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과 혁신으로 똘똘 뭉친, 섬세하고도 완벽한 앙상블을 만날 시간이다
“오늘날 가장 투명하고 섬세한 오케스트라 중 하나”(‘디 벨트’ 지)라는 극찬을 듣고 있는 도이치 카머필하모니 브레멘(이하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이 첫 내한 공연을 갖는다. 12월 4~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파보 예르비의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시리즈를 선보인다. 첫날 ‘피델리오 서곡’에 이어 교향곡 7번과 3번을 연주하며, 이튿날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서곡과 교향곡 4·5번을 들려준다. 협연자 없이 한 작곡가의 교향곡과 서곡으로 프로그램을 꾸미는 것은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의 음악적 자부심이 크다는 얘기다.
음악으로 드러나는 젊은 연주자들의 팀워크
도이치 카머필하모니는 여러모로 특이한 악단이다. 음악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들이 1980년에 스스로 창단한 체임버 오케스트라다. 대학생 시절 융게 도이치 필하모닉 등 청소년 교향악단에서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호흡을 맞춰본 경험이 풍부한 꿈나무 출신들이다. 졸업 후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교향악단에 입단할 수도 있었으나 직접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지금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프로그램이나 지휘자 선정뿐만 아니라 재정 문제까지 악단 운영을 단원들이 직접 도맡았다. 단원 모두가 주식회사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의 주주들로 위험 부담을 스스로 느끼면서 혁신을 거듭해온 젊은 악단이다.
1999년 영국 지휘자 대니얼 하딩이 음악감독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도이치 카머필하모니는 철저하게 객원 지휘자 체제로 운영했다. 하딩이 떠난 2003년 이후에도 이르지 벨로흘라베크·하인리히 시프 등이 수석객원지휘자나 예술감독이라는 타이틀로 사령탑을 맡았다. 수석객원지휘자는 객원으로 지휘한 사람 중 가장 많은 횟수의 정기 연주회를 소화해내는 지휘자를 말한다. 예술감독은 음악감독에 비해 악단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지 않다. 연주 레퍼토리나 악단 행정을 단원들이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각 단원의 목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진로나 개성에 크게 반영될 수밖에 없다. 1922~1932년 모스크바에서 활동한 페르심판스처럼 지휘자 없이 연주할 수는 없지만, 단원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민주적인 악단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 명이 전권을 행사하고 나머지 단원들은 수동적으로 끌려가면서 상대적 박탈감이나 음악적 좌절감을 맛보기 쉬운 다른 대부분의 오케스트라와 다른 점이다. 단원들이 직접 악단을 운영해나간다는 점에서 도이치 카머필하모니는 런던 심포니·런던 필하모닉·베를린 필하모닉·빈 필하모닉 등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단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기업가 정신으로 똘똘 무장해 악단에 대한 충성도 또한 높다.
1987년 프랑크푸르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도이치 카머필하모니는 1992년부터 브레멘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정기 연주회뿐만 아니라 윈드 솔로이스츠 등 다양한 편성의 실내악 시리즈·여름 야외 축제 등에 출연하면서 브레멘의 음악적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본 베토벤 페스티벌이나 함부르크 엘베 필하모니 등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도 상주 악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이치 카머필하모니는 최근 브레멘 오스트 종합학교 내에 연습실을 마련했다. 이들은 학교에 상주하면서 학생과 지역사회 주민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나 등하교 시간에 도이치 카머필하모니 연습실 옆을 지나가면서 리허설 장면을 지켜보곤 한다.
크래프트 식품이나 브레멘 시 등에서 받는 외부 지원금은 전체 예산의 40퍼센트에 불과하다. 나머지 60퍼센트는 외부 출연·해외 투어나 음반 녹음 등으로 직접 벌어 충당한다.
도이치 카머필하모니가 펼치는 사업 중 하나는 음악적 아이디어를 경영에 접목하는 ‘파이브 세컨즈(5 Seconds)’ 모델의 보급이다. 음악에서 세컨드(second)는 2도 음정을 말한다. 가령 도(C) 같으면 바로 위에 있는 레(D) 또는 바로 아래의 시(B)를 말한다. 음정이 온음 또는 반음인가에 따라 장2도·단2도가 되고 때에 따라 올림표나 내림표가 붙으면 증2도가 될 수도 있다. 2도는 동시에 울렸을 때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불협화음이지만 차례로 연주하면 아름다운 선율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2도 음정의 이중성은 발전을 위한 원동력인 셈이다. 음악에서와 마찬가지로 팀 리더십 내의 갈등과 긴장은 생산적인 토론을 거쳐 수행 능력을 높이는 균형 상태로 이어진다. 도이치 카머필하모니 단원들이 지휘자 없이 앙상블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연습 참관을 통해 직접 체험하면서 팀워크 경영의 노하우를 터득하는 프로젝트가 파이브 세컨즈다. 이 대목에서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생각난다. 이 앙상블은 리더십의 공유, 수평적 팀워크의 모델로 기업 경영의 새로운 모델로 떠올랐다.
파보 예르비의 노련함이 빚어낸 앙상블
이번 서울 공연에서 도이치 카머필하모니는 2004년부터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인 에스토니아 태생의 미국 지휘자 파보 예르비와 호흡을 맞춘다. 파보 예르비는 2010·2012년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2011년 파리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해 한국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신시내티 심포니 음악감독에서 물러난 지는 몇 년 안 되었고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에서는 지난 9월 음악감독을 그만두고 계관 지휘자로 있다. 도이치 카머필하모니 예술감독·파리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2015/2016 시즌부터 NHK 교향악단 수석지휘자를 겸한다.
파보 예르비는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와 주로 독일 레퍼토리의 해석에 몰두하고 있다. 2009년 RCA 레이블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앨범을 냈다. 최근에는 브람스와 슈만 교향곡 전곡 연주와 녹음 시리즈를 계속하고 있다. 섬세한 뉘앙스를 살려내는 치밀함이 도이치 카머필하모니 특유의 실내악 정신과 잘 결합되어 완벽한 앙상블을 만들어낸다.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 시리즈는 교향악단에 새로 부임한 지휘자들이 오케스트라의 기본기를 다지기 위해 채택하는 훌륭한 교재다. 베토벤 교향곡은 독일 출신이 지휘해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파보 예르비가 태어난 에스토니아는 옛 소비에트 연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독일의 문화적 영향권에 있었다.
예르비와 도이치 카머필하모니가 2009년 9월 나흘에 걸쳐 본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시리즈는 도이치 벨레(DW)가 다큐멘터리 ‘베토벤 프로젝트’로 만들어 2010년 9월 8일 베를린 키노 인터내셔널에서 상영했다. 공연 실황은 소니 클래식 레이블에서 DVD로 나왔다. 베토벤 교향곡 2·6번 녹음으로 2010년 에코 클래식 음반상에서 ‘올해의 지휘자’로 선정되었고, 3·8번으로는 2007년 독일 음반 비평가상을 받았다. 2009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본 베토벤 페스티벌·잘츠부르크 페스티벌, 2010년 바르샤바 부활절 축제·상파울루 등지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 시리즈를 해왔다. 이번 아시아 투어의 일환으로 서울 공연에 앞서 11월 28일과 30일 일본 요코하마에서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한다. 일본에서 발행되는 음악전문지 온가쿠노도모는 도이치 카머필하모니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톱10 안에 든다고 평했다. 파보 예르비는 그동안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과 브루크너·말러·닐센 교향곡 전곡 녹음 작업을 해왔다.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와도 베토벤·슈만 등 독일 레퍼토리에 대한 천착을 계속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글 이장직 객원전문기자(lully@) 사진 빈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