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THE MUSIC SCENE 40 세계의 예술경영인을 만나다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대표 닉 페퍼콘
300년 전통 음악출판사의 치열한 경영 철학

©Johanna Kuby
닉 페퍼콘(1976~)는 라이프치히 음대에서 바순과 지휘를 전공했다. 1996년 독립 음악출판사인 ‘페퍼콘 음악출판사’를 설립하며 출판계에 발을 들였고, 2004년부터 전업 출판인이자 편집자로 활약했다. 2015년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의 출판 책임자로 합류한 뒤, 2017년부터 경영 파트너 겸 대표로 재직 중이다.
15세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마인츠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작센주의 라이프치히는 유럽 최고의 ‘출판과 인쇄의 메카’로 성장했다. 특히 라이프치히 도서박람회는 유럽 전역의 지식인들이 모여드는 교류의 장이었으며, 1632년에는 출품 도서 수에서 프랑크푸르트를 압도하며 유럽 서적 유통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거대한 출판 인프라를 갖춘 이 도시에서, 순간의 소리로 사라지는 음악을 영구적인 기록으로 남기려는 시도가 시작됐다. 1719년 1월, 베른하르트 크리스토프 브라이트코프(1695~1777)가 라이프치히에 세운 인쇄소가 훗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음악출판사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로 성장했다. ‘헤르텔’이라는 이름은 1795년 고트프리트 크리스토프 헤르텔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더해졌다.
창립 초기부터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 긴밀히 교류하며 악보의 인쇄 품질과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음악계에는 자연스레 “위대한 작곡가들의 곁에는 늘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이 있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공습으로 라이프치히 본사가 완전히 파괴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으나, 필사적으로 지켜낸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전후 비스바덴에서 성공적으로 재건을 이뤄냈다.
오늘날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은 오랜 가문 경영 체제를 넘어, 현장형 전문 경영인인 닉 페퍼콘 대표 체제 아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과 AI 기술이 범람하는 시대에도 그는 “미학은 언제나 기술보다 우선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바흐, 베토벤 등 위대한 작곡가와 함께 한 역사
1996년 독립 음악출판사(페퍼콘 음악출판사)를 설립해 운영했던 경험이 현재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을 경영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
개인 사업을 하며 출판사 운영의 실무를 밑바닥부터 체득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조직의 규모가 커진다고 해서 비즈니스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달라지는 것은 예산의 단위와 규모뿐이다. 덕분에 지금도 거의 모든 부서의 업무에 실질적인 의견을 내고 조율할 수 있다. 동료들을 깊이 신뢰하되, 그들의 판단에 전적으로만 의존하지 않고 리더가 스스로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트프리트 크리스토프 헤르텔 시절부터 수백 년간 이어온 가문 경영이 전문 경영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충돌은 없었나?
외부에서는 큰 변화로 보겠지만 내부적으로 달라진 것은 많지 않다. 우리의 핵심 철학은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문적이면서도 따뜻한 가족애를 바탕으로 회사를 운영한다. 가문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켜온 독립성과 음악에 대한 헌신을 이어가는 일이다.
라이프치히라는 도시의 정체성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에 어떤 의미인가?
1719년 라이프치히에서 우리 출판사가 설립되며 대형 음악출판사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라이프치히를 음악과 출판의 도시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도시가 우리를 키운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당시 라이프치히에 유럽에서도 손꼽힐 만큼 풍부한 출판 인프라가 밀집해 있었다는 점이다. 도시가 음악적·경제적 중심지로 성장하자 전 세계 작곡가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고, 도시의 인프라와 출판사의 역량은 서로를 견인하며 함께 성장해 왔다.
1943년 폭격으로 본사가 파괴되면서 아카이브도 큰 피해를 입었다.
12월 4일, 공습으로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건물들이 크게 파괴되었다. 다행히 당시 대표였던 헬무트 폰 하제가 아카이브 상당 부분을 인근 마을로 분산시켜 많은 자료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귀중한 자료 상당수가 전후 미국과 러시아로 반출됐다는 사실이다.

시벨리우스 교향시 ‘핀란디아’ 피아노 편곡판의 영인본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의 대여 악보 보관 시설
전통과 혁신을 아우르는 새로운 리더십
300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전통과 혁신의 균형은 어떻게 맞추고 있나?
지금까지 10만 종이 넘는 악보와 음악 관련 출판물을 출판해왔다. 과거에는 해부학 서적부터 바그너의 오페라까지 다루었지만, 오늘날 ‘종합 출판사’ 모델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다. 현재는 19~20세기 클래식 음악에 집중하고 있다. 학술적 완성도는 물론 인쇄와 제본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품질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만큼은 변함이 없다.
원전판(Urtext)을 제작할 때, 작곡가의 자필 악보(자필보)와 초판본 사이에 이견이 생기면 어떤 기준으로 최종 판본을 결정하는가?
원전판의 목적은 작곡가의 의도와 작품의 원전에 가능한 한 충실한 텍스트를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준을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작곡가가 직접 수정에 참여한 초판본이 최종 의도를 더 잘 담고 있을 때도 있고, 반대로 급하게 인쇄되느라 초판본에 생긴 오류를 자필보와 대조해 바로잡아야 할 때도 있다. 초연 이후의 수정 사항이 개인 소장 악보에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고도의 서지학적 판단이 필요한 문제인 만큼 일반적인 정답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악보의 가독성과 레이아웃 측면에서 고수하는 방식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날처럼 마우스로 악보를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DOS라는 초기 컴퓨터 운영체제에서 명령어를 입력해 음표와 기호를 배치하던 ‘스코어(Score)’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이 프로그램의 뛰어난 그래픽 품질은 엄격한 편집 기준을 유지하는 토대가 된다. 또한, 브라이트코프만의 전통적인 디자인과 시각적 아름다움을 온전히 구현하기 위해 자체 개발 폰트인 ‘시벨리우스’를 사용하고 있다.
새로운 에디션을 기획할 때 학술성과 시장성의 사이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조율하나?
카탈로그 기획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 첫째, 기존 판본의 최신 개정이다. 현재 바그너 오페라 서곡과 전주곡의 개정 작업이 진행 중이다. 둘째, R. 슈트라우스나 프로코피예프처럼 저작권이 만료된 거장의 작품을 새롭게 추가하는 것이다. 셋째는 외부 학자들과의 협업이다. 철저한 손익 계산을 선행하지만, 상업적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더라도 카탈로그의 정체성과 학술적·음악적 가치가 뚜렷하다면 출판을 결정한다.
비교적 덜 알려진 작곡가를 발굴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아울러 현대 작곡가의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도 궁금하다.
가치 있는 작품을 보급해 레퍼토리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출판사의 진정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요아힘 라프(1822~1882)처럼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으나 음악사에서 잊힌 작곡가들의 작품을 세상에 다시 소개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 현대 작곡가의 신작을 고를 때도 기준은 오직 음악적 완성도와 레퍼토리로서의 가치다. 결국 음악출판업의 본질은 “누가 이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누가 듣고 싶어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비스바덴에 위치한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본사

비스바덴에서 열린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창립 300주년 기념 공연(2019) ©Christian Kern

스위스 라헨에서 열린 요아힘 라프 기념 음악회(2025)
전 세계 연주자들이 신뢰하는 악보 만들기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바흐 작품 발표 현장
‘음악 출판계의 명가’라는 독보적인 브랜드를 구축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긴 역사 속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들과 직접 함께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독보적인 위치에 올려놓았다. 이미 1736년, 바흐는 우리의 인쇄 품질을 높이 평가했다. “음악사 거장들의 곁에는 늘 브라이트코프가 있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거장들과 함께했던 흔적은 오늘날 악보를 대하는 우리의 책임감으로 이어진다.
전 세계 연주자들이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의 악보를 신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신뢰 때문이다. 연주자들이 무대 위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악보의 텍스트를 믿고 연주할 수 있는 이유다. 여기에 오랜 세월 검증된 인쇄와 제본의 품질이 더해진다. 가독성을 극대화한 특유의 대형 판형(25×32cm) 역시 연주자의 시각적 편의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다.
클래식 음악의 신흥 거점인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전략이 있다면?
품질 최우선이라는 원칙은 아시아에서도 동일하다. 모든 악보의 인쇄와 제본은 독일 현지에서만 진행하며 철저히 품질을 관리한다. 정품성, 원본성, 그리고 판본에 대한 신뢰가 곧 전략이다. 동시에 역량있는 아시아 현대 작곡가들을 유럽 무대에 소개하는 상호 교류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출판사 단독의 재정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각국 정부와 문화기관의 지원이 필요하다.
글로벌 음악출판사로서 전통적인 악보 판매 외의 주요 수익 구조는 어떻게 다각화되어 있나?
핵심 비즈니스 모델은 크게 네 가지다. 전통적인 인쇄 악보 판매, 저작권 관리 단체를 통한 저작권 수익, 2차 저작물 및 매체 사용에 따른 라이선스 수익,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을 대상으로 한 대여 악보와 공연권 수익이다.
디지털과 AI 시대, 명가가 살아남는 법
디지털 플랫폼의 성장과 종이 악보의 수요가 감소하는 흐름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디지털 악보 수요가 늘고 오픈 플랫폼이 범람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은 결국 품질 높은 판본이다. 우리는 위험을 피하기보다 합법적인 디지털 수요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악보를 구매하고 다운로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언제든 오류 없는 고품질 판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전통적인 판각 기술은 디지털 시대에 어떻게 계승되고 있나?
음악 조판은 위대한 대성당을 짓는 것과 같은 장인 정신을 요구한다. 어떤 프로그램을 사용하든 “미학은 언제나 기술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 장인들이 철판 위에 음표를 새기며 구현했던 시각적 균형과 미감은 오늘날에도 편집자의 눈을 통해 최우선 가치로 계승되고 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편집자만의 고유한 영역은 무엇이라고 보나?
적어도 클래식 음악 출판 분야에서는 현재 수준의 AI를 신뢰하지 않는다. 현재 AI는 긴 텍스트를 요약하거나 광고 문구를 만드는 수준의 행정 업무에 활용될 뿐이다. 악보를 다루는 인간의 섬세한 눈과 귀를 AI가 대신할 수는 없다.
역사적 자료들을 대대적으로 디지털화하여 새로운 수익 모델로 연결할 계획은 없나?
디지털화 자체는 필요하다. 하지만 라이프치히 주립문서보관소에 기탁된 자료만 해도 단일 출판사 가운데 최대 규모여서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하다. 개별 출판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또한, 이 유산을 단순한 상업적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우리의 학문적 정신과 맞지 않는다. 장기적인 공공 지원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친환경(ESG) 경영이 화두다. 악보 제작 공정에는 이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나?
악보용 종이는 오직 우리만을 위해 특별 공정으로 제작된다. 협력하는 제지·인쇄 공장 모두 최고 수준의 환경 기준 아래 운영된다.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환경 규제를 갖춘 나라 중 하나인 만큼, 법적·제도적 기준을 충실히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높은 수준의 친환경 경영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악보’란 무엇인가?
좋은 악보는 먼저 잉크와 종이가 어우러진 신선한 향기를 품고 있어야 한다. 물리적인 완성도 역시 머리카락 한 올의 오차도 없을 정도로 완벽해야 한다. 연주자가 거칠게 페이지를 넘겨도 책등이 뜯어지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조판 자체가 아름답고 정교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악보다.
디지털 패드 한 장에 수천 장의 악보를 담아 다니는 스크린의 시대다. 손가락 터치 한 번이면 세상의 모든 음악에 접근할 수 있는 지금, 잉크 냄새가 배어 있는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의 묵직한 종이 악보는 여전히 연주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좋은 악보를 단순히 연주를 위한 소모품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거장들의 숨결과 편집자들의 장인 정신이 결합된 하나의 ‘작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악보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곧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된다.
합법적인 판본을 정당하게 구매하고 무단 복제를 지양하는 일은 단순한 법적 의무를 넘어 음악 생태계를 지켜내는 중요한 실천이다. 좋은 악보를 올바르게 선택하는 작은 실천이야말로 다음 세대에 풍요로운 음악 문화를 물려줄 가장 확실한 유산일 것이다.
글 박선민(싱가포르 국립대학교 객원교수) 사진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