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에 찬 발걸음, 결정을 내리는 손짓, 지휘자 이승원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12월 4일 9:00 오전

COVER STORY

 

지휘자 이승원

결심에 찬 발걸음, 결정을 내리는 손짓

 

©강태욱

비올리스트에서 노부스 콰르텟의 멤버로, 신시내티 심포니의 부지휘자에서 수석 부지휘자로,

가파른 가도에 스스로 계단을 만들며 올라가고 있는 젊은 음악가를 보라.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그의 능동성과 진심 어린 발자국이 느껴진다. 그 길에서 나눈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이 이야기가 젊은 지휘자들에게 귀감이 되길 바라며.

 

 


신시내티 심포니 수석부지휘자로 승격한 이승원

솔리스트에서 노부스 콰르텟 멤버로,

교수에서 지휘자로, 도약의 10년

 

라이프치히 국립음대의 ‘종신’ 교수직을 스스로 사퇴하고, ‘2년 계약직’의 신시내티 심포니로 향한 그의 과감한 ‘결정’은 ‘확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강태욱

지난여름, 이승원의 승진 소식이 들려왔다. 2022년에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임명되었던 그가 ‘수석부지휘자’가 되면서 보낸 또 하나의 신호였다. 그의 성장과 성숙의 시간이 느껴졌다. 신시내티 심포니는 128년 역사를 지닌 악단으로, 미하엘 길렌, 파보 예르비 등 명지휘자들이 거쳐 간 미국의 명문 오케스트라다. 지금은 프랑스 출신의 루이 랑그레가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사실 부지휘자 임명 소식이 들렸을 때 ‘비올리스트 이승원’과 ‘노부스 콰르텟 멤버 이승원’이 스쳐 지나갔다. 2013년 안톤 루빈스타인 크노프 콩쿠르 1위에 입상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셋이었고,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 재학생이자, 2009년부터 시작한 노부스 콰르텟의 멤버였다. 독주자로 입증된 그는 노부스 콰르텟의 한 축을 담당하며, 2012년 독일 뮌헨 ARD 콩쿠르 2위, 2014년 모차르트 콩쿠르 1위 등의 역사적인 기록을 함께 써나갔다. 그러던 중 2017년 노부스 콰르텟을 ‘탈퇴’한 그는 지휘자로의 ‘전향’ 의향을 곳곳에 알렸다. 그때만 하더라도 똘똘하고, 똑똑하고, 명석한 한 명의 젊은 음악가가 부리는 욕심이라 생각했다. 독주자와 실내악 연주자로서 황금빛 경력을 쌓은 청년 음악가가 곁눈질로 혹은 재미로 맛보는 별미가, 그에게 지휘이지 않겠냐는 추측이었다. 그래서 그가 표출한 강렬한 전향의 의사보다는, 그저 ‘긴 활’을 잠시 내려놓고 ‘짧은 지휘봉’을 들고 나선 외출이거나, 혹은 목적지로 회귀할 안전한 방랑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승원은 진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휘자를 꿈꿨던 그는 오래전부터, 조용히, 차분히, 꼼꼼하게 지휘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일 먼저 들려온 소식은 라이프치히 국립음대 교수직 사퇴였다. ‘종신’ 교수직을 스스로 사퇴하고, ‘2년 계약직’의 신시내티 심포니로 향한 그의 과감한 ‘결정’은 ‘확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새로운 시작 앞에 선 그가 달리 보였다. 이어 신시내티 심포니 부지휘자 임명 소식이 들려왔다. 430명이 몰렸고, 선발된 2명 중 한 명이 이승원이었다.

‘젊은 연륜’이라고 해야 할까. 그에게는 독주자로 쌓은 고독의 시간과 실내악단 멤버로 쌓은 소통의 시간이 녹아 있고, 지금은 오케스트라라는 소리의 광장 한복판에 서 있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최종 결선에서 4곡의 피아노 협주곡들을 지휘하고, 국내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그를 만났다.

 

◎ 부지휘자는

‘부(지런한)지휘자’이다

 

“부지휘자의 몫이란 공부와 현장 연구다. 상임지휘자의 공연이라 할지라도 언제 일어날지 모를 일을 대비하여 ‘나의 공연이다’라는 마음으로 늘 공부해둬야 한다.” ©강태욱

평소 비올리스트나 노부스 콰르텟의 멤버로 만나다가 이렇게 지휘자로 만나니 낯설면서도 새롭다. 하여 본 인터뷰의 질문도 그때와는 완연 다르다. ‘지휘자’라는 말보다 ‘부지휘자’는 어느 오케스트라의 소속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직업인 것 같다. 그렇다 보니 본인이 생각하는 부지휘자란 어떤 존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신시내티 심포니의 경우 정기연주회를 맡은 지휘자의 ‘커버 지휘자’로 늘 대기해야 한다. 리허설 현장에선 상임지휘자나 객원지휘자를 도와야 하고. 콘서트홀을 돌면서 무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관객석에서 점검한다. 그렇게 점검한 항목들을 스코어(총보)에 표시하고, 리허설이 끝나면 문서로 만들어 지휘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상임지휘자의 공연이라 할지라도, ‘나의 공연이다’라는 마음으로 늘 공부해 둬야 한다.”

신시내티 심포니에는 다섯 명으로 구성된 지휘자 군(Artistic Leadership)이 있다. 음악감독 루이 랑그레, 팝스 지휘자 존 모리스 러셀(1960~)과 데이먼 거프튼(1973~), 작곡가이자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인 마티아스 핀처(1971~), 부지휘자 다니엘 와일리, 그리고 수석부지휘자 이승원이다.

작년에 입단 후 어시스턴트(부지휘자)를 거쳐 현재 어소시에이트(수석부지휘자)가 되었다. 전과 달라진 ‘특전’이 있다면 무엇인가.

“신시내티 심포니는 여러 형태의 음악회를 선보인다. 부지휘자는 가족 음악회, 어린이 음악회, 찾아가는 음악회, 그리고 유스 오케스트라를 맡는다. 크게 달라진 점은 여러 연주 기회 중 정기연주회 1회를 할당받았다는 점이다.”

정기연주회 선곡 구성이야말로 지휘자의 특권인데, 만약에 선곡의 자유권이 주어진다면 어떤 곡을 제일 먼저 선보이고 싶나.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이다. 깊이 있게 공부했다고 자부하는 곡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이 곡만 들으면 몸이 근질근질하다.(웃음) 또 다른 곡은 바그너의 ‘무언의 반지’(로린 마젤 편곡)이다. 말러나 바그너 같은 대곡(大曲)에 목말라 있다.”

부지휘자로 여러 업무를 진행하며 어려운 점은 없었나.

“정기연주회 1시간 전에 공연 감상을 돕는 강연도 부지휘자의 몫이다. 지난 10월 정기연주회에서 R.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주했다. 이를 위한 강연으로 신시내티 대학의 철학과 교수와 함께 일종의 토크 콘서트 진행을 맡았다. 그가 철학적 관점으로 니체를, 나는 음악적 관점으로 슈트라우스를 이야기했는데, 독일의 철학을 영어로 논하며 관객의 이해를 돕는 상황이었다. 독일에서 오래 공부한 내게 영어는 제3의 언어인데, 쉽지 않은 순간이었다.(웃음)”

들어보니 부지휘자는 ‘음악 외적인 것’들을 ‘음악’만큼이나 신경 써야 하는 존재인 것 같다.

“음악회를 앞두고 점검과 검토를 연속해야 한다. 공연에 필요한 자막을 직접 제작하고, 공연 때는 흐름에 맞게 자막을 조종한다. 신시내티 심포니는 같은 공연을 3회씩 선보일 때도 많은데, 그중 1회는 방송을 통한 생중계다. 그때는 촬영 기술자들과 소통하여 카메라가 악단의 어느 부분을 잡아내야 하는지 이를 돕고 지시한다. 미국 오케스트라 운영에 재원 조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지원금을 끌어오기 위한 중요한 회의에도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절반의 음악적인 업무와 절반의 행정 업무, 그리고 단원들과 사무국 직원들 사이. 나는 지금 그 사이에 서 있다.”

 

◎ ‘음악의 고향’ 독일에서,

‘신세계’ 미국으로

 

예술의전당 30주년(전관 개관) 기념 ‘이승원&서울시립교향악단’(2023) ©예술의전당 ©강태욱

거장 지휘자들은 매번의 연주를 통해 오늘날의 신화를 부지런히 써내려 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과거에는 누군가의 문하에서, 혹은 어느 교향악단의 부지휘자로 재직하며 성장하던 훈련생들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공연 환경이 달라졌어도 이러한 지휘자 탄생 과정은 고전적인 도제식이다.

프란츠 벨저 뫼스트는 바이올린을 전공했다가, 빈 슈타츠오퍼에서 아바도의 부지휘자로 있다가 5년간 스웨덴 노르셰핑에서 지휘자로 경험을 쌓았다. 이후 25세에 카라얀의 추천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지휘대에 올랐다.

부지휘자는 어떤 지휘자의 문하인가도 굉장히 중요하다. 지휘자의 성향과 습관이 부지휘자를 키우기 때문이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을 이끌던 므라빈스키(1903~1988)는 부지런한 리허설로 유명했지만, 정작 정기연주회의 지휘봉은 부지휘자에게 곧잘 넘겨주곤 했다. 1961~1979년에 부지휘자였던 이는 아르비드 얀손스(1914~1984). 마리스 얀손스의 부친이다. 대신 므라빈스키는 가끔씩 정기연주회에 등장하여 관객들을 흥분시켰다. 마리스 얀손스도 카라얀의 부지휘자로 활동하다가 레닌그라드로 돌아와 므라빈스키를 도와 필하모닉(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을 꾸준히 지휘했다. 아들 얀손스도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의 부지휘자로, 레닌그라드에선 므라빈스키의 부지휘자로 경력을 쌓았다.

 

가끔 부지휘자를 만나면 “메이저 악단의 부지휘자이냐, 아니면 마이너 악단의 상임지휘자이냐”라는 질문을 해본다. 많은 이들이 후자를 택한다.

“신시내티 심포니 입단 전후로 여러 악단의 러브콜을 받았다. 다만 메이저 악단의 시스템과 여러 일을 배우는 기회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메이저 악단의 부지휘자를 거쳐 노력만 한다면 마이너 악단뿐 아니라 메이저 악단의 상임지휘자나 음악감독으로도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때를 위해 넓게 보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미국의 유명 지휘자들도 부지휘자부터 시작했다. 제임스 러바인, 윈 모리스, 유리 시걸은 클리블랜드에서 조지 셀의 부지휘자였고, 로렌스 포스터는 주빈 메타가 이끌던 LA 필하모닉, 마이클 틸슨 토머스는 보스턴 심포니의 부지휘자였다. 로진스키 역시 1926~1929년에 스토코프스키 문하에서 활동했고, 쿠세비츠키의 제자인 레너드 번스타인을 뉴욕 필의 부지휘자로 데려왔다.

이승원은 미국으로 오기 전에 오랜 시간 독일에서 공부했다. 음악가 가족이었던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어릴 때부터 음악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그의 비올라 스승은 이모이자 많은 비올리스트를 배출해낸 조명희였다. 이승원은 예원학교를 거쳐 서울예고 재학 중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원래의 꿈은 지휘자였고, 비올라에 욕심이 없었다”던 그를 독일로 이끈 것은 타베아 치머만(1966~)이 녹음한 슈만 음반이었다. 이후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에서 학사와 석사, 최고연주자과정(Konzertexamen)을 마친 그가 같은 대학에 지휘 전공으로 다시 입학했을 때는 스물다섯이었다. 크리스티안 에발트 문하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밟았고, 울리히 빈트푸어 문하에서 함부르크 국립음대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지휘 공부와 함께 노부스 콰르텟의 활동도 겸했던 그는 2016년부터 C.P.E. 바흐 무지크김나지움(Musikgymnasium Carl Philipp Emanuel Bach)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25살에 지휘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 어떤 각오를 했나.

“길게 이어질 지휘 인생을 생각해 볼 때 비교적 빠른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었나. 아니면 이전부터 준비했나.

“음악 가족이었던 외가의 영향도 있었고. 네 살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동시에 시작했고, 초등학교 때부터 ‘화성학’ 교재(백병동 저)를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예원학교 시절에도 비올라 전공이었지만, 화성학, 음악이론, 시창·청음을 부지런히 공부했다.”

독일에서 오랜 시간 공부했는데, 미국으로 간 이유는 무엇인가.

“독일에는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오페라극장의 오케스트라, 방송교향악단, 체임버 오케스트라 등 많은 악단이 존재한다. 하지만 공채를 통해 지휘자를 선발하는 곳은 오페라극장 소속의 오케스트라뿐이다. 따라서 독일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대인 관계를 만들었지만, ‘공채’라는 공식적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독일에는 부지휘자 제도가 없었다. 세계적인 거장들도 리허설을 하다가 음향과 앙상블을 체크하기 위해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으로 뛰어가 음향 체크를 하고 다시 무대로 올라가는 일이 다반사다. 이에 반해 미국은 악단마다 공식으로 부지휘자 제도가 있고 공채로 그들을 채용한다. 내가 미국행을 결심하게 한 결정적인 이유다. 독일에서 프리랜서 지휘자로 활동하면서도 미국 음악계 구인·구직 광고를 열심히 검색했다. 그러던 중 신시내티 심포니의 공채를 보았다.”

미국에 유독 부지휘자 제도와 공채가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독일 오케스트라는 정부의 후원을 받지만, 미국은 개인과 기업의 후원이 주를 이룬다. 후원자들을 위해 미국은 지휘자의 갑작스러운 공연 취소에도 대체 지휘자(커버 컨덕터)를 무대에 세운다. 나도 미네소타 오케스트라에 대체 지휘자로 초빙된 적이 있었다. 리허설과 공연이 시작되기 한참 전에 공연 계약이 이루어지는데, 그때에 대체 지휘자도 거의 동시에 계약한다. 그럴 바에 차라리 부지휘자를 정식으로 두어 모든 정기 공연의 커버 컨덕터로 계약하는 방편을 세운 게 미국의 방식이다. 그러니 악단마다 부지휘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 음악의 밭을 갈고,

씨 뿌릴 곳을 탐색하며

 

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

음악 마니아나 언론은 ‘빅5’나 ‘탑10’ 같은 타이틀을 통해 오케스트라의 순위를 매기곤 한다. 1950년대에는 미국의 뉴욕·보스턴·시카고·필라델피아·클리블랜드의 심포니나 필하모닉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명장이나 독재자 같은 지휘자들이 그 기준을 충족시켰다. 예를 들어 뉴욕 필의 미트로풀로스와 번스타인, 시카고 심포니의 프리츠 라이너와 게오그르 솔티, 필라델피아의 유진 오먼디, 클리블랜드의 조지 셀 등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각 악단의 음악적 전통은 확립됐지만) 악단의 명성과 위치도 바뀌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유명 음악가들의 미국 망명이나, 실력 있는 젊은 지휘자들의 등장도 ‘빅7’이나 ‘탑10’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는 데 한몫했다. 신시내티 심포니도 샌프란시스코·피츠버그·디트로이트·볼티모어·휴스턴 등의 악단들과 함께 리스트에 오르내릴 정도로 후발 주자로 성장해 나갔다.

특히 에리히 쿤젤은 신시내티 심포니의 숨은 주역이었다. 동일한 구성원을 토대로 ‘제2의 악단’이라 할 수 있는 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를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1966년 10월 6~8일 신시내티 심포니의 내한(서울시민회관) 당시에도 3일간의 공연 중 이틀 간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당시 협연자는 피아니스트 로린 홀랜더와 윤미경). 그리고 최나경(플루트)의 부수석 입단과 파보 예르비의 예술감독 재임도 신시내티 심포니가 국내 관객에게도 더욱 친근하게 다가오는 계기가 되었다.

 

입단 오디션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1차 오디션이 2022년 4월에 있었다. 사실 고민이 많았다. 부천 필하모닉(4.7)과 한경arte필(4.14) 공연 사이에 오디션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급박하게 온 연락이라 비행기에 오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오히려 “지금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달려왔는데”라며 용기를 주더라. 1차 오디션은 ‘봄의 제전’, 버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거슈윈 ‘파리의 미국인’, 베토벤 교향곡 5번,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등 8곡의 발췌 부분(Excerpts)을 사전 리허설 없이 악단과 런스루로 지휘하는 것이었다. 2차는 유스 오케스트라와 30분 동안 2곡을 리허설하는 것이었다.”

지휘와 리허설 외에 다른 시험은 무엇이었나.

“인터뷰 면접이었는데, 음악감독과 팝스 지휘자, 사무국장, 유스 오케스트라 담당자들의 질문은 각각 결이 달랐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이 내가 입단한 뒤 해야 할 ‘업무’와도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응했다. 사무국장과 팝스 지휘자는 재원조성이나 부지휘자로서 악단에 공헌할 역할에 관해 물었다. 팝스 오케스트라가 관객과의 간극을 좁히는 방법인 만큼 그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유스 오케스트라 담당자는 바흐 무지크 김나지움 오케스트라 지휘자 경력을 높이 평가했다. 상임지휘자는 음악에 대한 해석 등을 물었다.”

신시내티 심포니는 팝스 오케스트라로도 유명하다. 보통 ‘팝스 오케스트라’라고 하면 동일한 지역명을 단 다른 단체로 생각하곤 하지만, 실제로 팝스 오케스트라는 운영 자본과 규모가 큰 악단만이 운영할 수 있는, 이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이다(실제로 1997년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가 내한했을 적에 이 악단이 명문 보스턴 심포니였다는 것을 모르는 이도 많았다).

동일한 단원들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팝스 오케스트라에 참여하고 있다.

“어젯밤 정기연주회에서 연미복과 드레스를 착용했던 그들은 팝스 공연이 있는 다음날 빨간 재킷을 입는데 의상뿐 아니라 사운드의 구조도 확연히 달라진다. 신시내티 심포니는 팝스 공연과 에리히 쿤젤이 쌓은 전통에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베를린 C.P.E. 바흐 무지크김나지움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베를린 필하모니)

팝스 공연 때 지휘자와 리허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나.

“영화음악 콘서트의 경우 영화 전체를 상영하고 그 안에 담긴 모든 음악을 연주하는 방식이라 상영시간이 곧 연주시간인 셈이다. ‘스타워즈’의 경우 2시간이 훌쩍 넘는데, 리허설은 단 한 번 3시간이다. 단원들은 이 유일한 리허설에 완벽하게 준비하여 임한다.”

독일과 미국의 경우, 지휘자 역할이나 악단 분위기가 다른 만큼이나 지금까지 지켜본 리허설도 차이점이 있을 것 같다.

“독일에 있을 때 베를린 필의 리허설을 자주 보았다. 3일간의 리허설이라면 첫째 날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단원들도 인간이기에 어려운 음악 앞에 헤맨다. 하지만 리허설을 거친 둘째 날이 되면 다른 악단이 되어 있다. 반면 신시내티 심포니를 비롯한 미국의 경우 첫날부터 앙상블에 문제가 없다. 단원들의 반응 속도가 빠르고 빠릿빠릿하게 지휘자의 요구를 빨아들인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지휘자의 해석과 요구에 맞춰져 있기에 단원들의 해석이 개입되지 않아 사운드가 평면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한편 독일은 지휘자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단원들의 음악적 해석이 함께 어우러진다. 그래서 미국의 지휘자들은 같은 지시를 한 번 이상 말하지 않고, 독일에서는 지휘자들이 음악적 고집을 피우며 단원들과 논쟁하고 함께 음악을 만들어나간다.”

 

◎ 배움으로 무장하고,

기다림 속에 전진하며

 

 

2017년 노부스 콰르텟에서 나온 그에게 2018년과 2019년은 지휘 공부와 도전의 시간이었다. 신시내티 심포니 홈페이지를 보니 그의 소개란에는 제일 먼저 콩쿠르 수상 실적이 나온다. 부쿠레슈티 BMI 지휘 콩쿠르(2018)와 타이베이 지휘 콩쿠르 우승(2019)이다. 무엇보다 그는 크리스티안 마첼라루,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다니엘레 가티, 리카르도 무티, 네메 예르비, 마르쿠스 슈텐츠 같은 지휘자들의 공연 현장과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하며 배움의 시간을 단단히 가졌다.

 

노부스 콰르텟 활동이 지휘 인생에 도움이 되었다면 무엇인가.

“독주자로서 종일 ‘혼자’ 연습하는 것과, 콰르텟 멤버들과 ‘함께’ 연습하고 공연하는 것은 소통 능력과 사회성의 비중이 다른 작업이다. 특히 실내악단의 경우 공연을 앞두고 매일 연습을 함께 하는데, 그 과정에서 대화는 필수이고, 갈등이 생기면 반드시 풀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콰르텟 활동을 통해 화합하는 과정을 10년 동안 공부하고 경험한 것인데, 몸에 밴 이 시간이 1백여 명의 단원과 리허설을 해나가는 지금의 나에게 너무나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독일에서 지휘 공부를 할 때 동료들이 나를 부러워한 이유이기도 하다. ‘승원! 너는 스트링 콰르텟으로 리허설에 단련되어 있잖아!’라면서.”

노부스 콰르텟과 함께 한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지휘자로 전향하고 콰르텟에서 탈퇴한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슬픈 것이 있다면 주옥같은 현악 4중주곡을 연주할 수 없다는 것. 특히 베토벤이 만년에 지은 이른바 후기 현악 4중주 작품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다져온 콰르텟만이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이다. 베토벤 9번이 ‘교향곡의 마지막’이라 하지만, 그 마지막이 주는 깊이와 감동은 감히 말한다면 후기 현악 4중주곡만큼은 되지 않는다. 그 곡들을 연주한 이들만이 느껴볼 수 있는 깊이감이 있는데, 오케스트라에서는 이걸 누릴 수 없다는 점이 슬프다.”

음악에도 여러 영역과 장르가 있다. 비올리스트로 ‘독주’의 맛을 보았고, 콰르텟의 멤버로 ‘실내악’의 멋도 보았고, 지금은 관현악이라는 ‘거대한 우주’를 누리고 있다. 이제 창작(작곡)만 하면 음악의 우주는 다 누려보는 셈일 텐데.

“분명하게도 작곡에는 재능이 없다. 지휘자로도 늘 시간이 부족한데, 작곡까지 겸하는 지휘자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지휘자로서 가장 매력적인 장르를 꼽는다면. 교향곡, 협주곡, 오페라 등등.

“하나를 꼽는다면 나머지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웃음) 지휘자로서 오를 수 있는 정점은 오페라 지휘라고 생각한다. 오페라를 지휘하는 이는 언제든 교향곡도 지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무엇보다 ‘이중의 소통’이라 해야 할까. 오페라가 시작되면 지휘자는 유일하게 소리를 내지 않는 음악가지만, 피트 속 단원들과 눈빛으로 소통하고, 무대 위 성악가들의 목소리와 소통하는 이중의 소통을 하게 된다. 그런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오페라 지휘에 대한 매력은 언제 느꼈나.

“도쿄에서 열린 ‘리카르도 무티 이탈리아 오페라 아카데미’에서였다. 오디션에 초대받은 20명의 지휘자 중 성악가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4명의 지휘자가 뽑혔고, 그후 2주 동안 무티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오페라 지휘의 명장이었던 만큼 오페라 지휘의 매력에 푹 빠져든 시간이었다.”

세계의 여러 지휘자와 만나 배움의 시간을 갖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만남과 배움이 있었다면.

“지휘에 대한 시선이 바뀌고 시야가 넓어진 것은 다니엘리 가티와의 만남이었다. 대만 타이베이 콩쿠르 우승 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열린 키자나 페스티벌이었다.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2악장을 함께 했는데, 그의 한 마디 말이 지휘자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승원, 너는 악단이 너를 언제 필요로 하고, 필요로 하지 않는지를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더불어 필요로 할 때는 음악의 영감을 어떻게 주어야 할지, 악단의 흐름을 언제 쥐고 풀어줘야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라고. 그러면서 그가 지휘봉을 든 내 손을 직접 잡고 지휘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6분 동안이었는데,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다. 사실 지휘 수업에서 지휘봉을 쥔 손을 교수나 지휘자가 직접 잡는다는 것은 그만큼 보정해야 할 자세도 많고 지켜보다 못해 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 수치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가티의 손에 내 모든 것을 맡겼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웠다. 내가 손을 저으려고 할 때 그는 움직이지 않았고, 작은 동작으로 지휘하려 할 때 그는 크게 움직였다. 나의 흐름과 그의 흐름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생각해보면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들의 메소드는 참으로 매력적이다. 가티를 비롯하여 샤이, 아바도 등등. 2019년은 콩쿠르 우승은 물론 내 지휘 인생에서 발전의 순간이 많았던 해다.”

 

12월, 신시내티 심포니가 연말 공연으로 준비한 ‘호두까기 인형’의 지휘봉은 그가 잡는다. 가티가 잡았던 손이 이승원의 생각과 시선을 바꾼 것처럼, 악단에게 지휘자 역시 그러한 존재다. 단원들이 내는 소리의 손목을 잡아 그 길이 올바르게 펼쳐질 수 있도록 하는 것. 악보가 이정표라면, 지휘자는 동반자이자 스승인 셈이다. 음악의 길로 걷는 소리들이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그는 공부하고, 연구하고, 설득하고, 모범을 선보이고 있다.

국내에서 이승원의 지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종종 펼쳐지고 있다. “한국에서 섭외가 오면 비행기에 오르게 하는 레퍼토리인지를 제일 먼저 본다”는 그는 지난여름 예술의전당이 30주년(전관 개관)을 맞아 선보인 특별 음악회 ‘이승원&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한여름밤의 꿈’(멘델스존) 전곡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상기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올린 협주곡 4곡(차이콥스키·브람스·베토벤·프로코피예프)의 무대도 피아니스트 4인의 경연인 동시에 이승원의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이기도 했다. “연주자로서는 공연 전날이 완성도를 높이는 클라이맥스라면, 지휘자에게는 오케스트라와의 첫 리허설이 그런 순간인 것 같다”는 그는 언제든 다른 악단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신시내티 심포니의 수석부지휘자로서 받은 시간은 2년. 성장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의 음악과 인생을 아는 이들에게는 이승원의 새로운 소식을 기다릴 ‘2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사진 강태욱(workroomk)

 

이승원(1990~) 현 신시내티 심포니 수석부지휘자. 라이프치히 국립음대에서 비올라 교수와 베를린 C.P.E. 바흐 무지크김나지움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루마니아 BMI 지휘 콩쿠르와 대만 타이베이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슈투트가르트·도쿄 필하모닉, 밤베르크·함부르크·뉘른베르크·라이프치히 심포니 등과 서울시향, KBS교향악단, 국립심포니, 경기·부천 필하모닉 등을 지휘했다. 무티·네메 예르비·가티·마르쿠스 슈텐츠·크리스티안 마첼라루·마린 알솝 등의 지휘자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했으며, 최근에는 2022년 예술의전당 여름음악축제 개·폐막 공연과 교향악축제, 2023년 여수음악제 폐막 공연과 예술의전당 30주년 ‘이승원&서울시립교향악단’ 등을 지휘하며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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