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 나오세요!”
2012년 10월 22일 새벽 4시 강남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 한 레지던트가 무언가를 움켜쥐고 나왔다. 빈체로 기획팀 주예슬 대리가 내한한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원의 ‘보호자’가 되었다. 주 대리는 눈앞에서 본 그것을 아직까지 ‘똥’으로 기억하고 있다.
“환자는 급성 충수염입니다. 수술이 원칙으로, 제거했습니다.”
제1바이올리니스트의 터진 맹장을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주 대리는 코를 막을까 말까 고민했다고 한다. 의료진의 설명인즉, “맹장은 2~3일 전에 터진 것으로 보이며 넓게 퍼지지 않고 굳어서 다행이다. 만약 터져서 흘렀다면 충수 주위에 고름이 생기고 복막염으로 발전했을 것이다”라는 것.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은 이틀 전까지 일본에 있었다. 복통이 극심했던 그 단원은 그것을 참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온 것이다. 생명이 오가는 고통을 참고 한국으로 건너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날은 이미 밝았고 기왕 새벽까지 잠을 설친 빈체로 직원들의 분석이 시작됐다.
간단했다. 투어를 떠나면서 여행자 보험을 오케스트라가 가입하지 않았던 거다. 일본이나 우리나라 맹장 수술 비용은 100만 원 안팎이다. 전 국민 의료보험 덕분이다. 의료 민영화가 정착한 미국은 3천만 원을 호가한다. 정황상 이 단원은 맹장염을 의심한 것으로 보였다. 해외에서의 수술 비용에 겁을 먹고, 무상 의료가 되는 고향 러시아까지 배를 움켜쥐고 돌아가려 한 게 아닐까 하는 것이 빈체로 직원들의 추정이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 지휘자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가 인자한 표정으로 당일 아침 스케줄을 취소하고 병원에 들러 단원의 손을 잡았다. 러시아어 통역이 전해준 대화 내용은 “얼마나 아팠나 이 사람아, 아프다고 이야기를 했어야지, 이 바보 같은 사람아.” 페도세예프의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단원을 위로했다. 수술 비용은 빈체로가 선결제했고 두 달이 지나 오케스트라가 달러로 송금했다. “우리 단원의 건강을 위해 애써준 당신들의 노력을 잊지 않겠습니다”란 메일이 함께 왔다.
해외 단체의 내한 공연 변수 중에선 급성 질환이 가장 대처하기 어렵다. 숙련된 기획사라면 필수적으로 공연장 주변의 응급 의료기관이 어디고, 비상 시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 특히 심장 질환이 있는 마리스 얀손스를 잘 관리해야 한다. 나는 일본에서 여러 차례 얀손스 공연을 봤고, 도쿄 산토리홀과 뮤자 가와사키 심포니홀 밖에 앰뷸런스가 대기한 것을 본적도 있다.
2012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첫 내한 공연을 준비하면서 예술의전당 출연자 출입구에 앰뷸런스가 대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견도 나왔다. 그런데 투어 매니지먼트였던 아스코나스 홀트는 가톨릭 강남성모병원으로 바로 갈 수 있으니 앰뷸런스는 됐다는 의견을 보냈다. 2010년 얀손스가 로열 콘세르트헤바우와 내한했을 때 이미 조사를 마친 사안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예술의전당 어느 곳에 자동 제세동기가 설치되었는지 공연 기획사 직원이 모른다면 아티스트 보호를 위해 일부러라도 찾아보길 권한다. 시노폴리는 심장 이상으로 공연장에서 숨졌고, 마주어도 2001년 예술의전당에서 심장 질환을 앓았다.
다른 기억도 있다. 2008년 통영국제음악제에 참가하기 위해 BBC 필이 금호충무마리나리조트에 내리자마자 거구의 팀파니 단원이 목에 통증을 호소했다. 공연은 그날 밤이고 대체 단원은 없었다. 나는 2002년부터 거의 매년 통영을 방문해 어느 곳에 이비인후과가 있는지 알고 있던 터라 단원을 데리고 바로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급성 편도염”과 “R/O papilloma”라고 말하면서 “오늘 연주에는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문제는 내 설명이었다. 인터넷 사전을 찾으니 급성 편도염은 ‘acute tonsillitis’, R/O papilloma은 ‘양성 유두종’이라고 나왔다. 유두종은 그때 처음 접한 우리말이다. 나는 머뭇거리지 않았고, 그냥 “전혀 문제되지 않아요(no problem)”라고 했다. 그리고 코와 목에 넣는 가습기를 건넸다. 예상 밖으로 팀파니스트의 반응은 좋았다. 특히 하얀 바람이 나오는 기계에 흡족해 했다. 돌이켜보니 그런 기계를 영국에서는 잘 만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영국도 무상 의료 체계여서 동네 주치의·일반의(general practioner) 이상의 진료가 초기 단계부터, 통영 시골 구석까지 가능한 한국의 의료 체계에 놀랐을지 모르겠다.
글 한정호 사진 빈체로
한정호는 ‘객석’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공연기획사 빈체로에서 홍보를 담당했다. 현재 런던에서 학업을 병행하며 공연 현장에서의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