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얼굴 1895’

역사적 해석이 건넨 뜻밖의 즐거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1월 1일 12:00 오전

과거 신윤복을 소재로 다룬 인기 드라마의 등장이 미술관을 찾은 초등학생들의 엉뚱한 해프닝으로 이어진 적이 있다. 그가 진짜 여자였냐는 질문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흥행 사극이 등장할 때면 비슷한 논란들은 자주 등장한다. 사학자들이나 유족들의 성난 목소리도 심심찮게 듣게 된다. 역사적 사실과 극적 환상 간의 간극이 사람들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예술 속 상상의 재미가 예상을 뛰어넘는 큰 파장을 불러올 때 목격되는 현상들이다. 9월 22~29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글 원종원(뮤지컬 평론가·순천향대 교수) 사진 서울예술단

뮤지컬에서 가장 인기를 끌던 역사 소재는 아마도 조선제국 말기 비운의 국모였던 명성황후일 것이다. 이문열의 소설 ‘여우사냥’을 근간으로 우리나라 뮤지컬계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실험인 뮤지컬 ‘명성황후’가 막을 올린 것은 1995년의 일이다. 초연된 지 벌써 2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오랜 기간 여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배우 이태원은 이 작품 하나로 국민 뮤지컬 배우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백성이여 일어나라’는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 넘버 중 가장 유명한 선율로 남아있다.
그러나 뮤지컬 ‘명성황후’만이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적 적용일 필요까지는 없다. 최근 ‘명성황후’의 사진이 없다는 이유에 얽힌 여러 정황들과 추론들이 언론 매체에 오르내리자 자연스레 예술가들의 호기심도 따라서 늘어나게 됐다. 서울예술단의 새로운 작품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바로 이런 이색적인 관심이 불러온 성과물이다. 사진 찍기를 즐기던 고종과 달리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진이 단 한 장도 발견되지 않은 명성황후의 사연을 극적으로 해석해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전개시켰다. 덕분에 명성황후의 시녀인 것으로 알려진 여인이 왜 왕비의 당의를 입고 찍은 사진이 있는지에 대한 애틋한 러브 스토리와 함께,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라이벌이자 정적이었던 시아버지 대원군에 의해 시해됐을지 모른다는 다소 위험(?)하지만 다분히 흥미로운, 게다가 발칙하기까지 한 절묘한 해석을 더하게 됐다. 이른바 ‘명성황후 생존설’의 무대적 해석인 셈이다.
뮤지컬 대신 가무극이라는 용어를 즐기는 서울예술단의 작품답게 우리 전통에 의거한 전통무용이나 선율의 보고 듣는 재미를 담아내려는 노력은 여전하다. 서울예술단이 연출자 이지나와 함께 했던 작업으로 2006년 ‘바람의 나라’도 있다. 스토리 못지않게 세련된 이미지와 비주얼을 형상화하려는 의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지만, 예전에 비해 조금 더 친절해진 느낌을 받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무르익은 원숙함 탓으로 보인다. 반면 시공을 뒤섞어 퍼즐을 맞추듯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지나식의 스토리 전개 방식은 처음보다 두세 번의 반복된 관람에서 오히려 더욱 재미를 느끼게 되는 그녀만의 최근 연출작들과 궤를 같이한다. 요컨대 그녀의 추종자들에겐 또 하나의 재미있는 수수께끼이자 선물이 될 수 있겠지만, 이지나 표 무대를 처음 접하는 초보 관객들에겐 다소 혼돈스러운 전개가 작품 감상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화룡점정의 마지막 절정의 붓놀림을 기대하는 마음은 그녀를 향한 미안하면서도 간절히 부탁하고픈 뮤지컬 애호가의 애틋한 바람이다.
작품이 보여준 재미와 성장 가능성에 비해 녹음된 반주에 의존하는 ‘소리’에 대한 배려 부족은 큰 불만이다. 소극장 무대에도 라이브 반주가 등장하는 요즘 뮤지컬 공연가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작품의 규모와도 맞지 않을뿐더러 한참이나 그것도 전속력으로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한 경우와 다를 바 없다. 몇몇 합창까지 녹음된 음원 재생은 심지어 구시대적이기까지 하다. 현장예술이자 ‘재연’의 예술 장르인 뮤지컬의 맛이 ‘재생’의 장르인 영상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당연히 음악적 형식도 녹음이 아닌 라이브의 현장성을 반영했어야 한다. 앙코르 무대가 꾸며진다면 꼭 시정되기를 기대한다. 그래도 최근 몇 년 동안 만났던 서울예술단의 작품 중에선 가장 흡족한 무대라 즐겁다. 잘 끼운 첫 단추가 좋은 결실로 이어질 수 있도록 꾸준히 성장하길 바란다.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