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있어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는 매우 버거운 곡이다. 각종 콩쿠르나 시험 등에 결코 빠지는 일이 없어 바이올리니스트에게는 가장 친숙한 곡이지만, 스물네 곡 중 단 한 곡만 연주해도 손이 뻐근해진다. 1~2분 남짓한 그 짧은 시간 동안 고도의 집중력과 고난이도의 기교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를, 그것도 스물네 개 전 곡을 한 무대에서 완벽하게 연주해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보인다. 그런데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 그것도 매우 훌륭하게.
아마도 이번 공연을 관람한 바이올리니스트라면 파가니니 카프리치오의 한 곡 한 곡이 연주될 때마다 험준한 산을 하나씩 오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카프리치오 전곡은 반복 기호 없이 연주됐지만 전곡이 연주되는 약 2시간 동안 연주자가 소리 내는 음표 하나하나에 동참하며 그 기교의 어려움에 공감하다 보니 평소보다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무대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권혁주는 그다지 힘든 기색 없이 파가니니 카프리치오를 담담하게 연주해나갔다. 뿐만 아니라 단지 이 작품의 기교를 잘 소화해내는 차원을 넘어 파가니니 카프리치오 고유의 아름다움을 표현해내며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카프리치오 1번부터 13번까지 연주된 공연 전반부. 무대로 등장한 권혁주는 카프리치오 1번에서 계속되는 아르페지오를 경쾌하게 표현해내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16분음표가 계속되어 정신을 차리기도 힘든 2번에선 이 곡에 숨은 성부 구조를 뚜렷하게 구별해내며 마치 두 대의 바이올린으로 이중주를 하듯 연주하는가 하면, 4번에선 까다로운 3도와 10도의 이중음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한편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톤으로 갈채를 받았다.
악보 자체에 충실하고자 하는 ‘정공법’이야말로 권혁주의 장점이라 할 만했다. 그는 악보에 표시된 이음줄이나 강약 기호·점 하나도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물론 때때로 악보에 충실한 그의 연주가 소리의 질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카프리치오 5번의 빠른 중간부의 경우, 그는 악보 그대로 이음줄을 살려 매우 고난이도의 기교를 구사했는데, 그 때문에 음 하나하나의 명확성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 부분에선 좀더 쉬운 방법으로 연주해 소리의 명확성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음악 자체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파가니니의 음악을 과장 없이 그 자체로 순수하게 드러냈기에 더욱 공감을 얻었다. 계속되는 트릴로 왼손이 굳어버릴 것만 같은 6번에서도 권혁주는 힘든 기색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런 선율의 흐름을 표현해냈으며 10번에서 펼쳐지는 슬러 스타카토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소리로 연주해내 감탄을 자아냈다.
후반 공연은 팡파르풍의 카프리치오 14번으로 힘차게 시작되었다. 전반부에 비해 유명한 곡이 더 많은 후반 공연에서 권혁주의 연주는 더욱 무르익었다. 비록 카프리치오 17번에서 옥타브 음정이 흔들려 약간의 아쉬움은 남았으나, 카프리치오 19번에서 보여준 생기 넘치는 연주는 일품이었다. 무엇보다 전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카프리치오 24번에서 권혁주는 각 변주곡의 성격을 뚜렷하게 표현하며 비르투오소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환호를 이끌어냈다.
일찍이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악마적인 기교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면, 권혁주는 이번 공연에서 파가니니의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글 최은규(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브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