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과 스크랴빈으로 신보를 발매한 임현정.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베토벤과 새로이 천착하게 된 두 음악가에 대한 긴 대화를 나눴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이 3월 10일 파리의 팔레 로얄 극장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라벨과 스크랴빈의 왈츠와 소나타로 워너에서 두 번째 음반을 출반한 그녀는 베토벤 소나타 29번 ‘하머클라비어’, 라벨의 소나티네, 그리고 쇼팽의 발라드 네 곡으로 독주회를 꾸몄다. 인터뷰는 3월 11일 튈르리 공원이 보이는 모리스 호텔에서 진행됐다.
길고도 윤기 나는 검은 머리에 명확한 이목구비를 지닌 임현정은 젊음과 건강미를 자랑하는 여성이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출반한 최연소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그녀는 콩쿠르나 연주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튜브에 올린 영상을 통해 현기증 나는 스타덤에 올랐다. 인터넷 스타가 된 후 EMI 측은 연주회장에서 그녀의 연주를 직접 들은 후 음반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다.
“너무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기 때문에 내 경우가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임현정은 자신이 좀더 흥미를 불러일으켰을 뿐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것이 ‘현상’일지 아니면 항구성을 지닌 ‘실체’일지의 질문이다. 워너 뮤직의 파리 홍보담당자는 “임현정은 이보 포고렐리치 같은 독특한 피아니스트”라고 설명했다. 그녀에게는 독특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이름조차 ‘HJ Lim’이라 쓰며 프랑스식으로 ‘아시 지 림’이라고 발음한다.
“제 이름 ‘현정’이 얼마나 예쁩니까! 그러나 서양인들은 발음하기 무척 힘듭니다. 그 예쁜 이름을 잘못 발음하느니 부르기 쉽도록 바꿨습니다.”
연주복도 단정한 검은 기모노 차림이다. 임현정은 “남성들은 모두 검은 스모킹을 입는데 왜 여성들은 화려한 연주복에 머리 스타일까지 신경 써야 할까요?”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담백한 스타일을 고집했다. 문학을 했어도 성공했을 만큼 뛰어난 분석력을 지닌 그녀는 소설을 읽듯 유창하게 말했다. 우리는 베토벤·라벨·쇼팽의 작품을 연주한 지난밤의 독주회, 그리고 라벨과 스크랴빈으로 구성된 신보에 대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의 신보는 라벨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여덟 곡으로 시작해 스크랴빈의 소나타 4·5번으로 이어진다. 다시 라벨의 소나티네 세 곡이 배치된 후 스크랴빈의 왈츠와 ‘2개의 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벨의 ‘라 발스’로 마무리된다.
라벨과 스크랴빈에 몰두한 두 번째 음반
라벨과 스크랴빈의 소나타와 왈츠를 병행 녹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벨과 스크랴빈은 보이지 않는 어떤 세계를 그리는 것 같아요. 라벨의 음악에는 요정이나 요술사, 다프니스와 클로에 같은 전설적인 캐릭터들이 많아 환상의 나라를 그리는 것 같지요. 스크랴빈의 경우는 음악이 하나의 기도, 즉 마술적인 어떤 것으로 그려져요. 소나타 5번에는 ‘우리 인간 안에 존재하는 창조성을 끌어올린다’는 ‘엑스터시의 시’가 쓰여 있습니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영적인 세계로 승화한다고나 할까요? 반면 베토벤 소나타는 인간의 심연 깊이까지 파고든다는 점에서 다르지요.
그렇다면 베토벤에 비해 라벨과 스크랴빈의 세계가 피상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까?
꼭 그렇다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베토벤의 철학은 영적인 것을 표현할 때도 인간을 이야기하는데, 스크랴빈의 경우는 거의 신비주의로 연결됩니다.
베토벤이 당신의 친구였다면, 라벨과 스크랴빈은 어떤 존재인가요?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베토벤이 제 분신이라면, 이들은 꿈에 나오는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꿈을 꾸면 나오는, 무의식 세계 속의 캐릭터들이랄까요? 해피엔딩의 동화 속에 비극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들도 들어 있듯, 라벨의 작품은 환상적이고 영적인 존재들이 담겨 있는 어린이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벨의 ‘라 발스’는 동화적인 성격이 희박하지 않나요?
‘라 발스’는 어떤 면에서 ‘검은 동화’ 같아요. 원래 왈츠라는 것은 예쁘고 고상한 것인데, 빈의 아주 오래된 왈츠들에게 헌정하는 이 작품은 귀신들의 왈츠 같아요. 곡의 후반부로 갈수록 옛날의 왈츠가 겹쳐집니다. 어느 성에 갔는데, 20세기에 일어난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되어 귀신들만 남아 왈츠를 춘다고 상상해보세요. 여기서 귀신들의 춤은 옛날 사람들이 추었던 왈츠들의 환영이겠죠.
소나티네는 지금까지 말한 라벨의 작품들과는 조금 달라보이네요.
다르죠. 그의 나이 20대 후반으로, 젊어서 쓴 작품이니까요.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와 같은 정감으로 쓴 곡으로 매우 로맨틱합니다. 인간이 느끼는 현실적인 감성에 고착하고 있습니다. 망령 같은 게 드리워지지 않은 작품이죠.
스크랴빈 소나타 4·5번과 함께 묶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번 음반의 연결고리는 소나타와 왈츠입니다. 저는 그 밑에 젊은 시절과 후기 작품의 대비라는 또 하나의 고리를 만들었지요. 스크랴빈의 왈츠는 라벨의 소나티네처럼 아주 젊은 나이에 작곡되었고, 두 개의 소나타는 신비주의에 도달했던 그의 말년에 쓴 작품입니다. 스크랴빈의 왈츠는 라벨의 소나티네가 지닌 아주 여린 로맨틱한 감성과 무척 닮아 있어요. 라벨은 소나티네에서 왈츠로, 스크랴빈은 왈츠에서 소나타로 작곡을 해나간 것이지요. 라벨은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에서부터 몽상적인 세계로, 스크랴빈은 소나타에 이르러 신비주의로 각각 진보해나갔습니다. 소나타 5번의 경우, 로맨틱한 정서가 남아있지만 신비주의로 가는 과정이 역력히 보입니다. 6번에 이르면 완전히 신비주의적이지요. 이들의 진보를 관찰해보는 게 무척 신기한 작업이었습니다.
동양인에게 라벨은 어렵다고 봅니까?
라벨뿐만 아니라 모든 작곡가들의 음악에 표현된 감정들은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이라서 더 쉽고 한국인이라서 더 어렵다고는 보지는 않아요. 음악에는 인종차별이 없지요. 특히나 저는 인종차별이 ‘인류의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그 어떤 것보다 보편적이에요.
라벨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나 ‘라 발스’에서의 박동이 특징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저는 메트로놈적인 연주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왈츠에서 박동이 없으면 단무지가 없는 김밥일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리듬 상 특별히 강조하려 한 것은 없습니다. 리듬은 저 자신 안에 포함되어 자연적으로 울려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마치 말하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요.
임현정의 분신, 베토벤
전작 음반 재킷에선 부서진 피아노를 배경으로 한 파격적인 이미지가 당신의 베토벤과 잘 맞아떨어졌지요. 이번 신보의 경우 몽상적인 배경이 보이기는 해도 그리 강렬하지는 않네요.
베토벤 음악 자체가 파격적입니다. 당시 모든 음악의 법칙을 완전히 깼으니까요. ‘극단적인 충돌’이라고 제가 주제를 달았듯 그는 음과 양의 싸움을 극대화시켰어요. 베토벤 음악에서는 피아노가 해체되고도 남아요. 29번 ‘하머클라비어’를 제대로 치려면 현대 피아노가 지닌 역량으로도 부족합니다. 그 음악적 아이디어를 제대로 표출할 수 있는 악기가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입니다.
랑랑의 경우 청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베레좁스키의 경우 신체적 조건 때문에 연주하기 수월하단 이유로 비르투오소적 작품을 많이 연주한다고 하지요. 당신의 비르투오시티는 어디에 기인하나요?
음악이 요구하는 대로 연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신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음악이 요구하는 기준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너무 높으니까요. 천 년을 치더라도 못 따라갈 겁니다. ‘하머클라비어’를 제대로 치려면 이 세상의 모든 비르투오소들을 다 모아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저를 두고 비르투오소라고 한다면 그건 음악을 낮게 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비르투오소라는 것은 하나의 타이틀일 뿐이에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서 연주해도 음악이 요구하는 것을 따라갈 수 없는데 어쩌겠습니까? 저 자신이 비르투오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주회에서 들은 ‘하머클라비어’ 4악장은 정말 빠르더군요.
베토벤의 악보에 적힌 대로 쳤습니다. 푸가의 경우 적혀 있는 속도대로 치는 것이 불가능하니 느리게 치기 위해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변명들을 많이 늘어놓았어요. ‘귀가 먹어서’ ‘베토벤이 미쳐서’ ‘베토벤의 메트로놈이 고장 나서’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유들 말이죠. 베토벤은 자신의 신체적 한계 너머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려면 우리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합니다. 메트로놈 상 60초는 베토벤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60초입니다. ‘영웅 교향곡’도 마찬가지죠. 이 속도대로 오케스트라들이 연주하려면 너무 힘이 들지요.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고려하면 제가 좀더 노력해서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가가 도전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한가요? 안락한 인생은 예술가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역사도 공부하고, 작곡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4악장의 감7화음들은 쇤베르크의 음악처럼 비조성적으로 들리더군요.
매우 미래적인 음악입니다. 이 소나타는 그 어느 베토벤 작품과도 닮은 점이 없어요. 베토벤 마지막 4중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차 마시며 ‘아름답다’ ‘아니다’를 운운하게 하는 음악들을 증오했어요. 베토벤은 당시 인기였던 로시니의 음악이 차나 마시며 육체적으로 듣는 음악이라며 너무나 증오했지요. 귀족들 앞에서 피아노 치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왕자가 그의 궁전에서 피아노를 쳐달라고 하자 베토벤은 이를 거부하며 방문을 잠그고 숨어버렸어요. 방문을 부수고 베토벤을 끌어내려고 하니 베토벤은 의자를 들고 나와 그의 머리를 박살낼 뻔했다지요. 다행히 그를 말리는 사람들 덕분에 살인자가 되는 것은 면했지만요. 베토벤 음악에는 혁신 혹은 혁명, 또는 창조성을 일으키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본인과 비슷하게 베토벤을 치는 사람이 있나요?
‘하머클라비어’를 베토벤이 지시한 속도대로 친 아르투르 슈나벨입니다. 그는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처음 녹음한 연주자로, 제가 정말 존경하는 피아니스트입니다. 머리가 하얗게 쉰 나이에 녹음했지만 초기 소나타는 젊은 베토벤의 열정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고, ‘하머클라비어’의 경우 위험에 내몰린 채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사실 당신은 1930~1940년대 피아니스트들과 매우 비슷한 것 같아요. 전혀 상상하지 못한 패시지에서 루바토를 자주 쓰고, 획일성에 기인한 모던 피아니즘과는 템포도 달라요.
저는 메트로놈을 먹은 것 같이 치는 피아니스트가 절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들은 모두 20세기 초기에 활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9세기의 문화유산을 전승한 자들이죠. 코르토·슈나벨·라흐마니노프·호로비츠·치프라 등입니다. 그들은 작곡을 하며 편곡도 했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글도 썼고요. 스크랴빈·라흐마니노프·프로코피예프 같은 작곡가들의 청소년기를 책으로 읽으면서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그들은 16~17세 때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이 무척 뚜렷했고, 한 명 한 명의 특징이 강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가 치는 것은 라흐마니노프라고 알아들을 수 있고, 코르토가 치는 것은 코르토라고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을 만큼 각자의 개성이 아주 강했습니다.
그들의 연주는 비타협적이고, 오늘날처럼 획일화되는 경향이 없었어요. 당신 또한 어제 연주한 쇼팽 발라드의 클라이맥스에서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더군요.
발라드의 경우 클라이맥스는 코다에 있습니다. 발라드 1번의 코다에서 데카당스에 가까운 광기가 없으면 그건 실패한 연주일 겁니다. 발라드는 아름답게 느끼려고 치는 곡들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느끼는 고뇌와 괴로움, 광기가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쇼팽의 경우 정말로 고난을 겪은 인간이 아닙니까?
쇼팽은 광기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사실 광기가 없었던 작곡가가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라벨 같은 경우 사람 자체는 금욕적인데, 그의 음악에는 분명 광기성이 있습니다. 쇼팽의 발라드는 하나하나 보석 같은 직품이지만, 치기 어려운 위험한 곡들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버전을 남겨서 그 음악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정도로 평범해졌어요. 그래서 발라드 초기의 원초적인 정신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그나츠 프리드만이나 알프레드 코르토 같이 쇼팽과 가까운 시대에 산 이들의 연주를 들으면 매우 다릅니다. 콩쿠르라는 시스템 때문에 이런 보석 같은 음악들이 너무 평범한 작품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워너와의 다음 계획 역시 파격적인 것인가요?
지금 의논 중이라 구체화될 때까지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음악을 할 뿐입니다. 파격적인지 아닌지는 청중이 판단할 뿐입니다.
글 배윤미(파리 통신원) 사진 워너 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