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억울해요. 저도 잘 소개하고 싶은데···.”
‘객석’ 2월호에 실린 클라리네티스트 박정환(코리안심포니 수석) 편을 본 최나경이 말한다. “저도 이렇게 플루트 가족을 다 모을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알토 플루트는 대전에 있고, 피콜로는 빈에 있어서···.”
그럼에도 인터뷰를 강행한 이유가 있다. 첫째, 신시내티 심포니 부수석과 빈 심포니의 수석을 역임한 후 솔리스트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지금, 그녀의 손에 쥔 한 대의 플루트만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둘째, 지난 2월 그녀가 서울시향과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편곡 버전을 선보였던 날 앙코르였던 이언 클라크의 ‘줌 튜브’가 끝났을 때, 플루트에서 나온 요상한 기계 소리와 괴상한 바람 소리에 관객들은 찬사를 보내며 한편으로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악기에 뭐 이상한 걸 단 것 아닌가? 어디서 MR 튼 거 아냐? 그래서 그녀의 악기를 살펴보기로 한 것. 셋째, 봄이 오는 4월, 최나경은 가슴 설레게 하는 ‘봄 처녀’ 같으니깐! 그래서 ‘객석’의 남성 팬들을 위해서!
우리는 ‘최나경’ 하면 그녀만의 독특한 무대를 선뜻 떠올리게 된다.
“제가 20세기 음악을 많이 연주하는데 알고 보면 플루트 레퍼토리의 반 정도가 20세기 곡이에요. 한국에서는 잘 연주가 안 되죠. 예를 들어 C.P.E. 바흐·모차르트·드비엔, 그 다음으로는 이베르·닐센·졸리베 등으로 이어져요. 그 중간이 거의 없죠.”
국내 오케스트라들은 유독 20세기 레퍼토리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 오케스트라는 지금까지 단 한 곳도 없었다고.
편곡과 연주에 있어서 ‘최나경 표 레퍼토리’와 ‘최나경 표 연주’를 선보이고 있는 그녀는 플루트를 놓고 설명할 때는 꼼꼼한 성격의 기술자 같았다. “바이올린의 경우는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같은 명기가 자리 잡고 있죠. 그래서 최고의 기준이 명확히 있는데 플루트는 매해 달라져요. 마치 자동차 같죠. 해가 갈수록 기술이 높아지고, 제작사끼리 경쟁이 붙곤 해요. 레이싱 카가 정비소를 들른 후 레이싱을 가듯 플루트도 그렇게 해야 해요. 기술력에 따라 발전 가능성이 무한한 악기죠.”
최나경의 ‘아리랑’ 서울시향과 협연이 있던 날, 최나경은 두 번째 앙코르로 변주를 넣은 ‘아리랑’을 선보였다. 곡이 탄생되어 최나경의 플루트에 담기기까지 수많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사연이 있다.
“변주보다 테마가 잘 들려야 하는데, 친구가 도와준 대목들은 어느새 쇤베르크의 옷을 입고 있는 거예요.”
다시 쓰고 또 고쳐 쓰는 작곡가와 “완벽주의자” 최나경이 일군 최종 악보는 한국행 비행기가 뜨기 전 최나경의 손에 쥐어졌다. 직접 그린 악보는 아리랑의 맛을 더 살리기 위해 최나경이 비행기에서 수정한 부분이다. 많은 악보들은 아이패드에 담아 가지고 다닌다. 사진에 보이는 김솔봉 작곡의 ‘Sacred Meadow’는 지난해 교향악축제에서 강남심포니와 협연했던 곡이다.
관악기 주자의 굳은살 손가락의 굳은살은 현악주자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스마트폰 속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을 보니 붉게 달아오른 화산구가 떠오른다.
“연주 시 마찰이 많은 부분인데, 연습을 많이 하면 검지 부분에 굳은살이 튀어나오고 빨갛게 돼요.”
숙녀의 가방 속 숙녀의 가방 안을 궁금해 하는 것은 실례지만 ‘객석’의 독자를 위해서라면! 우리의 ‘친절한 나경 씨’는 “얘네 오늘 횡재하네요. 이렇게 사진도 찍고”라며 문을 연다. 악기에 묻은 지문과 땀을 닦는 수건, 연필과 볼펜, 나사를 조이는 미니 드라이버와 귀마개가 보인다. 비행기를 “도서관”에 비유하는 그녀에게 귀마개도 중요한 물건 중 하나다.
“이건 사인펜이에요. 길거리에서 사인해달라는 사람들을 위해서.”(웃음)
‘유튜브 스타’이기도 한 그녀의 인기가 느껴진다. 연주 시 평소보다 입술을 팽팽히 당겨야 하기에 플루티스트는 늘 촉촉한 입술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립글로스도 필수품이다. 실제로 인터뷰 중간 악기를 연주하다가 갈라진 입술 사이로 선연한 피가 흘렀다.
스트라우빙거 플루트
최나경이 사용하는 플루트는 데이비드 스트라우빙거 제품이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제작한 것으로 2012년 빈에서 구입했다.
“보통은 자기 회사의 악기를 홍보하면서 사용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와요. 이 악기는 제가 직접 불어보고 소리가 좋아서 구입했는데, 며칠 뒤에 전액 환불을 받았어요. 그때, 천천히 할부금을 갚고 있을 때였는데 행운이었죠.”
그때를 회상하는 최나경은 환불을 받았을 때마냥 싱글벙글이다.
금이냐? 은이냐?
플루트는 나무로 된 목관악기로 분류된다. 원래 나무에 구멍이 나 있던 악기는 오늘에 이르면서 수많은 키를 장착하게 되었고, 몸체 또한 나무에서 은이나 금으로 대체되었다. 최나경의 플루트는 멀리서 보면 금빛을 띠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색과 은색이 오밀조밀 섞여 있다. 바람이 스치고, 고이는 부분이 은이냐 금이냐에 따라 소리가 많이 달라진다.
재스민 백 그녀의 영문명인 ‘재스민 최’를 따서 이름 붙인 일명 ‘재스민 백’이다.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함께 수학한 친구가 악기가방 회사를 론칭하면서 제작한 것이다. 최나경을 상징하는 작은 로고가 담긴 라벨도 달려 있다. 최나경의 홈페이지를 통해 국내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립 플레이트 입술이 닿는 립 플레이트는 사각형·타원형 등 다양한 모양으로 되어 있다.
“소리나 입술의 각도가 이상하게 느껴질 때 기술자에게 의뢰해서 이 부분을 깎아내요. ‘영 점 몇 미리’를 깎는 게 소리에 정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잘못 깎으면 그냥 완전히 망치게 된다고 보면 돼요. 그래서 플루티스트들이 헤드조인트는 ‘예술가의 영역’이라 해요. 연주자의 음악적 재능만큼 기술자로서의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는 거죠. 반면 몸체는 ‘기술의 신’이여야 한다고 해요. 한 치의 오차가 없어야 하거든요. 일본 제품들은 몇천 개를 찍어내도 오차가 없기에 이 부분에서 인정받고 있어요. 한편 유럽이나 미국 제품은 간혹 차이가 있어서 직접 불어봐야 합니다.”
키와 운지법 플루트에는 키에 구멍이 있다. 그래서 연주자는 키를 누름과 동시에 구멍도 잘 막아야 한다. 초보자의 경우, 구멍이 완전히 막혀 있는 클로즈 키를 쓰거나 초반에 플라스틱·실리콘으로 구멍을 막고 쓰기도 한다.
“구멍을 잘 막는 것은 음정과 관계돼요. 슬라이딩 주법은 구멍을 막는 양을 조절해서 다양한 소리를 내기도 해요.”
청소봉과 ‘17mm’에 담긴 비밀
플루티스트에게는 음정을 잡아내는 귀 외에도 하이에나의 시선이 필요하다. 봉의 손잡이 쪽을 보면 끝에서 약 17밀리미터 되는 부분에 표시가 있다.
“이 표시는 모든 봉에 다 있고, 어떤 봉이든지 길이가 다 똑같아요. 이걸 헤드조인트에 밀어 넣어요. 헤드조인트의 내부를 보면 반사판이 있는데 그게 실제 위치와 다르면 음정이 고르지 못해요. 이렇게 집어넣었을 때 그 눈금이 정확히 가운데 와 있어야 음정이 맞아요.”
패드와 톤 홀 플루트는 전체가 금속으로 제작되어 있는 듯하지만 키 안쪽에 숨어 있는 패드는 금속이 아니다.
“스트라우빙거는 사실 악기보다도 패드 제작으로 더 유명해요. 기존에 사용되던 펠트 패드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펠트는 누르면 푸욱 들어가는 느낌이 있는데, 스트라우빙거는 겉이 플라스틱 재질로 되어 있어 탄력 있게 움직여요. 근래 3~5년 사이에 여러 악기사들이 자기들만의 패드를 개발하며 치열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베리오의 ‘세쿠엔차’에는 키를 두드려 몸체를 울리는 주법이 있어요. 악보에 ‘Tab The Key’ 혹은 음표 대신 ‘x’라고 적혀 있는데, 이런 주법은 패드가 빨리 망가지는 원인이 되기도 해요. 그리고 여기 톤 홀 보이세요? 여기 솟아오른 부분인데 금이냐 은이냐에 따라 음색이 달라집니다.”
두 개의 풋 조인트
“‘시’가 나오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연주 때 주로 이것을 써요.”
플루트는 보통 피아노 열쇠 구멍에 위치한 ‘가온 도’가 최저음이다. 최나경은 그 아래 ‘시’까지 내려가는 풋 조인트를 주문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다.
헤드조인트와 크라운 “몸체만 수리를 맡기고 며칠 뒤에 가보니 새로운 헤드조인트가 놓여 있었어요. 오래전에 만든 것인데 빈의 플루티스트들이 한 번씩 사용해보고 소리가 잘 안 난다고 했대요. 창고에 묵히고 있었는데 그냥 꺼내서 끼워놓았다고 하더라고요. 헤드조인트는 무엇보다 연주자의 구강 구조와 잘 맞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소리가 굉장히 잘 나더라고요.”
최나경이 사용하는 헤드조인트는 오스트리아에서 활동 중인 악기 제작자 강병재가 만든 국산이다. 서울시향과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협연 시에도 이것을 사용했다. 본인만의 특징을 말해달라고 하자 크라운을 짚는다. 크라운은 음색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통 금과 은으로 되어 있고 다이아몬드로 ‘럭셔리’하게 장식하기도 하는데, 이건 놋쇠로 되어 있어요. 쭉 올라오다가 가격이 팍 떨어지는 거죠.”(웃음)
플루트의 하모닉스
바이올린의 하모닉스는 현 위에 손가락을 가볍게 대고 배음을 얻는다. 플루트의 하모닉스도 바람의 세기와 밀도를 조정해서 색다른 음향의 소리를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지법상으로는 ‘레’인데 하모닉스 주법을 이용해서 불면 부드럽고 투명한 음향의 ‘라’가 나요. 불면서도 머릿속으로는 4도냐 5도냐를 계산해야 하고요. 하모닉스를 내려면 비브라토를 빼야 해요. 호른은 많은 음들을 하모닉스 주법을 통해 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악기죠. 그래서 플루티스트들은 호른 연주자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플루트와 바이올린 “어릴 때 드뷔시·브람스·차이콥스키·스트라빈스키가 플루트 곡을 썼으면 참 잘 썼을 거 같다는 생각에 억울했어요.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플루트 협주곡이 없는 게 아쉬웠죠! 그 억울함을 지금 편곡으로 풀고 있어요.(웃음) 이번에 협연한 멘델스존 곡은 숨 쉴 전주도, 간주도, 악장 사이도 없었던 난곡이었어요. 지속음이 가능한 현악기의 보잉과 달리 플루트는 숨을 들이마셔야 하잖아요. 그때마다 자연스레 끊어지기에 숨 쉬는 대목을 많이 고민했죠.”
2013 교향악축제에서 강남심포니와 선보였던 생상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는 물론 서울시향과 선보였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모두 최나경이 편곡한 곡이다. 플루트에 다양한 악기들과 레퍼토리를 담아보기로 결심한 것은 커티스 음악원 재학 시절이었다. 그때는 “누가 들어도 똑같이 할 것”을 내세웠다면 지금은 “음악적으로 말이 되는 것”과 “플루트이기 때문에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중점에 둔다고. 특히 현악 레퍼토리 편곡 시 중요한 것은 ‘숨’이다.
공연장에 뜬 제트기 서울시향과 협연 시 첫 번째 앙코르는 이언 클라크의 ‘줌 튜브’였다. 최나경은 노래를 부르거나 괴성을 질렀고, 취구에 바람을 거칠게 불어넣으며 비트박스까지 선보였다. “어떤 운지법을 잡았을 때 이상하게 두 음이 나올 때가 있어요. 그걸 작곡가가 파악해서 그 운지법을 음표마다 적어놓았죠. 배음을 내는 ‘하모니스’는 물론 ‘멀티포닉스’는 음과 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껴 있는 배음을 끄집어내요. 여기에 ‘싱 앤드 플레이’ 주법이 더해지면 배음 위에 연주자의 목소리까지 얹어지니 세 개의 화음을 동시에 내는 거예요. 플루트에는 정말 다양한 주법들이 있어요. 이 악기만의 ‘자유’와 ‘특권’이 있다고 생각해요.”
입에 플루트를 가져간 최나경. 갑자기 제트기 소리가 난다.
“이건 ‘제트 휘슬’이라고 해요. 공기를 세게 빼내야 하고 최대한 ‘시끄러운’ 휘슬이 되도록 해야 해요. 그리고 이건 기차 소리! (삑! 삑삑!)”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