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 타타르스탄 공화국 치스토플 출생
1949 카잔 음악원 입학
1963 젊은 작곡가 연맹 주최 콩쿠르에서 1위 수상
1977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인트로이투스’ 작곡
1980 바이올린 협주곡 ‘오페르토리움’ 작곡(기돈 크레머 초연)
1996 비올라 협주곡 작곡(유리 바시메트 초연)
2007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작곡(안네 조피 무터 초연)
지난해 말 ‘현대음악의 살아있는 전설’ 펜데레츠키의 내한에 이어, 올해 5월 ‘현대음악의 대모’ 소피아 구바이둘리나가 내한해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국제음악제의 초청으로 내한하는 구바이둘리나는 오는 5월 23일 서울음대 예술관 콘서트홀에서 그의 대표작 ‘성 요한 수난곡’에 대한 해설을 들려줄 예정이며, 26일에는 예술의전당 IBK챔버홀과 콘서트홀에서 구바이둘리나의 ‘루바이야트’와 ‘인트로이투스’ 등이 연주된다.
대중에게 호소력 있는 이 시대의 음악
종교적인 영감으로 가득한 구바이둘리나의 작품들은 기돈 크레머와 안네 조피 무터 등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에 의해 즐겨 연주되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크레머에게 헌정된 ‘오페르토리움’은 알반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꼽히며, 바이올린 협주곡 2번 ‘현재의(In Tempus Praesens)’는 무터의 음반으로 유명해졌다.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이 이 시대 연주자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녀의 음악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한 마디로 답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녀의 음악이 이 시대 청중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요소를 지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고전음악을 더 사랑하는 필자에게도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은 처음부터 강렬하게 다가왔다. 구바이둘리나의 ‘가상칠언’을 처음 듣고 깊은 충격에 휩싸였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한 일곱 마디의 말씀에 곡을 붙인 ‘가상칠언’(1982)은 쉬츠와 하이든 등 옛 작곡가들이 다뤘던 오래된 주제이지만, 구바이둘리나는 이 전통적인 주제를 현대적이고 참신한 음악으로 재해석했다. 그녀는 이 곡에서 아코디언을 이용해 매우 독특한 음향을 만들어냈는데, 아코디언의 놀라운 표현력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일곱 가지 말씀 하나하나가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 곡을 듣는 동안 필자는 음악에 너무나 깊이 빠져들어 마치 나 자신이 구원의 일곱 단계를 완성해가듯 깊은 명상 상태를 체험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조성음악도 아니고, 익숙한 악기 편성도 아니며, 심지어 우리 귀가 잘 알아듣기 힘든 미분음(반음보다 좁은 음)까지 들려오는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은 결코 쉬운 음악이라 할 수 없다. 때때로 그 음악은 우리 귀에 매우 낯설어 불편함까지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은 그 특유의 신비롭고 독특한 음향감각과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감으로 인해 현대인들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힘이 있다. 아마도 많은 연주자들과 음악 애호가들이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을 연주하고 듣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 성향을 지닌 아이
1931년 10월 24일, 소피아 구바이둘리나는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치스토플에서 태어났다. 엔지니어인 아버지 아스가트 구바이둘리나는 타타르인이고, 교사였던 어머니 페도시아 옐코바는 러시아인이다. 태생부터 타타르와 러시아의 피를 동시에 물려받은 소피아 구바이둘리나는 “반은 타타르인, 반은 러시아인인 것이 나의 운명”이라 고백하기도 했다. 그녀의 음악이 기본적으로 러시아 음악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유목민의 기질과 동양적인 신비를 담고 있는 것도 태생적인 이중성 때문이리라.
소피아는 어린 시절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음악적인 재능을 일찍부터 개발할 수 있었다. 소피아의 아버지는 특별히 음악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교양 있는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음악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고, 어린 소피아의 재능을 눈여겨보고는 일찍부터 그녀의 음악교육에 신경을 썼다. 1937년, 만 여섯 살이 되어 카잔에 있는 어린이 음악학교에 다니게 된 소피아 구바이둘리나는 피아노 레슨을 받으며 하루하루 음악의 신비함에 눈을 떠갔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녀의 연주는 매우 비범했던 모양이다. 당시 어린 소피아의 공개 연주에 대해 “그 작고 귀여운 손가락으로 쿨라우의 변주곡을 매우 깔끔하게 소화해냈으며, 그 상쾌한 톤이 귀를 즐겁게 했다”라는 평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마이클 쿠르츠가 저술한 구바이둘리나의 전기를 보면 구바이둘리나가 어렸을 때부터 종교적인 아이였음을 말해주는 일화도 읽을 수 있다. 어느 해 여름, 소피아가 아직 음악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녀는 가족들이 머물던 볼가 강 근처 어느 마을에서 그리스도 상을 발견했다. 당시 종교를 억압하던 당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작은 마을 한 구석에 그리스도의 상이 놓여 있었고, 어린 소피아는 그것이 바로 그녀가 기도를 드리던 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반복해서 “저 사람이 누구죠? 저 사람이 누구냐고요?”라며 되물었고, 소피아의 부모는 그녀가 걱정이 되어 빨리 짐을 싸서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본격적인 음악 수업과 초기의 주요 작품들
이토록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종교를 자연스레 하나로 융합시킬 수 있었던 소피아 구바이둘리나는 1949년 카잔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내면의 종교적 영감을 작품 속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작곡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몇 곡의 습작을 작곡했다. 고등학교 시절 작곡 레슨을 받기도 했으며, 음악원에 입학해서도 피아노뿐 아니라 작곡법을 배웠다. 1954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 니콜라이 페이코에게서 작곡을 배우고 비사리온 셰발린의 지도로 대학원 과정을 수료한 구바이둘리나는 1963년부터 프리랜서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젊은 작곡가 연맹에서 주최하는 콩쿠르에서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로 루스티코’(1963)라는 작품으로 1등상을 차지한 그녀는 영화음악 작곡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65년은 그녀에게 첫 번째 전환기가 되는 해다. 그해 구바이둘리나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하프와 더블베이스, 그리고 타악기를 위한 5개의 에튀드 Op.1이 완성된 것이다.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을 특징짓는 음향적 색채감을 이미 이 곡에서부터 느낄 수 있는데, 특히 악기의 음색을 조합하는 감각이 탁월하다. 또한 이 시기 작품인 ‘멤피스의 밤’(Night In Memphis, 1968)에서 약음기를 낀 트럼펫의 미묘한 음색과 부드러운 현악의 사운드는 매우 영적인 분위기를 전해주며, 이번 내한 공연에서도 소개될 바리톤과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위한 ‘루바이야트’(Rubaiyat, 1969)는 타타르인의 피를 물려받은 구바이둘리나의 동양적인 음악어법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루바이야트’란 말 자체는 페르시아의 4행 시집을 일컫는 말로, 구바이둘리나는 11세기에 활동한 페르시아의 오마르 카얌의 시집을 바탕으로 이 곡을 작곡했다. ‘루바이야트’ 이후 구바이둘리나는 아시아의 희귀 악기들을 수집하며 독특하면서도 신비로운 음향세계를 작품 속에 담아냈다.
새로운 음악을 위한 ‘입당송’
1977년 46세가 된 구바이둘리나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인트로이투스’(Introitus, 1977)로 새로운 작품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트로이투스’란 본래 가톨릭 미사 전례의 첫 번째 순서에 해당하는 ‘입당송’을 가리킨다. 전통적인 미사 전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그녀는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르 바히예프가 피아노 협주곡 작곡을 의뢰해왔을 때 ‘인트로이투스’란 이름으로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기로 했다. 이전에는 바순이나 트롬본, 여러 타악기 등 독주 악기로 각광 받지 못한 악기들에 관심을 기울이던 그녀는 드디어 자신이 가장 잘 다루는 피아노를 주된 악기로 삼은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했고, 이 곡은 그녀의 새로운 작품 시기를 여는 ‘입당송’이 되었다.
‘인트로이투스’는 피아노 독주와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곡으로 악기 편성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이 곡에서 음고를 미세하게 조정한 ‘4분음’, 즉 2도 간격의 음을 4등분한 미세 음고를 선보이고 있으며, 이에 더해 반음계·온음계·5음 음계 등을 다양하게 사용했다. 그녀는 통상적인 음계 외에도 미세 음정까지 사용한 반음계적인 모티브들로 대단히 영적이고 신비로운 음향세계를 만들어냈다. 당시 이 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바히예프는 이 곡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트로이투스’는 평범한 피아노곡이 아니다.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선 대단히 비현실적이며 비물질적인 연주법이 요구되는데, 그녀는 이런 연주법을 매우 자연스럽게 구사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배워야 했고 익숙해져야 했다. 첫 번째 연주회에서 나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 곡의 연주에 성공했을 뿐이다.”
비현실적이고 비물질적인 음향. 물질계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겐 거의 불가능한 연주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구바이둘리나에게는 이것이 자연스러웠고, ‘인트로이투스’와 그 이후 작품에서 구바이둘리나 음악 특유의 비물질적이고 독특한 음향세계를 느낄 수 있다.
크레머와의 우연한 만남은
구바이둘리나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오페르토리움’을 탄생시켰고,
이 곡으로 인해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은
전 세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기돈 크레머와의 만남, 음악에 대한 헌정
1970년대 말 구바이둘리나와 기돈 크레머의 우연한 만남은 구바이둘리나의 음악 인생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1977~1978년 겨울, 구바이둘리나와 크레머는 음악회가 끝난 후 우연히 택시를 함께 타게 되었다. 그때 크레머는 구바이둘리나에게 자신을 위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하나 써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크레머는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을 그렇게 잘 알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대 작곡가인 알프레드 시닛케와 절친한 사이로 항상 새로운 곡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크레머가 구바이둘리나에게 새로운 곡을 작곡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크레머와의 우연한 만남은 구바이둘리나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오페르토리움’(Offertorium, 1980)을 탄생시켰고, 이 곡으로 인해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은 전 세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구바이둘리나는 피아노 협주곡 ‘인트로이투스’에 이어 다시금 미사 전례 중 하나인 ‘오페르토리움’, 즉 ‘봉헌송’을 작품 제목으로 삼았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것은 크레머의 바이올린 톤과 관련된다. 파가니니를 연상시키는 외모와 압도적인 연주 스타일을 선보이곤 하는 크레머는 대중에겐 기교가 뛰어난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로 통한다. 그러나 구바이둘리나는 크레머의 바이올린 톤에 주목했다. 한 음을 연주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음악에 복종시키고 그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는 크레머의 바이올린 연주는 구바이둘리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구바이둘리나는 음악에 헌신하는 한 예술가의 초상을 담아 ‘오페르토리움’이란 제목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완성해 기돈 크레머에게 헌정했다.
1981년 빈에서 구바이둘리나의 ‘오페르토리움’이 초연된 이후 크레머와 가까워진 구바이둘리나는 크레머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로켄하우스 음악제와 쿠모 실내악 축제 등 세계적인 음악제에 초청 받았고, 세계적인 명연주가들이 앞 다투어 구바이둘리나의 작품을 연주했다.
1980년대 이후 구바이둘리나는 여러 대표작들을 쏟아내며 작곡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가상칠언’(1982)과 ‘T. S. 엘리엇에 대한 경의’(1987), 현악 4중주 2번과 3번(1987), 현악 3중주(1988) 등이 계속해서 발표됐고, 1997년에는 유리 바시메트의 연주로 비올라 협주곡(1996)이 초연되었다. 2002년에 그녀의 대표작 ‘성 요한 수난곡’(2000)의 기념비적인 초연이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에도 ‘전갈자리 아래서’(2003)와 ‘변신’(Verwandlung, 2004) 등 구바이둘리나의 대작들이 연달아 발표되었다.
올해 83세가 된 ‘현대음악의 대모’ 구바이둘리나. 음악을 향한 그녀의 열정은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은 여러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위대함은 낯선 현대음악의 작곡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이 시대 청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점이리라. 올해 구바이둘리나의 내한을 계기로 국내 음악 애호가들이 이 시대의 음악에 좀더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글 최은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