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이들의 내한 공연 둘째 날은 김선욱 협연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말러 교향곡 1번으로 채워졌다. ‘김선욱의 프로코피예프’라는 조금 낯선 조합 속에서, 피아니스트는 마치 엄청난 분량의 업무가 밀려 있는 전쟁 통 같은 사무실에 짠 하고 나타나 차곡차곡 모든 일을 다해내는 능력만점 부장님으로 분했다. 무슨 이런 어이없는 비유인가 싶은 독자님들을 위해 이제부터 설명을 하자면… 개인적으로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을 때마다 어디론가 아주 처절하게 질질 끌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게다가 그 중간중간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자조(自嘲), 즉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과 조롱까지 툭툭 던져지기 때문에 고행이 더욱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느껴진다. 듣는 내내 일종의 ‘예고된 패배감’을 맛보는 셈이다. 실은 이것이야말로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에 중독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김선욱 부장님’의 연주를 듣는 동안, 이 트라우마가 어느덧 사그라졌다. 기존 연주들에 비해 템포가 느려 몰아치고 깨지는 맛이 없다고 느낀 관객도 있었으리라. 그래서 어떤 피아니스트는 이 연주를 두고 ‘리스트적’이라고도 표현했지만 나는 이 정돈된 프로코피예프가 그저 좋았다. 눈앞에 쌓인 업무가 김부장님의 지시에 따라 아주 체계적으로 처리되어가는 쾌감을 맛봤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를 통해 음악의 건축미를 체득하고 그 치밀한 아름다움을 깨달은 김선욱이 잘 짜인 틀의 프로코피예프를 선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흥미롭게도 연주 후 무대 뒤에서 만난 김선욱 스스로는 “매우 몰입해서 본능적으로 연주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의외의 프로코피예프에 이어, 예상을 확 깨는 새로운 말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길고 긴 프레이징의 말러 교향곡 1번은 처음이다. 수많은 섹션의 조합과 조합으로 이뤄진 이 작품에서 ‘격정의 클라이맥스’라고 불릴 만한 부분은 한두 곳이 아닌데, 실상 클라이맥스가 와도 흥분할 수 없을 만큼 하딩의 말러는 응축 없이 그냥 흘러, 흘러, 흘러갔다. ‘이쯤에서 한 번 끊고 가겠지’ 싶을 때마다 ‘아니거든, 더 이어지거든’이라고 놀리듯 음악은 천연덕스럽게 이어졌다. 과장하자면 거의 한 악장 단위의 프레이징이었다.
이렇듯 길고 긴 호흡을 한 사람이 아닌 오케스트라 전 단원이 같이 유지하기 위해, 실은 그곳에 ‘나노’ 단위의 제어가 있었으리라 확신한다. 철저히 제어하고, 지시하고… 그 지시 받은 바를 단원들이 이뤄내지 못하면 긴 프레이징 안에서 앙상블이 맞을 수 없는 노릇이다. 놀랍게도 런던 심포니 단원들은 하딩의 그 조밀한 단위의 지시를 완벽히 이해하고 실현했다. 눈을 감고 들으니 그 노력과 노련은 더욱 생생히 다가왔다. 현악주자들은 지휘자가 수없이 추가한 끝도 없는 이음줄과 붙임줄을 악착같이 이어냈다. 너무 악착같아서 감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다. 목관·금관·타악의 각 주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긴 호흡 속에서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강렬한 단편들은 하딩이 원하는 딱 그 음형으로 그려졌다. ‘조밀함’이 있어 ‘거대함’이 가능한 공존. 브루크너를 연상시켰다. 브루크너 교향곡을 연주하는 바이올린 주자의 심정이 마치 거대한 우주의 먼지 하나 된 느낌이라는데, 하딩의 말러를 함께 채워가는 런던 심포니 단원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한 악장 단위의 길고 긴 프레이징에 간헐적으로 터지고 또는 엄청난 속주로 휘몰아치던 하딩의 말러. 익숙해지기보다 차라리 그것을 감내하고 있을 때,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지루한데 잠은 안 온다! 호기심에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분명 거기 뭔가 있을 테고, 실제 있었으니 지루해도 잘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지루하지 못했다.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정말 많은 ‘말러’가 존재할 것이다. 이날 하딩과 런던 심포니는 우리가 몰랐던 수많은 말러, 그중 하나를 들려줬다. 하딩이 그렇게 헤집고 사라진 자리에 오롯이 남은 것이 ‘하딩’이란 사실도 흥미롭다. 기진맥진 긴긴 말러를 듣고 아리송한 마음으로 콘서트홀을 나서는 바로 그 순간, 하딩이 다른 작품을 어떻게 해설할까라는 호기심이 벌써부터 머릿속에 가득 차고야 말았다.
박용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