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이 함께한 대한민국 공연예술사 30년 1996

국립국악원 예악당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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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1996
국립국악원 예악당 개관

국악계의 양적 팽창이 두드러지던 시기, 8년의 기다림 끝에 완공된 국립국악원 예악당 개관은
국악계 공연의 다양화와 대중화에 힘을 싣는 계기가 됐다

1996년 국악계 가장 큰 소식은 국립국악원 대극장 예약당 개관이었다. 이전까지 중요한 국악공연은 국립국악원 소극장, 혹은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예술의전당 등에서 이뤄졌다. 더욱이 국악계의 양적 팽창으로 인해 국립국악원 예악당 완공은 국악계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다. 여기에 정부의 예산 문제로 인해 소요된 8년의 시간은 공연장 부족으로 인한 국악인들의 갈증을 더욱 심화시켜왔다.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편 우면산 자락에 위치한 국악원은 1987년 개관한 연습 사무동과 소극장 우면동, 1994년에 개관한 국악박물관과 연구동에 이어 1996년 완공된 대극장 예악당으로 인해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게 됐다.
국립국악원 예악당은 연면적 약 14,000제곱미터(4,134평)에 지상 4층·지하 1층 건물로 총 780석의 객석을 갖췄다. 광장건축환경연구소 대표 김원이 설계를 맡았으며, 공사 총비용은 200여 억 원이 들었다. 외관은 이웃한 연습사무동 및 국악박물관·연구동과 다리로 연결되어 국악원 전체 모습이 성곽 같은 모양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는데, 당시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켜 고풍스러운 느낌을 자아낸다는 평을 받았다.
국악 공연이 열릴 극장 내부는 780석 규모에 무대를 계단식으로 변형할 수 있게 제작됐으며, 주무대와 움직이는 부무대를 두어 국악 공연 특성에 따라 활용이 가능하게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의 관점에서는 일반적인 무대 장치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최첨단 기계 설비를 전폭적으로 활용한 장치였다. 또한 국악의 현대화와 서구식 오케스트레이션화에 발맞춰 당시 국악공연장으로는 처음으로 무대 위에 방패연 모양의 음향 반사판을 설치했고, 양쪽 벽에 흡음막을 달아 잔향을 조절할 수 있게 했다. 과거 국악 연주가 벌어지던 옛 마당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객석 사이사이에는 토담 모양의 낮은 난간을 설치한 것은 독특한 시도였다. 그 외 국제민족음악 학술세미나와 민족음악경연대회를 유치하기 위한 동시통역실을 마련한 것이 특징이다. 이로써 1985년부터 시작된 국립국악원의 건립사업이 모두 완료됐다.
국립국악원 예악당 개관식은 10월 22일에 열렸다. 국립국악원 연주단원 이동규를 비롯해 19명이 ‘태평가’를 불렀고, 국립국악원 전통무용 예술감독 이흥구가 안무한 ‘선유락’이 공연됐다. 국립국악원장 이성천이 작곡한 관현시곡 ‘나의 조국’으로 이날의 행사는 모두 마무리됐다. 개막식을 시작으로 국립국악원은 국내 현역 국악명인들과 함께 40일에 걸쳐 개관기념공연을 연말까지 이어갔다.
더불어 1996년은 국립국악원이 나름대로 제 역할을 다한 한 해였다. 토요 상설 국악공연이 인기리에 진행되는 등 연주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일반인과 학생을 위한 교육과 자체 연구진의 연구도 강화되었는데, 새로운 예술감독을 임명해 각 단체마다 의욕적인 활동을 펼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원장 이성천 외에 박종선(민속악)·정재국(정악)·이흥구(무용)를 새로운 예술감독으로 임명하면서 연주 활동이 활발해졌다.
국립국악원을 다녀가는 학생들의 수도 늘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국악을 공부하게 되어 국악 공부에 대한 열기가 고조된 영향 때문이다. 일선 학교에서 의욕 있는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국악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방학을 이용해 많은 학생들이 국립국악원에서 강좌를 듣는 일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해의 화제와 인물

마카레나·볼룸댄스 교습 붐을 타고 일어난 춤의 대중화 바람에 힘입어 서울발레시어터가 3월 16일부터 한 달간 장기공연을 시도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

10월 삼익악기가 부도 처리됐다. 이후 회사 정리계획 인가 과정을 거쳐 약 4년 동안 법정관리를 받았다. 2002년 기업 합병을 통해 법정 관리가 종료됐으며, 2004년부터 흑자로 전환하면서 명성을 회복했다.

11월 국내에 세계적인 콩쿠르의 서막을 연 제1회 동아국제음악콩쿠르가 개최됐다. 이스라엘 출신의 피아니스트 아비람 라이케르트가 우승을 거머쥐었다. 현재 서울국제음악콩쿠르로 명칭을 변경해 지속되고 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해설이 있는 음악회가 1994년 절정을 이루었다. ‘금난새와 함께하는 오페라 교실’ ‘예술의전당 청소년 음악회’ 등 한 해 동안 기획된 100여 회의 공연이 성공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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