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링과 그뤼미오의 동년배 연주자, 93세의 이브리 기틀리스가 내한한다. 20세기의 바이올리니스트들 중에서 음색만 듣고 알아차릴 수 있는 마지막 연주자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재작년인가, 우연히 유튜브를 검색하다 매우 연로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회 실황을 보게 되었다. 그는 놀랍게도 꽤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옛 거장’, 이브리 기틀리스였다. 영상 속의 기틀리스는 아흔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 비록 의자에 앉아서 연주하기는 했지만 — 내가 기억하는 그 날카로운 보잉과 독특한 음색을 여전히 들려주고 있었다. 밀스타인이 여든의 나이에도 매우 안정된 보잉을 유지했던 경이로운 전례가 있고, 이다 헨델이 80대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 현역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흔이라니! 지금은 까마득한 전설로 남은 셰링이나 그뤼미오와 동년배인 연주자가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그 후 그의 최근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와중에 뜻밖에도 내한 연주회를 가진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이브리 기틀리스는 20세기 바이올린 연주사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주류에서 벗어난 ‘위대한 이방인’이라고 부를 만하다.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들을 다룬 대부분의 책들은 그를 어떤 계보에 두고 평가를 내려야 할지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거나 아예 침묵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19세기 후반 이후 바이올린 연주의 흐름을 주도했던 러시아-유대계 연주자의 맥을 잇고 있는 비르투오소이면서, 이스라엘이 배출한 최초의 국제적 바이올리니스트이자 20세기 최대의 명교사 카를 플레슈가 길러낸 마지막 제자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또 아직도 독특한 전통과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 악파를 대표하는 연주자인 동시에 집시적인 자유분방함마저 간직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그는 ‘규정할 수 없는 연주자’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의 거대한 물결은 러시아와 폴란드·체코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이어졌는데, 1920~1930년대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또 다른 지류를 이루게 되었다. 1922년 당시는 영국의 위임통치령이었던 팔레스타인의 하이파에서 태어나 가장 먼저 국제무대에서 선풍을 몰고 온 선두주자가 바로 이브리 기틀리스였다. 한 세대 뒤의 펄먼이나 주커만·민츠 등은 텔아비브나 예루살렘의 음악원에서 뛰어난 바이올린 교사들로부터 견고한 기초를 닦을 수 있었던 반면, 기틀리스는 어린 나이에 유럽으로 건너가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열 살 먹은 소년 이브리의 연주를 들었던 거장 브로니스와프 후베르만은 파리로 가서 공부를 하라고 조언하며 실제적인 도움도 주었다고 하는데, 그 조언이 기틀리스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
파리에서 마르셀 샤이에와 파리 음악원의 명교수 쥘 부셰리에게서 배운 기틀리스는 사라사테부터 크라이슬러까지 수많은 선배 거장들이 그랬듯이 파리 음악원 1등상을 탔으며, 졸업 후에도 제오르제 에네스쿠·자크 티보 등 프랑스-벨기에 악파가 배출한 위대한 거장들을 모두 사사했다. 그의 연주 전반에 흐르는 섬세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이들로부터 받은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은 역시 카를 플레슈였다. 독일 악파의 깊이 있는 악곡 해석과 진지한 태도에 프랑스-벨기에 악파의 감각적인 음색과 기술적인 성취를 엮어 20세기 바이올린 연주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던 플레슈는 2년 동안 기틀리스를 가르치며 그가 대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기틀리스는 플레슈를 가리켜 “바이올린의 정신분석가”라 칭송하면서 그가 자신에게 “다양한 가능성의 기술, 그리고 개방적인 마음”을 알려주면서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이다 헨델·이프라 니만·아이다 스투키와 함께 플레슈가 배출한 마지막 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머물면서 공장 근로자나 군인들을 위한 연주회에 열성적으로 참가했던 기틀리스는 전쟁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독주자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기틀리스의 명성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위그모어홀 독주회 이후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으며, 1951년 파리 데뷔 후 곧이어 녹음한 알반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이 그랑프리 뒤 디스크 상을 수상하면서 전후 젊은 세대 연주자의 선두주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한 소련에서 연주회를 가진 최초의 이스라엘 바이올리니스트로 기록되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뤼미오처럼 그 역시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에서는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55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는 했지만 미국 무대에 잘 서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남미·소련에서 큰 사랑을 받은 반면 국제적인 지명도나 음반 녹음에서는 다소 손해를 보기도 했다. 기틀리스는 아흔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공개 연주회에 나서고 있으며, 80년이 넘는 연주 경력은 바이올리니스트로는 전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기틀리스의 가장 큰 미덕은 누구보다도 매혹적인 음색을 지닌 연주자이면서도 음악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아름답지 않게 연주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갖추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는 그의 첫 영웅이던 후베르만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강렬한 개성과 카리스마를 꼽을 수 있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에는 누구와도 닮지 않은 강인한 집중력과 불타는 기백이 흘러넘치는데, 때로는 개성이 지나친 나머지 다소 괴팍하거나 방종하게 보이는 경우마저 있을 정도며 실제로 초창기에는 그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확실히 기틀리스는 어느 곡이든 아름답고 매끄럽게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니다. 그러나 그 예술적 순수함과 청중과 교감을 이루는 능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20세기 중반 이후 바이올린 악파의 고유한 특징이 흐릿해지고 연주자들의 해석마저 점점 비슷해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독특한 개성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그리고 누구나 그의 해석에 승복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강한 개성과 음악 작품의 정서가 일치하는 순간에 느낄 수 있는 감동은 그야말로 각별하다.
한편 프랑스-벨기에 악파의 우아함에 어딘가 집시적인 느낌을 줄 정도로 뜨거운 정열을 가미했다는 느낌을 주는 그의 감각적인 비브라토는 20세기 초기에 활동했던 또 다른 ‘위대한 이방인’ 바샤 프리지호다를 연상케 하며, 우리 시대에는 비교대상이 없다. 아마도 그는 20세기의 바이올리니스트들 중에서 음색만 듣고 알아차릴 수 있는 마지막 연주자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기틀리스의 또 한 가지 미덕은 80대까지도 훌륭한 프레이징과 인토네이션, 손가락 놀림을 유지할 정도로 빼어난 기교를 가졌다는 점, 그럼에도 명인기적인 작품에만 몰두하지 않는 폭넓은 음악성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 그가 베르크·프로코피예프·버르토크 등 현대음악의 해석자로 명성을 날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데, 그의 음악적 관심은 클래식 음악에만 머무르지 않고 재즈·집시 음악과 대중음악(그는 존 레넌과 함께 작업한 일도 있다), 심지어 아프리카 민속음악을 아우른다.
이번 내한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대략 베토벤·모차르트·드뷔시의 소나타, 그리고 크라이슬러와 파가니니의 소품을 들려준다고 한다. 그의 고전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반가운 기회인데다 프랑스 악파의 일원이자 당대 최고의 파가니니 해석자 중 한 명으로 꼽혔던 기틀리스의 연주 경력을 골고루 담아낸 프로그램이라는 느낌이다. 이 위대한 이방인이 펼쳐낼 무대에서 과연 어떤 것을 보게 될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연주회를 찾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이브리 기틀리스 내한 공연 5월 25일 LG아트센터
글 이준형(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Bertrand Langlo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