한국을 찾는다. 11월 11~1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공연에서 첫날에는 슈만의 교향곡 1번,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이튿날에는 불레즈의 ‘노타시옹’,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을 들려준다.
‘봄의 제전’은 1947년 수정판. 지난해 11월 베를린 필 정기연주회 프로그램에 넣었던 곡이다. 이 곡은 20세기 음악사에서도 커다란 이정표를 세웠지만 래틀 부임 이후 달라진 베를린 필의 모습을 대변하는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올해 4월 ‘베를린 필 교육 프로그램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도 개러스 글린이 관악 앙상블과 타악기를 위해 편곡한 축약 버전으로 등장했다. 이 버전으로 2003년 2월 베를린 트렙토버 공원에 있는 체육관에서 25개국 출신의 청소년 250명이 6주간 무용 교사의 안무 지도를 받아 연습한 다음 공연했다. 체육관은 1927년부터 버스 터미널로 사용되던 곳을 환경 친화적 문화시설로 꾸민 곳이다. 7,5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콘서트·공연·전시 등 다양한 이벤트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봄의 제전’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은 ‘베를린 필과 춤을(Rhythm Is It!)’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필름에 담겼다.
작곡가 겸 지휘자인 불레즈의 ‘노타시옹’은 작곡자가 학창 시절에 쓴 12개의 피아노 소품을 1980년대 관현악으로 편곡한 것이다. 불레즈는 1971~1975년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로 런던에서 활동했다. 그는 영국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베베른의 작품을 연주한 적이 있는데 당시 래틀이 타악기 주자로 참여했다고 최근 한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래틀이 주도한 ‘봄의 제전’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롤링스톤스의 음악은 지금도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보다 인기다. 하지만 래틀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맞춰 어린이들이 춤을 추도록 했다. 청소년 가운데 일부는 1913년의 리듬이 믹 재거의 리듬보다 오늘날 더 흥미롭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프로코피예프 협주곡은 ‘젊어진 베를린 필’의 상징인 셈이다. 2009년 악장으로 선임된 일본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가시모토 다이신이 협연자로 나서기 때문이다. 카라얀 시절부터 악장으로 있던 야스나가 도루의 후임인 셈이다. 줄리아드 음악원을 거쳐 뤼베크 음대에서 자하르 브론, 프라이부르크 음대에서 라이너 쿠스마울 교수를 사사했다. 쿠스마울은 베를린 필 악장 출신이다. 1993년 메뉴인 청소년 콩쿠르·1994년 쾰른 바이올린 콩쿠르·1996년 빈 크라이슬러 콩쿠르·1996년 파리 롱 티보 콩쿠르를 차례로 석권했다. 2007년 정명훈 지휘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녹음한 브람스 협주곡 음반을 소니 클래시컬 레이블로 내놓았다. 2007년 가시모토 다이신은 일본 나루히토 왕세자와 정명훈 등 한·중·일 3국 연주자들이 함께 한 ‘우정의 가교 콘서트’에 출연했고, 2008년 정명훈이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맡은 아시아 필하모닉의 공연에서도 바이올린 협연자로 나섰다.
사이먼 래틀은 올해 1월 단원 총회 석상에서 2018년 자신의 임기가 끝나도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18년이면 자신이 64세라며 ‘내가 예순네 살 때’라는 비틀스의 노래 가사를 인용했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고 머리숱이 없어져도/밸런타인데이나 생일에 와인 선물할 건가요/새벽 2시 45분에 집에 들어오면/대문을 걸어 잠글 건가요/내가 예순네 살이 되어도 여전히 날 찾으실 건가요.”
베를린 필은 향후 3년간은 차기 예술감독 선정에 관한 공식적인 논의를 일절 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지만 물밑 탐색은 벌써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런던의 한 일간지는 래틀의 재계약 포기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차기 상임지휘자로 거명하기 시작했다. 2015년 뮌헨 필하모닉으로 떠나는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후임이다. 래틀은 영국이 낳은 세계 정상급 지휘자이고, 런던 심포니는 영국 최고의 오케스트라이니만큼 둘의 만남은 영국 음악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매우 바람직하다고 했다. 래틀은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 식전 행사에서 미스터 빈이 피아노를 연주할 때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21세기형 새로운 음악시장으로 향하다
베를린 필이 음악의 나라 독일을 대표하는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이지만 옛 명성에 안주하지 않는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새로운 음악시장을 개척한다. 카라얀 시절 베를린 필이 LP와 CD 녹음에 매진했다면, 래틀이 부임한 이후엔 연주 실황을 DVD에 담는 것은 물론 인터넷 라이브캐스트를 위한 ‘디지털 콘서트홀’을 열었다. 올해는 독일·아일랜드·스위스·영국의 60여 개 개봉관에서 공연 실황을 상영하는 ‘라이브 인 시네마’도 출범했다. 피터 셀러스가 연출한 바흐의 ‘마태 수난곡’(10월 17~19일),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하는 스트라빈스키의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12월 6일), 래틀이 지휘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2014년 2월 28일), R. 슈트라우스의 ‘23대의 독주 현악기를 위한 변용’과 다니엘 바렌보임이 협연하는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2014년 6월 18일)부터 시범 상영하고 점차 개봉관과 상영 횟수를 늘려나갈 계획이다.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점에서 상영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 실황과 비슷한 발상이다.
올해는 베를린 필의 상주 무대인 베를린 필하모니의 개관 50주년이다. 밤이 되면 건물 외벽에 조명으로 아로새긴 ‘50’이라는 숫자를 볼 수 있다. 필하모니는 1963년 10월 15일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연주와 함께 문을 열었다. 1944년 1월 30일 연합군의 베를린 공습으로 파괴된 알테 필하모니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20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베를린 필은 교회·영화관·학교 강당을 전전해야 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베를린 시민들은 ‘필하모니 복권’ ‘필하모니 우표’를 구입해 건축비를 보탰다.
베를린 필은 필하모니 개관 50주년을 맞아 특별 음악회를 마련했다. 필하모니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향적 효과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곡이다. 10월 17~19일 피터 셀러스의 연출로 두 개의 합창단을 활용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연주에 이어 20일 ‘공간적 음향’을 주제로 한 갈라 콘서트를, 10월 26~27일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를 프로그래밍했다.
글 이장직 객원전문기자(lully@)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