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로 진행된 길버트의 인터뷰 답변은 매우 간결했다. 뱃속에서 뉴욕 필의 연주를 듣고 태어난 길버트는 음악만으로 이야기한다
늘 새롭게 변화하는 뉴욕 필의 현재
172년 전통의 뉴욕 필이 수장 앨런 길버트와 함께 2월 6~7일 양일에 걸쳐 내한한다. 뉴욕 필은 올해 2월 한국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6일, 타이완에서 이틀을 연주하는 일정으로 아시아 투어를 가진다. 취임 직후 2009년 10월 공연을 가진 앨런 길버트의 두 번째 한국 방문이다.
뉴욕 필은 더 이상 과거의 뉴욕 필이 아니다. 전통을 가장 깊은 곳에 두고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해나가는 미국 오케스트라의 특색은 취임 5년 만에 이미 뉴욕 필을 길버트만의 색깔을 지닌 오케스트라로 탈바꿈시켰다. 길버트의 취임 이래 뉴욕 필은 행정에서도 거대한 변화를 맞이한다. 우선 12년간 CEO 자리를 지켰던 자린 메타가 2012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뉴욕 필은 16개월간의 필사적인 조사 끝에 프렌치 호른 주자 출신의 오케스트라 전문 경영자 매슈 밴비시엔을 모셔왔다. 취임 당시 42세. 앨런 길버트가 뉴욕 필을 맡을 때와 동일한 나이의 젊은 CEO다. 1980년부터 이번 시즌까지 무려 35년간 자리를 지켜온 악장 글렌 딕터로우 또한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고별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악장이 음악적 총 책임자이자 솔리스토로서의 역할을 맡는 전통은 새로운 리더 아래서도 여전히 지켜질 예정이다.
음악적인 면 역시 혁신을 거듭한다. 거슈윈에게 작품을 의뢰해 그의 곡을 초연했던 월터 담로슈, 당대에는 ‘컨템퍼러리’였던 자신의 곡을 연주해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말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음악을 선보인 미트로폴로스, 수많은 곡을 자신의 악단으로 선보인 번스타인, 그리고 전위적인 시도로 물의를 빚기도 한 불레즈까지, 뉴욕 필에게 ‘현대음악’은 언제나 함께 가는 동반자였다. 그중에서도 길버트가 현대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은 또 한 번 신선하다. 그는 상주 작곡가의 작품을 정기 연주회는 물론 투어 레퍼토리에 포함시키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올해 처음 열리는 뉴욕 필 비엔날레는 92번가·줄리아드 음악원·MOMA 등 뉴욕 각지를 ‘전시장’으로 활용하여 12개국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을 선보인다. 오는 3월에는 브린 터펠·에마 톰프슨과 함께 손드하임의 ‘스위니 토드’를 에이버리 피셔 홀 무대에 올린다.
길버트는 음악 앞에 모든 것이 평등한 이상주의자다. 모든 인간에게 권리가 주어진다는 미국의 정신을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뉴욕 필의 수장답다. 줄리아드 음악원·커티스 음악원 등을 졸업한 한국 유학생들의 이상적인 목적지가 뉴욕 필인 점은 그 자유로운 정신을 반영한다. 비자 문제,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인해 고배를 마시고 종신 단원직을 받지 못 하는 유럽 오케스트라에 비해 뉴욕 필은 모든 국적의 연주자에게 평등하게 기회를 준다. 따라서 현재 뉴욕 필에는 10명의 한인 단원을 비롯해 각양각색 출신의 단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바이올린 단원으로 재직 중인 길버트의 어머니 또한 일본인이다.
‘음악 앞의 평등’을 내세우는 뉴욕 필의 수장답게, 길버트는 오로지 음악으로만 이야기한다. 이메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길버트는 자신을 포장하는 거창한 수식어,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뉴욕 필이 다른 나라의 악단보다 거슈윈이나 번스타인을 잘 표현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위대한 음악은 그 자체로 위대한 음악이고, 음악가들은 모두 같은 음악가일 뿐입니다. 출신 국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뉴욕 필은 재즈적인 접근으로 활기차고 즐겁게 거슈윈을 연주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십 년간 번스타인과 함께 해오면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가진 에너지와 추진력을 잘 이해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뉴욕 필은 유럽의 음악을 연주할 때도 똑같은 자세를 유지할 것이고, 우리는 모든 연주를 탁월하게 연주하려고 노력합니다.”
가장 미국적인 모습 그대로
앨런 길버트의 프로그래밍 원칙은 ‘새로운 음악이 기존 음악과 분리되면 안 된다’는 것. 이 점은 이번 내한 공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6일 공연은 베토벤 ‘피델리오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3번(김다솔 협연),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으로 구성된다. 7일은 오로지 미국적인 레퍼토리. 크리스토퍼 라우스의 ‘랩처(Rapture)’, 거슈윈 ‘랩소디 인 블루’(피아노 오조네 마코토)와 ‘파리의 미국인’, 그리고 번스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교향적 춤곡’을 연주한다.
6일 프로그램에서 고전음악의 보수층을 겨냥한다면, 7일 레퍼토리로는 가장 미국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랩처’를 작곡한 미국 작곡가 크리스토퍼 라우스는 1948년생으로, 이번 시즌 뉴욕 필의 상주 작곡가다. 작곡가의 설명에 따르면 곡명은 특정 종교와 무관하며, 죽음에 천착했던 1990년대에서 탈출하여 조성 음악의 범주 아래 느린 템포로 밝은 곡조를 모색하는 작품이다.
“2000년에 작곡된 ‘랩처’는 영적 행복감을 찾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강하고 어두운 음색으로 알려진 작곡가의 상반된 모습을 볼 수 있는 곡이지요.” 이 작품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길버트의 추가 설명이다.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는 재즈 피아니스트 출신 오조네 마코토가 함께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 2003년, 42세의 나이에 클래식 음악을 우연한 계기로 연주하기 시작한 이력이 거슈윈과 닮았다. 거슈윈 또한 뮤지컬과 재즈에서 시작해 클래식 음악으로 영역을 확장시켜나가며 둘을 융합했기 때문이다. 거슈윈이 재즈 밴드의 의뢰를 받아 피아노가 들어간 작품으로 만든 게 ‘랩소디 인 블루’이니, 만약 거슈윈이 21세기의 하이브리드 연주자 오조네 마코토를 만날 수 있다면 분명 반가워할 것이다. 길버트는 “지난해 6월 처음 오조네를 만나 10월에 뉴욕에서 긴 대화를 나누면서 좋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라고 설명하며, “그의 연주는 분명 흥미롭고 환상적”일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나머지 두 곡도 세계 그 어느 교향악단보다 뉴욕 필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청운의 꿈을 품고 파리로 건너갔으나 결국 뒷골목 화가로 전락한 어느 미국인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은 뉴욕 필에 의해 초연된 작품이라 특히 각별하며, 작곡 당시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번스타인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교향적 춤곡’을 뉴욕 필과 함께 음반으로 남겼다. “교향곡에서는 순수함과 완벽함을, 현대음악에서는 뛰어난 감각과 지능을, 대중적인 작품에서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같은 역동성을 추구한다”라고 설명하는 앨런 길버트. 뉴욕 필의 다재다능함을 확인하려면 확실하게 양자택일하거나, 혹은 과감히 양일을 예술의전당으로 향하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글 김여항 기자(yeohang@gaeksuk.com)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