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음악당 개관과 함께 새로운 도약대에 선 통영국제음악제 봄 시즌.
노부스 콰르텟과 베셀리나 카사로바, 핏빛 복수를 다룬 샤리노의 음악극
‘죽음의 꽃’에 주목하자
통영국제음악당 개관 및 외국인 대표 임명으로 새 시대를 연 통영국제음악제 봄 시즌이 3월 28일부터 4월 3일까지 이어진다.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도남동 옛 충무관광호텔 부지에 자리한 새 음악당은 ‘그랜드 윙(grand wing)’이란 애칭 그대로 코에 닿을 듯 가까운 바다를 향해 거대한 두 날개를 펼치고 서 있다. 1,309석의 콘서트홀과 300석 규모의 블랙박스, 두 개의 공연장으로 이뤄진 새집에서는 어떤 집들이를 펼칠까. 그 첫 무대인 3월 28일 개막 공연 프로그램은 ‘움직임’과 ‘바다’로 요약된다. 알렉산더 리브라이히가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이하 TFO)가 윤이상의 ‘유동’(1964), 손열음 협연의 라벨 피아노 협주곡, 브리튼 ‘네 개의 바다 간주곡’, 드뷔시 ‘바다’를 선보인다. 개막 공연 이후에도 봄 시즌 내내 새 얼굴, 새 무대가 음악당 안에 파도칠 예정이다. 레지던스 아티스트와 새로운 음악극. 두 가지 키워드로 그 파도에 미리 몸을 실어본다.
레지던스 아티스트 ‐ 노부스 콰르텟·베셀리나 카사로바
올해 봄 시즌에서 굵직한 기둥 노릇을 할 두 주인공은 노부스 콰르텟과 메조소프라노 베셀리나 카사로바다. 지난 2월 한 달 사이에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콩쿠르 우승·지메나워 매니지먼트와의 전속 계약이라는 큼지막한 뉴스를 보내온 노부스 콰르텟은 4월 1일·3일 음악제의 후반부를 책임진다. 카사로바는 개막 이튿날인 3월 29일 알렉산더 리브라이히가 지휘하는 TFO와 협연한다.
성악 팬들에겐 이미 유명인사이나, 베셀리나 카사로바의 이름을 낯설어 하는 이들도 많다. 불가리아 출신의 카사로바는 선 굵은 카리스마와 고난도 기교로 대표되는 메조소프라노로 저음에서 중음, 고음으로 치솟는 패시지에서 나오는 폭발력이 장기다. 그녀의 실연을 여러 번 지켜본 본지 배윤미 통신원은 “마치 찬란한 세 명의 디바가 각기 다른 음성을 뽐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라며 호평했다. 다양한 음색만큼이나 레퍼토리의 영역이 넓어 바로크에서 현대의 작품들까지 아우른다. 29일 TFO와의 협연 프로그램은 모차르트 오페라 ‘티토 왕의 자비’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의 아리아들이다.
카사로바의 두 번째 통영 무대의 파트너는 노부스 콰르텟이다. 볼프의 ‘이탈리아 세레나데’, 슈베르트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베를리오즈 ‘여름밤’이 병치한 프로그램의 주제는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든 ‘밤’이리라. 노부스 콰르텟의 두 번째 무대는 3일 음악당 블랙박스에서 펼쳐진다. 베베른 현악 4중주를 위한 5악장, 베토벤 현악 4중주 11번 ‘세리오소’, 리게티 현악 4중주 1번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은 노부스 콰르텟의 ‘오늘’과 ‘취향’을 여실히 반영한다.
상주 작곡가 살바토레 샤리노의 음악극 ‘죽음의 꽃’
지난해 통영의 봄 시즌은 금박은박 오트 쿠튀르 드레스와 지상의 것이 아닌 듯한 모델들의 워킹에 ‘잠식’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의상을 맡은 대형 프로덕션 ‘세멜레 워크’를 무대에 올린 시도는 통영을 향한 대중의 궁금증에 오랜만에 불씨를 지폈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반면 하나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그 외 프로그램이 시들시들해졌다는 역기능도 지적됐다.
통영이 ‘음악극’이라는 장르를 놓을 수는 없다. 음악극이야말로 당대의 작곡가·연주가·성악가·미술가·안무가·연출가 등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동시대 정서를 담아내는 실험의 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큰 비용이 드는 만큼 현명한 작품 선정이 요구된다.
올해 통영이 선택한 음악극은 작지만 강하다. 티그리 만수리안과 더불어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상주 작곡가로 선정된 살바토레 샤리노의 ‘죽음의 꽃’. 3월 28일과 29일,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에서 공연된다. 작품의 이탈리아어 원제는 ‘Luci Mie Traditrici(배신의 눈빛이여)’이다. 1998년 독일 슈베칭겐 페스티벌 초연 때 ‘죽음의 꽃’을 의미하는 독일어 제목으로 상연됐다. 이탈리아어 원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여자의 배신과 남자의 복수를 담은 한 편의 잔혹 치정극이다. 샤리노는 제수알도의 그 유명한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실존 작곡가인 카를로 제수알도는 작곡가이기 전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이었다. 1561년 즈음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그는 1586년 사촌인 마리아 다발로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제수알도의 아내가 된 지 2년 후 또 다른 귀족과의 밀애를 시작해 2년 동안 관계를 지속한다.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제수알도는 어느 날 사냥을 가는 척 밖으로 나갔다가 몰래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그의 정부를 살해한다. 후대의 전기작가들과 문인들이 묘사한 그의 살해 장면은 한없이 잔인하다. 과장 혹은 순화된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확실한 건 제수알도의 살인은 음악사에 길이 남을 ‘가장 잔혹한 살해’라는 점이다. 제수알도는 직접 고용한 두 명의 남성을 이끌고 두 연인이 잠들어있는 침대 앞에 선다. 먼저 살해당한 사람은 마리아. 제수알도는 아내의 하복부를 수차례 찌르며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어!”라고 외쳐댔다고 전해진다. 이어서 아내의 정부인 공작이 죽임을 맞이했다. 시체를 치우기 위해 방에 들어간 하인들은 여자 옷을 입고 있는 공작의 주검을 발견했다.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은 마리아의 것임이 분명했고, 공작의 옷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옷이 깨끗하다는 점을 미뤄볼 때, 제수알도가 공작을 난도질한 후 아내의 옷을 입힌 것이 아니라 공작에게 여자 옷을 입는 수치심을 맛보게 한 후 살해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주검의 처리를 두고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신들이 왜 살해됐는지를 설명하는 문구와 함께, 두 구의 시체가 발가벗긴 채 공공장소에 ‘전시’됐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베노사의 풍문은 더욱 끔찍한 이야기를 전한다. 도미니크 수도승이 제수알도의 시간(屍姦)을 허용했다는 설, 두 구의 시체가 연금술 재료로 쓰였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사건 후 4년이 지난 1594년, 제수알도는 당시 이탈리아 마드리갈 음악의 중심지였던 페라라로 이주해 작곡에 매진한다. 죄를 씻기 위해 그는 두 가지 방법을 택했다. 첫 번째가 작곡, 두 번째는 자학이었다.
음악사 최악의 살인에서 영감을 받다
창작자들에게 이 실화는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나 매력적이리라. 작곡가라는 공통분모를 제수알도와 공유한 경우라면 더욱이. 이 실화를 바탕으로 브렛 딘은 현악기와 샘플러를 위한 작품 ‘카를로’(1997)를 썼고, 비슷한 시기 샤리노와 시닛케도 제수알도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동시에 주목한다는 사실은, 창작자에겐 대상의 매력도를 크게 감소시키는 조건이다. 제수알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작곡하고 있던 샤리노는 그 점을 깨달은 후 노선을 변경, 치코니니의 희곡과 롱사르의 시를 가미한 새로운 리브레토를 그 스스로 완성한다.
샤리노의 2막 오페라 ‘죽음의 꽃’에는 말라스피나 공작과 공작 부인, 둘 사이를 ‘관음’하는 그들의 시종, 어느 날 공작의 집에 찾아온 젊고 잘생긴 손님이 등장한다. 공작부인은 장미를 손에 들고 무대에 등장한다. 이 장미가 참으로 문제적인데, 유독 그 꽃송이가 거대하고 탐스럽고 핏빛이다. 거부할 수 없는 욕정에 사로잡힌 공작 부인과 매력적인 이방인 손님. 두 남녀는 제수알도의 실화에서처럼 공작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그 순서며 방법이 다르다. 아니, 마냥 다르지만도 않다. 실화만큼이나 잔인하고 처절하다.
음악적으로는 제수알도 당대인 16세기는 물론이고, 일본 전통 가무극의 휘어지며 이어지는 발성의 영향도 느껴진다. 이를 반영하듯 크리스티안 파데가 연출의 프로덕션에서 ‘거사’를 치르는 공작의 손에 일본도가 들려져 있다. 그가 어깨에 걸친 검은 가운 역시 일본풍이다.
작품 내내, 무대 위 가수들은 아리아·레치타티보·대사의 구분 없이 날카롭게 읊조린다. 기악 앙상블은 선율을 제시하기보다 극적 효과에 치중한다. 현악기의 극단적인 하모닉스는 관악기로 의심될 정도다. 플루트는 마우스피스에 강하게 바람을 불어넣어 “휙! 휙!” 공격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그저 키만 딸깍딸깍 거리며 긴장감을 높인다.
이번 통영 공연에서는 뤼디거 본이 지휘를, 박상연이 연출을 맡았다. 가장 궁금한 것은 공작·공작부인·손님·시종을 누가 맡을지다. 게다가 잘생기고 매력적인 ‘손님’은 카운터테너의 배역이다. 2월 현재 메조소프라노 백재은의 캐스팅만 공개됐다.
크고 탐스러운 핏빛 장미가 검게 시들고, 한 남자의 핏빛 잔치가 펼쳐지는 ‘죽음의 꽃’. 다 보고 나서 오히려 기분이 언짢아질까 걱정이라면, 그런 두려움조차 가산점으로 쳐주길 바랄 뿐이다. 두려움에 놓치기엔 너무나 매력적이다. 제수알도의 무시무시한 실화를 대한 작곡가들의 심정도 그러했으리라.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핏빛마저 씻어줄 통영의 푸른 바다가 있지 않은가!
글 박용완 기자(spirate@gaeksuk.com) 사진 통영국제음악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