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문의 오더 메이드 레퍼토리 ‘잡(雜)’

젊은 소리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2월 1일 12:00 오전

경기소리 하는 이희문과 춤추는 안은미의 인터뷰가 있던 날이다. 인터뷰 장소에는 예정에 없던 스태프들이 엉켜 있다. 한쪽에서는 공연에 사용할 영상을 제작하는 감독의 조명과 카메라가 정신없이 비춘다. 이희문과 안은미가 마주 앉았다. 둘 다 엉덩이 깔고 앉아있지만 말문이 막힐 때, 나이키 로고가 선명히 박힌 추리닝을 입은 남정네는 곱디고운 손장단을 치며 ‘제비가’ 한 자락을 뽑고, 땡땡이 문양의 옷으로 무장한 여인네는 들썩들썩 춤으로 이어간다. 그런데… 경, 기, 잡, 가라?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 둘러보면 참고서적과 음반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보고 들어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 하여, 이희문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쇤네는 경기잡가가 뭔지 알고 싶소.

이희문 경기잡가는 조선후기 즈음에 서울에서 잡스럽게 만들어진 소리예요. 대부분 12가사와 비슷하면서, 서울에서 유행하던 판소리를 잘라서 유행가처럼 부른 것도 있죠. 좋은 부분들을요. 아무튼 그때 사람들이 제일 많이 듣던 음악이죠.
안은미 살아남은 애들이네!
이희문 300년 이상이든 뭐든 살아서 생존하는 노래들이죠.
안은미 그러면 그때는 얼마나 불렀어?
이희문 최초의 진공관…. 그러니까 한국 최초의 음원에 ‘제비가’가 있어요. 미국에 유학 갔던 이희철이라는 사람이 부른 노래인데 제가 복원 연주를 했거든요. 경기잡가 중 하나예요. 유학생이 미국 가서 ‘너네 노래 불러봐라’라고 하니깐 불렀을 정도로, 따지자면 지금의 조용필 ‘바운스’ 같은 거였죠. (당시 미국 유학생 이희철은 ‘제비가’를 1896년 에디슨 원통형 음반에 노래를 녹음했다.)

이희문의 이번 공연은 경기잡가 완창 무대로 소춘향가’ ‘출인가’ ‘방물가’ ‘형장가’ ‘집장가’ ‘십장가’와 ‘유산가’ ‘제비가’ ‘선유가’ ‘평양가’ ‘달거리’ ‘적벽가’를 선보일 예정. 나열된 곡목 중 앞에 있는 곡들 속에는 숨어 있는 인물이 있으니, 춘향이다. ‘소춘향가’ ‘출인가’ ‘형장가’ ‘집장가’ ‘십장가’는 조선시대 유행했던 ‘춘향가’의 구구절절 대목을 잘라 잡가 속으로 안치시킨 명품 중의 명품. 이번 공연에서는 노래 속의 춘향이도 들려주지만 않고 실제 무대로 불러올 예정이다. 하여 기존의 경기잡가를 부르되 이희문의 목과 끼에 맞춰 부르니 어깨가 들썩할 테고, 이 동네 저 동네 논다 하는 이들 모여드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연출 안은미 이번 공연에 모든 것을 책임진 연출가. 최근 정보만 적는다. 최근 모 방송국 프로그램인 ‘무도(무한도전)’에 출연하여 촬영 현장을 ‘무도(舞蹈)’의 현장으로 전이시킨 춤꾼이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그녀 또한 이번 공연에 참석하는 소리꾼이되 잔‘소리꾼’으로 참석한다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무대연출 콘셉트는 단 하나. 음악과 영상, 춤이 어우러지는 이번 무대를 위한 다양한 시도들 중 ‘불가능’에 방점 찍고, 앞에 있는 ‘불’자를 떼어버려 ‘가능’만 남게 하는 것. 그런데 그것이 심히 인간의 탈을 쓰고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닌지라 의심쩍다가도 그녀의 말대로 해보면 관객은 웃다 뒤집어지고, 다시 일어나려다 웃고 또 자빠진다.
이번 무대에 이희문의 소리에 맞춰 괴이한 춘향이를 등장시킬 예정으로 (물론 그녀는 나오지 않는다. 연출이니까) 근육 좋고 까칠한 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광대 안대천(The광대 대표)을 뽑았다. “아주 요염할 거야!” “누가요?” “춘향이 그 놈!”

음악 장영규 ‘유산가’ ‘제비가’ ‘선유가’ ‘평양가’ ‘달거리’ ‘적벽가’의 작·편곡을 맡았다. 음악그룹 비빙을 이끄는 음악감독으로 말수가 적다. 말을 할 때가 되었는데도 말이 없다. 묵비권과 침묵의 강한 변증으로 자신을 대변하고, 통역관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음악이다.

음악 이태원 이태원에 살지 않지만, 안은미컴퍼니가 위치한 이태원에 자주 출몰한다. 작곡가로, 앞서 말한 ‘춘향가 패키지’ 총 6곡(‘소춘향가’ ‘출인가’ ‘방물가’ ‘형장가’ ‘집장가’ ‘십장가’)의 작·편곡을 맡았다. 이번 공연의 반주는 그가 이끄는 음악동인 고물이 맡았다.
한창 경기소리에 빠져 그 음악을 이리저리 맞추고 꿰어 음악극 ‘외계신호수신장치’를 만들었고, 종종 외계 신호를 수신하여 곡을 쓴다. 그래서 그의 곡(언어)은 전통음악계의 일반언어로 통용되기보다는 외계어로서 독특한 취급을 받고, 국악계의 기존 언어들이 일군 맥락을 교란시킨다. 연출을 맡았던 이 음악극에 이희문을 주인공 로봇으로 등장시켰고, 작년 ‘거침없이 얼씨구’ 공연과 음반 녹음을 함께 했다. “경기소리에 대해 배고프다고 하면 이 집(이희문)을 갑니다. 이희문은 이태원에게 경기소리의 ‘맛집’입니다.”
한편 경기잡가와 경기소리의 음악에 내재한 근본적인 기질에 날카롭고 뾰족한 탐침을 들이대는 날카로운 감각의 소유자. “중국이 대중화(大中華)를 외칠 때, 이 경기도라는 지방은 자신들의 문화를 내세웠어요. 대단한 ‘깡’이죠. 경기소리는 그곳을 기반으로 해서 나온 소리입니다. 문화발전의 척도 중 하나는 얼마만큼 분화되어 있느냐죠. 소리를 중심으로 남부나 동부 쪽으로 가면 이 소리와 저 소리가 섞여 있어요. 반면 경기소리는 소리의 특성이 체계적으로 분화되어 있고. 이론적인 것부터 체계까지. 여기에 소리에 부대하는 문화를 향한 엄청난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남도의 육자배기와 다르게 경기소리는 다른 장르와 얼마나 다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인가? 그런 고민이 만든 소리입니다.” 이번에 장영규와 함께 음악을 책임진다. 이지적이고 차가운 이태원. 한편으로는 따뜻한 구석도 있다. 이번 무대를 준비하면서 안은미가 넘어져서 생긴 빡빡머리의 혹을 보고 진심 어리게 걱정해준다. “선생님, 머리에 안전하게 ‘뽁뽁이’를 감고 다니세요.”

경기잡가는 조선후기 즈음에 서울에서 잡스럽게 만들어진 소리예요.
대부분 12가사와 비슷하면서, 판소리를 잘라서 부른 것도 있죠


▲ 안은미는 이희문의 세 번째 ‘엄니’다. 믿거나 말거나

소리 이희문 경기잡가 12곡을 멋들어지게 부를 주인공이다. 경기민요 명창을 첫 번째 어머니(고주랑)로, 이춘희 명창을 두 번째 ‘엄니’이자 ‘소리 엄니’로, 안은미를 세 번째 ‘엄니’로 두었다. 안은미에게는 ‘둘째 아들’. 믿거나 말거나. 이십 대 후반에 늦게 시작한 소리인생, 그전에 잘나가던 뮤직비디오 제작자 등의 절절한 사연은 검색하면 다 나오니 생략.
안은미의 호적에 입적하게 된 동기는 이렇다. 1997년도 초, 겨울. 안은미가 ‘심포카(Symphonic Arts) 안은미의 바리-이승 편’을 준비할 때였다. 그녀는 춤의 박동수를 더할 멋들어진, 아니 ‘쌔삥’한 남자 소리꾼 하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던 중 음악 관계자도 아닌 미술평론가 이정우의 소개로 ‘쪼끄만 친구’ 이희문을 알게 되었다. “오디션 할 테니 나와!” 하여 둘은 훤한 대낮에 사이키 조명이 미친 듯 돌아가는 지하 노래방으로 갔다. 왜? 노래하는 가수이니 오디션장은 당연 노래방이지. 그리고 오디션 시작! 가수 민해경을 좋아했던 이희문은 5센티의 목청으로 세상의 모든 노래를 다 뽑아냈다.

5월, 꽃이 피니 연락이 왔다. “희문아! 너 바리해라!” 이희문의 목소리에 반해 무용 작품의 타이틀롤을 무용수의 ‘몸’이 아닌 이희문의 ‘목’에 맡겨버린 것. “아싸! 주인공이다”라고 좋아했는데, 안은미의 연출 동선은 만만치 않았다. 이리 뛰며 부르고, 부르며 저리 뛰고, 안 쓰던 근육 쓰며 부르고, 사지를 진기명기로 만들며 불러야 했다. 숨은 헉헉댔지만 왠지 모르게 갑갑하게 조이던 숨통이 트였다. 한마디로 본업이던 “경기민요가 아닌 곳에서 숨을 쉰 것”이다. 그 뒤로 안은미족(族)의 호적에 등록되어, 안은미 작품에 노래 뽑을 일 있으면 모두 다 이희문이 맡는다.
세 명의 ‘엄니’들로부터 ‘핏줄’과 ‘소릿줄’ ‘춤줄’을 이어받은 이희문은 흥을 불어넣는 데에도 탁월하다. 2012년, 집에서 밥 짓는 어머니들을 부엌에서 뛰쳐나오게 했던 주인공으로 민요 한 자락씩 가르쳐드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놀게 해드리기 위해 ‘엄니’들을 어머니소리그룹이라 칭했다. 그러니 ‘뽀대’가 살짝 나고, ‘숙씨스터즈’라 이름 붙이니 모진 세월이 빚은 그녀들 삶의 ‘무던’함이 ‘모던’함이 되어 결국 악당이반에서 음반까지 같이 내게 되었던 것. ‘거침없이 얼씨구’는 당시 공연명과 음반명이다. “예전에는 ‘깊은 사랑’이란 게 있었다 하더라고요. 농번기가 끝나고 땅이 놀 때 깊게 파가지고 거기에 들어가고 위에다가는 서까래를 얹고 동네 어르신들이 소리를 하며 놀았다고 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채인데 땅 밑에 있으니 ‘깊은 사랑’이라 했다고 해요.” 그가 뜨는 곳마다 노래와 흥과 삶이 한데 고인다. 말 그대로 ‘사랑’이 된다.
이희문의 이름을 들으면 ‘종묘제례악’ 중 하나인 ‘전폐희문(奠幣熙文)’의 그 ‘희문(熙文)’이 생각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 이름을 쓰다가 자신의 운명을 새롭게 쓰기 위해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성할 ‘희(熺)’와 내 이름 ‘문(汶)’으로.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희문의 운명이 보인다. 이름 속에 있는 불(火)과 기쁨(喜), 물(?)과 글(文). 소리로 남을 뜨겁게 기쁘게 하고, 물처럼 흐르는 글, 즉 노래를 뽑아내는 소리꾼. 무대에 대한 욕심 또한 지독한 이 남자, 그간 홀로 무대를 꾸려왔다. 안은미의 표현대로 ‘개고생’하고, 그 과정에서 ‘삑사리’도 많이 났다고. “희문이가 노래에 집중하게 하자!” 안 엄니의 숨어있던 자식들이 나와서 이번 무대의 보이지 않는 곳곳을 책임진다. 여성민요그룹 앵비가 코러스를 맡았고, 국립창극단의 정은혜와 비빙의 이승희, 그리고 신승태·조원석·윤원호 등이 함께 할 예정.
12월 19~20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장민경·장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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