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 독일 뮌헨 출생
1870 6세 나이에 첫 피아노 작품 작곡
1885~1886 마이닝겐 궁정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1919~1924 빈 슈타츠오퍼 총감독
1899~1913 베를린 슈타츠오퍼 총감독
1949 85세 나이로 사망
목관악기의 선율이 거센 물살처럼 요동치고 트라이앵글의 울림은 물방울처럼 반짝인다. 오보에가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내자 거대한 윈드 머신이 바람을 일으키고 팀파니와 베이스 드럼은 천둥이 된다.
지난 2월 15일 쾰른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듣는 동안 필자의 눈앞에는 알프스 산의 장관이 펼쳐지는 듯했다. 이쯤 되면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그려낸 풍경화’라 해도 좋으리라. 관현악법의 대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오케스트라로 표현해내지 못할 소리는 없는 것 같다. 알프스 산의 다양한 풍경을 소리로 포착해내는가 하면, 니체 철학의 난해한 개념을 35분짜리 교향시로 요약해내고, 장난꾸러기 틸 오일렌슈피겔이 벌이는 소동을 생생한 음향으로 재현해냈으니 말이다.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이한 슈트라우스의 작품이 다시금 콘서트홀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지난 1월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를 선보인 데 이어 2월에는 쾰른 필하모닉이 ‘알프스 교향곡’을 연주했고, KBS교향악단과 서울시향 모두 슈트라우스의 ‘돈키호테’를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새롭게 임헌정을 예술감독으로 맞아들인 코리안심포니는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연주를 계획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색채감이 특히 돋보이는 슈트라우스의 관현악곡들은 ‘귀를 위한 최고의 성찬’이라 불리는 만큼 올해 음악 애호가들의 귀도 더욱 즐거워질 것 같다.
음악 가족이 낳은 신동의 음악 수업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이미 여섯 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니 모차르트 못지않은 신동이라 할 만하다.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도 매우 훌륭한 음악가였다. 그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뮌헨 궁정 오케스트라의 호른 수석 주자이자 당대 최고의 호른 연주자였으니 슈트라우스의 작품 속에서 호른이 그토록 멋지게 등장하는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어린 볼프강 모차르트에게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시켰듯, 프란츠 슈트라우스 역시 어린 리하르트에게 일찍부터 음악을 가르쳤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음악적인 가정환경을 본다면 모차르트보다는 슈트라우스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음악을 가르쳐준 인물은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슈트라우스의 어머니는 어린 리하르트에게 피아노 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아버지 프란츠와 함께 일하던 궁정 오케스트라의 하프 주자 아우구스트 톰보는 피아노 수업과 더불어 오페라의 여러 아리아 선율을 들려주며 리하르트의 음악적인 감성을 일깨웠다. 그뿐인가! 프란츠 슈트라우스의 사촌이자 궁정 오케스트라의 악장인 베노 발터는 리하르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후에 그의 바이올린 곡을 초연했다.
11세가 되던 1875년, 슈트라우스는 본격적으로 음악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마이어 선생에게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배운 그는 슈만과 멘델스존풍의 초기 작품들을 작곡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이미 140여 작품을 작곡한 작곡가로 성장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모차르트의 음악에 강하게 끌렸던 그는 모차르트가 즐겨 작곡했던 관악 세레나데와 실내악 장르에 관심을 가졌고, 그의 초기 작품들 중에서도 여러 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가 단연 돋보인다. 결국 슈트라우스의 관악 세레나데는 청년 슈트라우스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주었다.
한스 폰 뷜로가 주목한 청년 작곡가
당대의 명지휘자 한스 폰 뷜로가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관악 세레나데’에 주목한 것은 슈트라우스로선 큰 행운이었다. 사실 이 작품을 알기 전까지 뷜로는 이 젊은 작곡가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 아마도 슈트라우스의 아버지인 프란츠 슈트라우스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뷜로가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초연할 때 호른을 연주했는데, 당시 호른 파트가 기술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며 연주를 거부해 뷜로를 화나게 했다. 바그너의 급진적인 음악을 매우 싫어했던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오케스트라 연습 도중 바그너의 서거 소식에 전 단원들이 일어나 애도를 표하는데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바그너의 음악을 알리는 데 열심이던 뷜로에겐 프란츠 슈트라우스의 이런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음악가를 알아보는 안목을 지닌 뷜로는 프란츠 슈트라우스와의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리하르트의 훌륭한 작품을 접한 이후 이 젊은이를 적극 지지했다.
1884년 11월 18일, 뷜로는 젊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자신이 맡고 있던 마이닝겐 궁정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넘기고는 슈트라우스의 관악기를 위한 모음곡 Op.4를 초연하게 했다. 20세 젊은 나이에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며 마이닝겐 궁정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로 무대에 선 슈트라우스는 뷜로의 지지에 힘입어 지휘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우선 뷜로의 후계자로서 마이닝겐 궁정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경력을 시작한 슈트라우스는 뷜로가 은퇴한 후 곧바로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뮌헨과 바이마르, 베를린과 빈을 중심으로 여러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거치며 명성을 얻었고, 지휘자로서는 최고의 지위라 할 만한 빈 슈타츠오퍼의 총감독 자리에 올랐다.
지휘자로서의 슈트라우스는 ‘명확한 음악’을 추구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슈트라우스의 지휘 영상을 보면 무표정한 얼굴로 정확하게 지휘봉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다소 무미건조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슈트라우스가 지휘자로서 얼마나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려 했는지,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여러 파트를 통제하며 악보의 정확한 재현을 중시했는지를 보여준다.
오케스트레이션의 달인
지휘자 슈트라우스가 정확하고 깔끔한 해석을 선호했다면, 작곡가 슈트라우스는 그 누구보다 다채롭고 풍부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유년기와 청년기에 주로 실내악과 가곡을 통해 작곡 기법을 시험한 슈트라우스는 20세가 넘자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의 여러 악기들을 음악적 표현의 도구로 삼기 시작했다. 슈트라우스는 넘치는 상상력과 오케스트레이션의 기교를 펼쳐보이기 위해 먼저 교향시를 선택했다. 정형화된 형식을 갖춘 교향곡보다는 철학이나 문학 등 어떤 이야기나 표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교향시가 슈트라우스에게 좀더 잘 맞았으리라.
1887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담은 교향시 ‘이탈리아로부터’를 시작으로 현란한 관현악의 걸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그는 20대 초반부터 최고의 작곡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슈트라우스가 24세 때 작곡한 교향시 ‘돈 후안’은 그야말로 관현악의 폭풍이라 할 만하다. 이 곡은 정말로 폭풍처럼 시작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는 ‘무자비하다’고 느껴질 만큼 빠르게 퍼부어대는 음표들의 폭격, 용솟음치는 에너지, 폭발적으로 솟아오르는 주제 선율은 돈 후안의 환락 세계를 그대로 담고 있다. 교향시 ‘돈 후안’ 이후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1895) ‘죽음과 정화’(189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96) ‘돈키호테’(1898) ‘영웅의 생애’(1898) 등의 교향시와 ‘가정 교향곡’(1903)과 ‘알프스 교향곡’(1915)을 통해 여러 악기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천재성을 입증했다.
때때로 슈트라우스는 탁월한 음향 효과를 위해 특수한 악기들을 사용하곤 했다. ‘알프스 교향곡’에선 바람 소리나 천둥 소리를 묘사하기 위해 윈드 머신과 선더 머신을 편성하는가 하면, 목장을 묘사하기 위해 카우벨을 이용하기도 했다. 또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에선 틸의 장난을 실감 나게 묘사하는 특수 타악기 래틀이 등장한다. 손잡이를 돌리면 톱니들이 나무판을 스쳐 지나가게끔 만들어진 이 악기는 틸이 시장에서 소란을 피우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악기에 대한 슈트라우스의 지식은 놀라울 정도여서 때때로 그의 지식은 실제 그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들을 넘어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슈트라우스가 다른 작곡가들이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희한한 악기들을 과감하게 편성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슈트라우스는 윈드 머신 같은 현대에 고안된 악기뿐 아니라 박물관에서나 발견되는 옛 악기들도 종종 사용하곤 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엘렉트라’에선 모차르트가 사용한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는 바셋 호른이 등장한다. 바셋 호른은 악기명과는 달리 호른이 아니라 일종의 클라리넷이다. 저음역이 확장된 일종의 저음 클라리넷인 이 악기는 특히 모차르트의 사랑을 받아 ‘레퀴엠’ 등에 편성되었으나 19세기 이후 음악작품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가정 교향곡’에 등장하는 옛 악기 오보에다모레도 바로크 시대에는 사랑받았으나 오늘날엔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다. 물론 슈트라우스의 작품은 새로운 악기의 시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슈트라우스는 1904년에 악기 제작업자인 헤켈이 만든 헤켈폰을 ‘알프스 교향곡’에 등장시켰고,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선 1886년에 뮈스텔이 파리에서 고안한 첼레스타의 음향을 강조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인생을 마무리한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젊은 시절에는 주로 화려한 교향시를, 40세 이후에는 웅장한 오페라에 헌신했던 슈트라우스는 생애 말년에 이르러 다시 ‘단순한 노래’로 회귀했다. 청년 슈트라우스가 ‘돈 후안’으로 새로운 교향시의 돌풍을 일으킨 지 60년이 지난 1949년, 85세가 된 슈트라우스는 만년에 이르러 단순한 ‘노래’야말로 음악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리라. 그는 그의 마지막 해에 훌륭한 소프라노이자 이상적인 반려자인 아내 파울리네와 함께 한 인생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완성했다.
슈트라우스의 인생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한 파울리네는 슈트라우스의 자전적인 교향시 ‘영웅의 생애’에서 애교 넘치고 여성스러운 이미지로 표현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887년 여름, 파울리네를 만난 슈트라우스는 그녀의 쾌활하고 정열적인 성격에 강하게 끌렸다. 처음엔 스승과 제자로 알게 됐지만 그들의 관계는 점차 연인 사이로 발전했고, 마침내 슈트라우스와 파울리네는 남편과 아내로 평생을 함께했다. 결혼 당시 슈트라우스는 ‘네 개의 노래’를 선물로 헌정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1949년, 슈트라우스는 그의 마지막 해를 다시 ‘네 개의 마지막 노래’로 장식했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중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붙인 마지막 곡 ‘저녁놀에’의 종결부를 들어보면 두 마리의 종달새가 부르는 노래가 플루트 2중주로 아름답게 표현돼 있다. 그 평화로운 선율을 듣고 있노라면 평온하고 아름다운 인생의 황혼을 떠올리게 된다. 슈트라우스가 두 대의 플루트로 표현한 아이헨도르프의 시구처럼, 서로에게 완벽한 동반자가 되어주던 파울리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두 마리의 종달새가 되어 저녁놀 속으로 사라졌다. 슈트라우스는 1949년 9월 8일 그의 별장에서 평안히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 파울리네는 그 이듬해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주목받고, 약관의 나이에 지휘자 겸 작곡가로 데뷔했으며, 교향시와 오페라의 대가로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음악을 부흥시킨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때때로 그의 관현악은 지나치게 악기의 효과 음향에 치중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슈트라우스만큼 연주자를 잘 알고 연주 기술을 이해했던 작곡가도 드물다. 슈트라우스는 베를리오즈의 저서 ‘관현악법’을 새롭게 편찬하며 이 책의 서문에 “위대한 작곡가들의 총보 연구, 여러 악기의 연주자들을 통해 정확한 테크닉·음역에 따른 음색의 비밀을 개인적으로 터득하는 데 그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을 적어놓았다. 그가 적어놓은 문장처럼 평생 음색의 비밀을 터득하기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슈트라우스는 ‘오케스트라’라는 악기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다채롭고 황홀한 음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탄생 150주년으로 슈트라우스의 빛나는 관현악곡들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올해는 오케스트라의 매력에 빠져들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다. 우리의 귀를 좀더 열고 슈트라우스의 음악 속의 온갖 악기 소리와 그 황홀한 색채감을 만끽한다면 오케스트라의 신비한 매력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될 것이다.
글 최은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