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데 카베손 ‘오브라스 데 무지카’ 작품집

르네상스 기악음악의 재조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1월 1일 12:00 오전

고음악 연주는 거대한 음악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역사적인 문서에 바탕을 둔 것이어도 그러하고, 이와 무관한 연주라도 그러하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 연주는 연주가의 음악적 상상력, 또는 상상력을 동원한 해석이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 음반에 참여한 둘스 메무아르는 1989년 창설된 기악 및 성악 앙상블이다. 이들은 500여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 시대의 음악을 재구성하여 우리시대 청중에게 들려주는 참으로 귀한, 그리고 용감한 단체이다. 이 음반에서 이들이 더더욱 귀해보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 알려져 있는 르네상스의 성악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음악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기악음악을 연주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연주하는 기악음악은 류트·하프·숌·스피넷·코르넷·리코더·바순·트럼본 등의 고악기 앙상블로 이루어져 있다. 당대 기악 앙상블을 모델 삼아 구성된 것이다.
이 음반은 아웃데어(Outhere) 음악 그룹에 속해 있는 리체르카 레이블을 통해 출시되었다. 토머스 몰리·게오로크 뵘·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니콜라우스 브룬스·아드리안 빌라르트·하인리히 이삭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르네상스와 바로크 작곡가들의 음악을 발굴하여 녹음해온 리체르카는 역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스페인 작곡가 안토니오 데 카베손의 음악을 이 음반에서 소개하고 있다. 카베손은 스페인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오르간 연주자 중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중요 작곡가들, 예를 들면 조스캥·빌라르트·클레먼스 논 파파·곰베르트 등의 음악에 정통한 당대 최고의 작곡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오브라스 데 무지카’는 카베손 사후 그의 아들이 출판한 카베손의 작품 모음곡집 이름이다. 이 모음곡집에는 2성부·3성부·4성부를 위한 기악음악들, 마그니피카트, 리체르카레, 4·5·6성부를 위한 노래와 모테트, 그리고 변주곡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음반의 절반은 이 모음곡집에서 채택된 것이고, 나머지는 당대의 작곡가인 필리프 베르들로 베데로, 치프리아노 드 로레, 그리고 아드리안 빌라르트 등의 작품이다. 비록 덤으로 첨가된 작곡가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르네상스 음악의 중심지였던 플랑드르 지역을 대표하는 음악가들이며,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세속 노래들과 모테트의 작곡가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음반에 담겨 있는 작품들은 ‘전형적인’ 르네상스 음악이며 또한 전형적인 르네상스의 다성음악이다.
르네상스의 전형적인 다성음악을 담고 있기에 개개의 연주자들은 자신의 성부를, 또는 목소리를 정교하고 충실하게 연주해야 한다. 다른 성부와 잘 어우러져야 함은 물론이고 이들과 어떤 종류의 음악적 조화를 추구해나갈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연주가들이 이러한 요구사항을 모른다면 이 음반에 담긴 음악들을 설득력 있게 구현해내는 일이 어려워 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음반을 듣다 보면 둘스 메무아르의 연주자들이 흡사 르네상스 음악 연주를 위해 태어난 이들처럼 느껴진다.
현대악기와는 전혀 다른 운지법, 호흡법, 아티큘레이션, 그리고 표현 방식을 요구하는 고악기들을 이리도 편안하게 다루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숌·코르넷·바순·트롬본 등의 악기들이 너무나 유연한 리듬과 선율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정교하게 첨가되는 수식음들도 참으로 자연스럽다. 때로는 즉흥적인 듯 때로는 지극히 계획적인 듯 진행되는 음악의 흐름도 청중을 르네상스 기악음악의 아름다움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해보인다. 소프라노 클라라 쿠툴리의 목소리는 이 르네상스 악기들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악기가 노래를 하는 것인지 인성이 노래하는 것인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로레와 빌라르트 등의 음악을 연주하는 바순·리코더 등 목관 악기의 소박하지만 가볍지 않은, 그리고 낯선 듯하면서도 따뜻한 음색도 이 음반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이다.
기악음악이라는 것이 본래 성악을 위해 작곡된 음악을 연주하던 것에 그치던 르네상스 시기, 아마도 작곡가들의 사고 안에는 기악과 음악의 구분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스 메무아르의 연주는 이러한 구분을 유의미하게 해준다. 그들은 기악 앙상블이기에 구현가능한 음악적 표현들, 예를 들면 유연한 춤 리듬, 적절한 양만큼의 즉흥성, 그리고 개개 악기가 빚어내는 명증한 음색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인 듯싶다. 그러나 이들의 연주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면서 편안하게 들리니 이러한 목표가 달성된 것이 아닐까.

글 이가영(음악사학자)


▲ 클라라 쿠툴리(소프라노)/드니 레쟁 다드르(지휘)/둘스 메무아르 앙상블
Ricercar RIC 335 (DD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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