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하루 네 시간 이상은 치지 않고, 3주간 피아노 곁을 떠나기도 한다는 이 피아니스트를 우리가 신뢰하는 이유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이 함께 하는 바흐 건반 협주곡 전곡 연주회에 모인 피아니스트들 중, 그는 단연코 눈에 띄었다. 쟁쟁한 피아니스트들이 모인 자리가 자아내는 긴장감도 피아노 앞에서 한없이 편안해보이는 그를 비껴간 듯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피아니스트인 알렉상드르 타로와 카퓌송 형제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파트너인 피아니스트 프랑크 브랄레를 파리에서 만났다.
콩쿠르 결선에서 흔히 연주되지 않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으로 19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석권했다.
베토벤 협주곡 4번으로 우승한 기록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규모가 좀더 작은 다른 콩쿠르에 원서를 보냈는데 당시만 해도 모든 것이 다 우편이었다. 서류가 며칠 늦게 도착하면 등록이 안되더라. 퀸 엘리자베스가 남아있었다. 나처럼 이력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1차 이전 심사위원들 앞에서 직접 예심을 거쳐야 했다. 예심을 보려고 브뤼셀에 도착했을 때에는 내가 한 달 넘게 머무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는 콩쿠르 사냥꾼이 아니었다. 이기기 위한 프로그램은 전혀 아니었다. 슈베르트 소나타를 2차에선가 쳤는데, 다른 참가자들의 대곡이 난무하는 가운데 숨통이 트이는 듯한 서정적인 순간이었다는 평을 들었다. 그때까지도 결선 진출자가 될 줄 몰랐다. 결선에 오르자 여기까지 온 스스로가 대견했고, 이왕이면 가장 좋아하는 곡을 처음 참가한 국제 콩쿠르에서 잘 치고 싶을 뿐이었다. 오케스트라와 쳐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가 두세 번씩 반복되기도 했다. 그 덕에 내 연주가 특별하게 들렸을 것이다. 결과가 발표된 순간, 내 이름을 듣고는 완전히 얼이 빠져 몸을 못 움직이자 다른 참가자들이 내 등을 떠밀어주었다.
콩쿠르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다. 나에게는 첫 콩쿠르이자 마지막 콩쿠르였다. 주변 상황이 거의 폭력적으로 바뀌었다. 하루아침에 연주자로서 이곳 저곳 연주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개최지인) 브뤼셀에 갈 때마다 모르는 사람들이 인사를 해왔다. 트램 운전수, 역무원, 마트의 계산원, 길 위에서 스쳐가는 모르는 사람들이 악수를 청하거나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음악원에서도 존재감이 희미했고 아웃사이더였던 나에게 곳곳에서 연주 요청이 왔고, 휴대전화가 없던 때라 집전화기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주변 사람들은 심지어 나더러 ‘너는 변했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라는 존재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옷을 입고, 피아노 연습을 너무 많이 하지 않으면서 살았다. 일 년에 120회까지도 연주를 하러 다녀봤는데 너무 소모되는 기분이었다. 곧바로 70회 정도로 줄였다. 연주 스케줄에 쫓기면서는 내가 행복하지도 않았고, 급하게 협주곡 레퍼토리들을 늘리거나 늘 같은 곡을 치는 것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잠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훨씬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었다. 파리고등국립음악원의 제자들에게도 며칠 피아노를 치지 않는 것, 연습에 얽매지 말고 가끔은 모든 것을 멈추고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3개월은 무리겠지만 3주는 피아노와 적당히 떨어져 있을 만한 시간이다. 다시 돌아오면 그간의 그리움을 더해 더 잘 칠 수 있다.
3주씩 연습을 쉬기도 하나.
그렇다. 네 살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를 통해 피아노를 시작했다. 평범한 아이로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밖에서 한껏 뛰놀면서 하루에 피아노는 딱 한 시간씩만 쳤다. 호기심이 많아서 꾸준히 앉아서 연습하는 데에는 도통 재주가 없다. 지금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은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어려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협연하기도 했는데.
열한 살에 국내 콩쿠르에서 상을 받아서 후멜의 협주곡을 딱 한 악장 쳤다. 그 연주 이후 주위의 권유로 한 번 파리음악원 시험을 보기도 했다. 이건 언론에 처음 말하는 거다. 아마 그때 들어갔더라면 우선 알렉상드르 타로와 음악원 동기가 되었을 것이고… 얼마쯤은 분더킨트로 살았을 것이다(타로와는 ‘지붕위의 황소’에서 듀오로 거슈윈의 피아노 곡을 연주한 친한 동료다). 다행히 부모님은 내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뒀고, 평범하게 남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의 중요함을 알고 있는 분이었다.
바칼로레아 성적 역시 좋았다. 그랑제콜에 갈 만큼은 아니었지만 파리7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 열일곱에는 순수하게 정제된 수의 세계, 법칙에 의해서만 작용하는 물리학의 세계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지만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나에게 음악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만질 수도, 법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도 없으므로 추상 그 자체인 음악이 나에게 선사하는 기쁨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피아노 앞에 있으면 종종 음악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 있다. 내가 음악에 아주 가까이 다가선 채로, 거의 한 몸이 되어 궁극의 합일에 다다르는 순간이다. 절대자유라고 해야 하나. 나와 음악이 한 몸이 될 때 도달하는 이 궁극의 엑스터시는 오르가즘에 비할 만한 것 같다(웃음). 내가 피아니스트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시행착오를 겪을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열여덟의 나는 내 이름 앞에 피아니스트라는 호칭이 붙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남들보다 유난히 새끼 손가락이 길다.
손이 좋아서 연습 시간이 짧아도 괜찮았을지 모르겠다. 유리한 하드웨어를 갖는 게 어쨌든 도움이 된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짧다고 해서 내가 연습을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 한 것은 아니다. 집중하지 못한 질 나쁜 연습 일곱 시간보다 충분히 악보를 보고 이해한 상태에서 집중한 세 시간이 훨씬 유용하다.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했다고 들었다.
나에게 즉흥연주를 해낼 재주가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으니 실패한 재즈 피아니스트라고 해야 한다.(웃음) 그런 면에서 거슈윈은 즉흥연주로 표현되는 지점을 악보로 남겨둔 위대한 작곡가다.
앞으로 어떤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나.
왈로니 로열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겸 지휘를 맡았는데 새롭고 흥미로운 시도가 될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음악 안에서의 절대자유’를 누리고 싶다. 자유를 누리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처럼 음악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크고 귀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누가 더 좋은 홀에서 더 유명한 오케스트라 혹은 지휘자와 연주하는지는 표면적인 기준일 뿐이다. 무대 위 매 순간, 음악에 다가가 절대자유를 누리면서 그 환희와 열락을 청중과 나눌 수 있기에 연주자는 보통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경험으로 생을 채워나가는 사람이다.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고, 어떤 단어로 규정 지어지지 않는, ‘피아니스트’라는 단어 하나가 충분한 연주자로 남고 싶다.
글 김나희(파리 통신원)
피아니스트 프랑크 브랄레
1968년 프랑스 코르베유 에손 태생. 열한 살에 라디오 프랑스 필과의 협연으로 데뷔하는 등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천재성을 보였으나, 정작 대학에서는 수학·물리학을 택한다. 그러다 1986년 파리고등음악원에 입학, 피아노와 실내악을 본격적으로 익혀나갔다. 19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 및 청중상을 차지하며 유럽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수 오케스트라 및 음악가들과의 협업을 이어갔다. 아르모니아 문디·버진 등을 통해 내놓은 독주·실내악 음반으로 국내에도 그 팬층이 두터운 그는 지난 10월 첼리스트 고티에 카퓌송과 함께 내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