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프와 키신를 한 지면에 담아달라는 편집부의 요청에 김주영 필자는 손사래부터 쳤다.
비교 불가의 두 피아니스트, 시프와 키신이 닷새 간격으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다
언드라시 시프와 예브게니 키신. 분명 지금 이 시간 지구 어딘가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을 현재 진행형의 대가들이지만, 혹시 빠트린 기억이 있을까 싶어 CD장을 더듬어 두 사람의 음반 전체를 꺼내보니 큰 가방 하나를 채우고도 남는 놀라운 양이다. 피아니스트가 남기고 가는 것이 음반만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이들은 그 어느 분야의 인물과 겨뤄도 나름대로 부지런하고 분주한 삶을 영위해왔음이 분명하다.
착실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맡은 바 임무(피아노)에 묵묵히 충실한 것으로 자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두 사람의 내한 공연이 닷새 간격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달을 맞았다. 한 지면에 두 사람에 대한 내용을 채우려고 하니 왠지 밀려드는 느낌은 다름 아닌 ‘부담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피아니스트는 필자의 일생에 결코 우선 순위를 따질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류현진과 오승환이랄까. 좋든 싫든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비슷한 지역에서 공부를 했으니 키신은 내가 피아니스트로 선발 등판할 때부터 롤 모델이었으며, 어지러운 해석과 갖가지 음악 외적인 개념에 휘말릴 때 피아노 소리를 듣는 귀를 ‘순수함’으로 정화시켜주는 구원투수 중 가장 방어율 좋은 피아니스트가 시프다.
남다른 손 모양에 주목
리즈 콩쿠르·차이콥스키 콩쿠르·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두루 입상한 언드라시 시프는 그럼에도 ‘콩쿠르형’ 피아니스트로 분류되지 않는다. 콩쿠르형은 어떤 종류일까 생각해보면, 개인차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 비르투오소 스타일을 갖춘 피아니스트에 한정되는 듯하다. 현재의 온화한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20대 초반 그도 분명 가공할 비르투오소였다. 다만 그 기교의 종류가 달랐다고 보는 것이 옳다.
197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당시 실황으로 연주한 쇼스타코비치의 프렐류드와 푸가 D♭장조를 들어보면 그의 손재주와 명민한 두뇌 속도에 놀라게 되는데, 발 하나만 잘못 디뎌도 낭떠러지인 이 ‘위험한 다성부’에 몸을 던져 승부하는 모습에서 미래의 행보를 짐작하게 된다. 후문을 덧붙이면 당시 러시아 내에서 시프는 대회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꼬마였으며(상당한 동안이었다고), 근육질의 모험가 가브릴로프, 명민한 손가락과 스마트함을 갖춘 동양의 정명훈과 또 다른 개성의 ‘신통방통한’ 스타일로 심사위원들과 청중 양쪽에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놀라움은 그 후 바흐를 정복해가는 시프의 손 모양이다. 손바닥이 건반에 닿을 듯 펴진 손가락과 그 끝부분은 서정적인 표현의 노래에는 적합하지만 복잡한 성부를 또박또박 가려내며 새기듯 연주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운데, 시프는 그 상식을 무너뜨린다. 결코 때리거나 찍어 누르지 않고 건반을 쓰다듬듯 연주하는 시프의 타건은 마치 사려 깊은 안마사의 손끝처럼 복잡하게 얽힌 텍스트들의 미로를 알기 쉽게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간 내한 무대의 바흐 연주에서 들려준 완전한 ‘노 페달’은 충격이었다. 조지 맬컴과 하프시코드를 공부하고, 스카를라티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들려줬던 청소년 시절부터 이른바 ‘좋은 소리’를 골라 내는 시프의 청각이 탁월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예브게니 키신 역시 데뷔 당시부터 부적절한 손 모양으로 많은 비판이 일었던 연주자다. 시프와 정반대로 그는 손가락과 손목을 건반에 거의 수직이 될 정도로 세우듯 연주하는 자세를 취했는데, 신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팔과 손가락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통해 손해 보는 연주나 해석이 나타나기도 했다. 차이콥스키·스크랴빈·라흐마니노프 등 러시아 작곡가들에서는 그 단점이 비교적 가려진 감이 있지만, 초기의 모차르트와 쇼팽 등에서는 다소 억세고 과도하게 무거운 터치가 과장된 감성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나타났던 것이다.
다행히 이런 성향들은 좀 더 큰 스케일의 협주곡들을 연주하며 완화되었다. 열네 살 때 안드레이 치스차코프 지휘의 모스크바 필과 협연한 프로코피예프의 협주곡 3번에서는 침착하고 당당한 터치와 나이에 걸맞지 않는 농염한 표현이 균형을 이루는 동시에 한 마디라도 그냥 지나가는 법 없이 작곡가의 깊은 의식 속 숨어있는 영감의 핵심을 정공법으로 공략하는 현명함을 보이고 있다.
신중함과 방대함, 상반된 디스코그래피 양상
한 시즌에 하나의 프로그램만을 소화하며, 프로 연주자로서는 비교적 적은 숫자의 연주만을 ‘조심스레’ 소화하는 예브게니 키신의 레퍼토리는 그의 행보만큼이나 신중하고 느린 확장 속도를 보인 듯하지만 그 안에서 살찌운 내공의 힘은 누구나 인정하듯 단단하다. 일견 검증된 걸작만을 선택하여 오랜 기간 연마하는 모습이지만, 그 안에서 곡목 선택만큼이나 신중한 선곡의 매치가 절묘한 앨범들이 눈에 띈다. 베토벤의 ‘월광’을 선택한 앨범에는 이 작곡가가 남긴 영감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브람스의 최대 기교를 자랑하는 난곡 ‘파가니니 변주곡’을 피날레로 설정해 극단의 소통을 꾀하는가 하면, 바흐-부소니의 토카타 C장조를 첫 곡으로 하여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을 메인 프로그램으로 정한 앨범에서는 전혀 배경이 다른 후기낭만의 대가 두 사람의 작품을 비교하는 한편 완충 작용을 위해 글린카-발라키레프의 가곡 ‘종달새’를 삽입하는 재치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비해 언드라시 시프의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는 그야말로 ‘시시콜콜’이라는 부사가 어울릴 정도로 문헌 전체를 망라하고 있는데, 그 다양한 ‘전곡집’ 모두가 작품과 작품 사이의 상관관계와 작곡가가 지녔던 의식의 흐름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다시 말해 앨범 전체를 구성한 이유가 전곡을 감상한 후에 밝혀진다는 뜻이다. 이는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소나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등의 대곡들뿐 아니라 바흐의 인벤션과 같이 소곡을 차곡차곡 실은 음반의 뛰어난 기승전결과 논리에서도 빛난다. 1991년 모차르트 생가에서 작곡가의 악기로 연주한 앨범에는 소나타 K545와 K570이 담겨 있다. 앨범의 균형은 사려 깊은 터치로 정성스레 연주한 론도·지그·미뉴에트 등의 소품들로 인해 비로소 잡힌다.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바흐의 협주곡집은 필자의 애청 음반인데, 다소 드라이하고 내성적으로 들리는 D단조 BWV1052의 표현이 뒷장에 수록된 BWV1057·1058 등의 비르투오시즘을 위한 배려와 포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감동이 배가되게 마련이다.
20세기 ‘이전’ 레퍼토리에 치중
1999년 5월 취리히 톤 할레에서 언드라시 시프가 라이브로 연주한 슈만의 유머레스크와 노벨레텐 등이 그 시작이라고 보인다. 스튜디오의 특성으로 다듬어진 앨범이 아닌 실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연주자의 의식에 따른 미세한 악상 변화와 거기서 나타나는 사운드의 특징, 시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청중과의 소통 문제에 대해 시프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일련의 베토벤 소나타 작업과 바흐 작품들의 재녹음을 통해 피아노 음향에 대한 다채로운 실험과 좀더 입체적으로 확대된 시대적 고찰 등을 결과물로 내놓고 있다. 특히 최근 발매된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에서는 각기 다른 시대의 악기로 작품을 비교하며 작곡가의 관념 속에 살아있던 피아니즘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어 흥미롭다.
예브게니 키신에게는 EMI 레이블과의 만남이 본격적인 변화의 계기였다고 하겠다. 비교적 최근 발매된 아슈케나지와의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집에서 그간 즐겨 연주해오던 레퍼토리에 대한 색다른 접근 방법이 눈에 띄었는데, 날카로움을 의식적으로 배제하는 동시에 프레이징과 다이내믹에 대한 솔직담백한 접근이 진정한 대가의 면모를 엿보게 했다. 30대 후반의 변신으로는 콜린 데이비스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작업으로 완성된 베토벤의 협주곡 전집을 빼놓을 수 없다. 짙은 서정성과 담대함을 갖춘 표현력이 어느 선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 그 한계점이 확대된 듯한 5번 ‘황제’도 개성 있고, 깔끔한 음상과 단정함으로 스케일을 축소시킨 협주곡 1번 등도 뛰어났다.
특별히 보수적인 이미지가 아님에도 20세기 레퍼토리가 많지 않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다소 아쉬운 점이다. 키신의 경우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역시 러시아 작품인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와 메트네르의 소나타 등이 다루는 레퍼토리의 전부인 듯하다. 오랜 연주 인생 동안 시프의 무게추도 20세기에 기울여져 있지는 않았다. 오케스트라와 솔로가 혼연일체로, 변화무쌍함과 재미를 전달하던 1996년의 버르토크 협주곡집(이반 피셰르 지휘)을 능가하는 후속타를 기대해본다.
각각 두 명의 작곡가에 집중한 내한 프로그램
이번 두 사람의 내한은 지금껏 이뤄왔던 그들의 음악성을 심도 있게 재조명하는 기회가 될 전망이다. 예브게니 키신이 선택한 슈베르트와 스크랴빈은 그에게 오래도록 친숙한 동시에 낯선 도전임이 분명하다. 10여 년 전 녹음했던 D960 이후 새로운 개척인 D850은 또 다른 색채의 슈베르트 소나타인 만큼 그 조형이 흥밋거리고, 소나타 3번과 그 외의 소품들을 소년시절부터 다뤄왔던 키신의 스크랴빈 소나타 2번과 에튀드 Op.8에서의 선곡도 흥분되는 기획이다.
멘델스존과 슈만을 무대에 올리는 언드라시 시프의 연주는 두 작곡가에 대한 총체적 음악관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하나였던 멘델스존의 상반된 성격의 작품 ‘엄격 변주곡’과 판타지를 그 자리에서 비교할 수 있는 순서도 반갑고, 슈만의 피아니즘 전체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곡 소나타 1번을 시프의 목소리로 경험할 수 있는 자리 역시 귀하다.
어떤 곡을 언제 연주해도 늘 상상 이상의 즐거움과 생각할 거리를 선물하는 신구 대가들의 연주를 위해, 음반장의 공간과 내 감동의 공간을 더 많이 비워놔야겠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