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하얗게 빛나던 스위스의 겨울, 14회를 맞은 그슈타트의 ‘음악적 정점’ 페스티벌에서는 스타 음악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여덟 팀의 신예들이 화려한 경쟁을 펼쳤다
스위스 그슈타트에서 열리는 ‘음악적 정점(Sommets Musicaux de Gstaad)’ 페스티벌이 1월 31일부터 2월 8일까지 열렸다. 2001년 젊은 인재들의 발굴을 목적으로 발족된 이 페스티벌은 올해도 전 세계에서 온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토머스 햄프슨·르노 카퓌송·디에고 파솔리스·카리나 고뱅, 그리고 자비에르 드 메스트르 같은 스타 연주자들이 어울려 9일간의 벅찬 프로그램을 선사했다. 2월 1일에 열린 토머스 햄프슨과 암스테르담 신포니에타 연주, 2월 2일에 열린 피아니스트 유재경과 김윤지의 듀오 리사이틀을 취재했다.
화려한 청중 위에 노련한 토머스 햄프슨이 있다
그슈타트의 겨울은 스키로 유명하다. 페스티벌을 찾아가는 길, 레만 호를 낀 몽트뢰에서 해발 1,050미터 가량 올라가는 그슈타트의 산길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고, 그슈타트 시내는 전 세계에서 온 부호 스키족들로 그야말로 만원을 이루었다. 이 부호들은 그슈타트 페스티벌의 잠재적 청중이다. 그런 만큼 이 페스티벌은 세계적 금융사 에드먼드 드 로스차일드와 골동품·미술품 경매 회사 소더비, 보석 회사 아들러 등 호화 파트너들과 후원자들이 참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호화 후원자들은 매일 저녁 연주가 끝나면 그슈타트 팰리스 호텔이나 루주몽의 카페에 모여 연회를 즐기는데, 이 연회는 연주자들도 참석하는 교류의 장이다.
눈이 펑펑 내리는 2월 1일 저녁 7시 반, 그슈타트의 옆 마을 자넨에서 토머스 햄프슨과 암스테르담 신포니에타의 연주회가 펼쳐졌다. 연주회장은 모피 코트 속에 화려한 파티복을 입은 귀부인들로 붐볐다. 수석 바이올린 주자 칸디다 톰프슨이 이끄는 암스테르담 신포니에타는 멘델스존의 현을 위한 교향곡 10번에 이어 휴 울프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된 이탈리아 세레나데 G장조를 연주했다. 보기 드물게 색감적이고 생동적이던 연주는 칸디다 톰프슨의 강렬한 개성을 잘 드러냈다. 토머스 햄프슨은 브람스 ‘네 개의 엄숙한 노래’와 슈베르트 ‘리라에 부쳐’ ‘멤논’ ‘비밀’, 그리고 볼프의 ‘산책’ ‘방랑’ ‘쥐 잡는 사람’ 등 6곡의 리트를 불렀다.
햄프슨은 희끗한 옆머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곧고 건장한 체구로 등장했다. 그는 강건하고도 심오함이 엿보이는 태도로 브람스의 유언과도 같은 작품인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불렀다. 그는 노래 속에 등장하는 ‘죽음(Tod)’이라는 단어를 의미심장하게 발음하며 죽음을 앞둔 인간의 숙명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시적 언어와 음악이 만났을 때 빚어내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연출하는 순간이었다. 이 점은 나머지 리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랑과 죽음, 방랑과 비밀을 노래한 리트에서 햄프슨은 이중 자음의 발음에 각별히 신경을 써가며 깊은 호흡과 명확한 프레이즈로 기쁨과 설렘, 좌절과 번뇌를 노래했다.
그는 마치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처럼 많은 몸짓을 썼다. 밀어붙이는 듯한 고음과 깊은 울림의 중간음, 음정적으로 불안한 저음 등 음역에 따라 고유한 개성이 최대한 우러나는 발성은 노래의 깊이를 더했다. 그는 노련하게 무대를 이끌었는데, 마지막 곡 ‘쥐 잡는 사람’을 부를 때에는 이마에 손을 대고 정말 쥐가 멀리 갔는지 확인하는 연기를 하며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의 여유 있고 유머러스한 태도는 연주 후에도 이어졌다. 그는 박수를 보내는 청중에게 “옆 마을에서 열리는 왕자의 결혼식 대신 내 리사이틀에 참석해주어 고맙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사실 그날은 모나코 카롤린 공주의 장남이 그슈타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날이기도 했다. 결혼식에 초대된 300명의 하객들로 그슈타트 팰리스를 포함한 시내 고급 호텔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그슈타트의 저녁 하늘에는 화려한 불꽃이 그칠 줄 몰랐다. 누구나 꿈꾸는 동화 속 이야기, 마법 같은 스위스의 겨울밤이었다. 그러나 그날 그슈타트 팰리스 호텔 연회에 모인 청중에게 진정한 왕자는 바로 토머스 햄프슨이었다.
맥박도 함께 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유재경·김윤지 듀오
그슈타트 페스티벌의 연주 시리즈는 차세대 연주자들을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1년부터 이어져오고 있다. 그해의 멘토로 지정된 연주자는 페스티벌 기간 동안 그슈타트에 머물며 여덟 팀의 신인 연주자들의 무대를 참관하고 격려한다. 올해는 불가리아 출신 피아니스트 아글리카 게노바와 류벤 디미트로프 듀오가 멘토로 참여했으며, 한국의 유재경·김윤지 듀오를 포함한 8개의 피아노 듀오 신인 연주팀이 초청되었다.
이 연주 시리즈는 신인들에게는 단순한 국제무대 연주회 이상으로, 사실상 콩쿠르에 가깝다. 신인들 중 단 두 팀에게만 화려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연주 활동을 펼친다. 우선 신인 연주자 여덟 팀 중 최고의 연주를 보여준 듀오에게는 프로 시엔티아 아르테 재단(Pro Scientia et Arte)에서 상을 수여하며 오닉스 레이블에서 음반 출반 기회가 덤으로 주어진다. 올해는 자매 피아니스트 리디야·사냐 비자크 듀오가 이 상을 거머쥐었다. 뿐만 아니라 페스티벌의 레지던스 작곡가인 베냐민 유수포프의 작품을 가장 잘 연주한 듀오는 페스티벌의 주요 후원자인 앙드레 호프만으로부터 상금 5천 스위스 프랑을 받게 된다. 올해는 홍콩의 차우 록 핑· 차우 록 팅 듀오가 5천 프랑의 주인공이 되었다.
유재경과 김윤지의 듀오 리사이틀은 2월 2일 그슈타트 교회에서 열렸다. 이들 듀오는 경쟁적으로 페스티벌에 참여하기보다는 청중과 함께 즐기고 싶었다고 밝힌 만큼, 편하게 와 닿는 곡으로 프로그램을 꾸렸다. 하지만 곡의 난이도 자체는 매우 높아서 그들의 기량을 뽐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W. F. E. 바흐의 4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C장조와 멘델스존의 ‘알레그로 브릴리안테’ Op.92에서는 저음 파트의 김윤지와 고음 파트의 유재경이 긴밀하게 주제들의 반복을 주고받으며 감칠맛 나는 음색을 잘 살렸다. 둘은 호흡을 맞추려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서로에게 잘 적응된 상태였다. 특히 지휘를 공부하고 있는 김윤지의 영향으로 이들은 평소 지휘자의 관점이 많이 반영된 오케스트라 편곡들을 즐기는데, 이번에도 스메타나가 스스로 편곡한 4개의 손을 위한 ‘몰다우’를 연주해 찬사를 받았다. 작곡가의 스코어를 면밀히 분석하고 관찰한 김윤지의 거시적인 통찰력이 돋보였고, 유재경의 수려한 아르페지오와 옥타브 타건이 귀를 사로잡았다. 필자 뒷자리의 영국 청중은 “마치 골인에 성공한 축구선수를 본 듯 시원했다”라는 표현으로 폭탄처럼 작열하는 그녀들의 음악성에 찬사를 보냈다.
타지키스탄 출신 레지던스 작곡가 베냐민 유수포프는 ‘과거의 문화’ 작곡 시리즈 중 ‘중국’이란 작품을 이들에게 주었다. 곡의 1부에서 이국적인 중국풍 5음 음계 멜로디가 인상적이었으나 2부로 접어들며 현대 작곡가로서 정체성이 모호해져 아쉬움을 남겼다. 포레의 유명한 모음곡 ‘돌리’ Op.56의 연주에서는 포레 특유의 세련된 관능미를 살리지는 못했으나 주제를 단정하게 풀어내는 방식만큼은 탁월했다.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춤곡’에서는 잘 훈련된 기교와 즉흥성, 그리고 둘의 호흡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몰아치는 호연을 보여줬다. 이들은 앙코르곡인 브람스의 ‘헝가리 춤곡’ 5번으로 마지막까지 청중에게 눈부신 흥분을 선사했다.
연주 후 만난 그녀들은 독주 무대보다 듀오 무대가 더 떨린다고 입을 모았다. 한 사람의 부족함을 다른 사람이 메울 수 있어서 든든하기는 하나, 한 사람의 실수가 파트너에게까지 악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로 다른 생활 반경을 가진 두 사람이 환상적으로 호흡을 맞추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묻자 “처음 출전했던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는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싸웠다”라고 털어놓는다. 시간이 지나 서로를 잘 알게 되면서부터는 점점 더 즉흥적으로 연주하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인다. 개인적으로 활동을 하다 듀오 연주차 다시 만나면 두 사람이 서로 다르게 발전한 점들을 발견하는데, 그것을 바로 듀오 연주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꼽았다. 듀오로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아직까지는 듀오를 전문적으로 하는 연주자들이 아직 많지 않은 탓에 잘 조직된 현악 4중주단처럼 스스로를 ‘듀오 팀’이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는 것. 하지만 그녀들은 예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점차 나아질 것이라며 고무적인 청사진을 펼쳤다. 실제로 최근 유럽에서는 전문 듀오 피아노 클래스가 많이 생기는 추세며, 콩쿠르 후원금도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글 배윤미(파리통신원) 사진 Miguel Bueno
김윤지(29세) 어린 시절을 모스크바에서 보낸 후 미국에서 줄리아드 예비과정을 거쳐 예일대에서 음악학을 전공했다. 예일대 졸업 후 하노버에서 피아노와 지휘 분야에서 활동하다 유재경을 만났고, 현재 맨체스터 대학에서 지휘 공부를 하고 있다. 최근 하프시코드 주자로 바소 콘티누오를 하는 데 즉흥적이지만 앙상블을 이끈다는 점에서 피아노 듀오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하며, 바로크 음악을 잘 연주하는 것이 좋은 연주자가 되기 위한 관문인 것 같다고 밝혔다. 노래와 언어를 좋아하는 그녀는 오페라를 좋아해 성악가들과 일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유재경(30세) 언어에 재능이 많다. 서울대 2학년 재학 중에 독일로 건너가 3년간 하노버에서 체류했고, 현재는 맨체스터에 살고 있다. 김윤지의 표현에 의하면, 그녀는 “무대에서 더욱 자유로운 표현을 하고 대담함과 위험한 것을 좋아하는 연주자”다. 뵈젠도르퍼 피아노 콩쿠르 당시 만난 피아니스트 아르헤리치가 우상이며, 그 외 루빈스타인·호로비츠처럼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