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박혜윤

비르투오소의 탄생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2월 1일 12:00 오전

1992 서울 출생 1998 한예종 예비학교 입학
2006 한스 아이슬러 음대 입학
2009 뮌헨 ARD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 우승
2012 런던 뮤직 마스터스 어워드 수상
2014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

2009년 ARD 콩쿠르에서 17세의 박혜윤은 대회 사상 최연소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콩쿠르 홈페이지에서 그녀의 영상을 봤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2014년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로 박혜윤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그녀를 이달의 라이징 스타로 꼽는 데 그 어떠한 고민도 필요하지 않았다. 독일에 거주하며 전 세계에서 굵직한 무대를 갖는 박혜윤이 이 긴 세월 동안 대체 왜 한국의 관객을 만나지 않았냐는 궁금증뿐. 질문을 받은 그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그 충격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실력’에서 비롯됐다. 세상에는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있고 우리는 음색이나 해석 스타일 등을 가지고 그들을 설명하지만, 사실 실력의 고저는 있다. ‘잘 하는 바이올리니스트’와 ‘정말 잘 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다르다. 뮌헨의 어느 음악평론가는 2009년 ARD 콩쿠르 직후 단순한 우승자와 미래의 스타를 구분하며, 박혜윤은 단연 후자라는 평가로 그 차이를 설명했다. 박혜윤은 뛰어난 해석을 펼쳐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연주자이고, 기준을 엄격하게 두자면 그러한 연주자는 극히 드물다.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스승이었던 안톄 바이타스 교수는 “박혜윤은 뛰어난 음악성과 강한 개성, 그리고 무대에서 카리스마를 가진 연주자로, 내가 만난 그 어떤 학생보다 뛰어나다”라고 코멘트를 보내왔다.
박혜윤은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로서 1월 신년 음악회를 가졌고(본지 166쪽 리뷰 참조), 앞으로 4회의 연주 일정이 남아있다(3월 27일·7월 24일·9월 18일·12월 4일). 흠 잡을 데 없는 테크닉 위에서 뛰노는 자유자재의 음악성을 목격하고 싶다면 앞으로의 무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12년 만의 한국 무대를 위해 내한한 박혜윤은 그녀를 알리게 한 ARD 콩쿠르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2009년 ARD 콩쿠르 사상 최연소 우승 ARD 콩쿠르 우승은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코른골트 바이올린 협주곡을 처음 알았는데, 곡이 정말 좋아서 완전히 전념했다. 콩쿠르 준비에 대한 부담도 느낄 새 없이 여름 내내 신이 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열심히 했으니 준비한 만큼만 연주하자고 마음먹고 나갔는데 덜컥 1등을 했다.
투어 연주의 시작 50년이 넘는 콩쿠르 역사 사상 최연소 우승자였기에 너무 많은 게 바뀌어버렸다. 매니저도 생기고, 연주 횟수도 급증했다. 나 자신은 똑같은데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으니 부담이 되고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게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2006년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 입학했고, 2010년부터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니 아무래도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로저 노링턴이 지휘하는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 일본 투어를 간 이후 현지 매니저가 생겨 일본에서도 연주를 많이 한다. 2월에 런던 필과 처음 연주하는데, 런던 필과는 2015/2016 시즌에 코른골트 협주곡을 무대에 올린다. 3월엔 크리스티안 예르비/요미우리 교향악단과 협연이 예정돼 있다.
프로 연주자로서의 삶 (처음으로 자신이 프로임을 느꼈던 순간이 언제냐는 물음에) 한 번도 아마추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도. 어떻게 보면 아직도 완벽한 프로라고 느끼진 않지만 말이다. 나는 언제나 연주자의 길을 꿈꿔왔고, 바이올리니스트는 늘 완벽성을 기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내가 프로긴 하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연주를 해낼 때. 열여덟 살 때 대니얼 호프가 아파서 그를 대신해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 연주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도시에 바이러스가 돌았는지 계약한 뒤 나도 같은 증세를 겪게 됐다. 처음 무대에 올리는 브람스 교향곡, 생애 첫 ‘점프 인’(기존 협연자를 대신해 서는) 무대, 게다가 로저 노링턴이라니! 부담감이 엄청났지만, 종일 구토를 하다가 무대에 올라가선 멀쩡히 연주를 해냈다. 그것도 사흘 내내.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나 보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위해 희생한 것 많다. 유학 생활을 위해 가족과 사는 걸 포기해야 했으니까. 열한 살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혼자 갈 수 있다고 말했는데 아버지만 서울에 남고 어머니와 동생은 모두 미국으로 왔다. 현재까지도 어머니와 동생은 독일에서 함께 살고 있다. 예술은 사실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 나 자신보다 음악이 먼저여야 할 때가 많으니 정말 많은 것이 희생된다.
박혜윤에게 영감을 주는 것 성악을 참 좋아한다. 바이올린이 더 이상 다른 사물이 아니라 내 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항상 바이올린이 내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목소리는 하늘이 내린 가장 위대한 악기다. 그것만큼 자연적인 게 없다. 자연적인 악기를 따라 하기 위해 오페라를 많이 들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시간이 많이 없어 극장을 자주 찾지는 못 하고 DVD를 사서 보곤 한다. 마리아 칼라스를 특히 좋아한다.
파트너 플로리안 울리히 피아니스트 플로리안 울리히와는 이번 시즌부터 함께 하게 됐다. 음악적으로 굉장히 잘 맞는다. 어렸을 적부터 ‘잘 맞는다’는 게 뭔지 많이 생각해봤다. 파트너로서는 음악적으로는 물론 인간적으로 잘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플로리안과는 리허설 한두 번만 해도, 심지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잘 맞는 게 인간적으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해서인 듯하다. (플로리안 울리히는 박혜윤에 대해 “그녀의 연주는 비르투오시티와 음악적 직관, 예술적 호기심의 결정체”라는 코멘트를 보내왔다.)
스승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테츨라프는 자신이 내 “두 번째 아빠”라고 말한다. 선생님을 만난 지 3년 반 정도 됐다. 연주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주자를 스승으로 만난 점이 좋았다.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몸으로 알고 계신다. 중요한 연주가 있으면 꼭 챙겨주고, 건강이 안 좋으면 수소문해서 의사를 알아봐준다. 학생이 세 명밖에 없는데도 워낙 시간이 없다 보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레슨을 해야 한다. 내가 갈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선생님 공연을 따라가서 보고 레슨을 받는다. 언젠가는 취리히 톤 할레 홀에서 연주가 끝난 직후 드레스 룸에서 레슨을 받기도 했다.
현대악기에 대한 믿음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리고 사실 공식적으로는 지금도) 독일 악기재단에서 대여해준 1781년 산 로렌초 스트리오니로 연주했다. 지금 연주하는 악기는 테츨라프 선생님이 빌려준 현대악기다. 200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선생님은 그라이너 악기만 사용하는데, 이 악기를 굉장히 신뢰한다. 물론 나도 그렇다. 날씨에 예민하지 않고, 큰 홀에서 연주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소리 퀄리티의 차이는 없다. 연주를 듣고 스트라디바리우스나 과르네리를 쓰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글 김여항 기자(yeohang@gaeksuk.com) 사진 심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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