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마무리 연습을 하는 중에 간혹 먼지가 보이더라도 절대 ‘대청소’할 생각 말고, 그저 빗자루나 먼지떨이로 살짝 쓸어내기만 하라.” 자칫 작은 부분에 집착하여 ‘큰 그림’에 손상이나 변형이 나타날까 봐 필자가 학생들에게 해주는 조언이다. 작품의 내부를 구성하는 복잡한 미로에서 길을 잃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고 한 발짝 물러서서 큰 틀에서 보라는 의미도 있다.
이번 예브게니 키신의 독주회에서 예전의 모습과는 차별된, ‘한 발 물러선’ 현명함을 갖춘 연주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데뷔 이래 30년의 세월 동안 진지한 신인의 자세로 무대를 준비하는 성실한 피아니스트의 모습은 그 자체가 성장이다. 슈베르트와 스크랴빈로 채워진 이번 레퍼토리는 지금껏 다뤄온 프로그램과 구체적인 곡목은 다르지만, 오랜 기간 연구하고 다각도로 고민해온 흔적이 쌓여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재도전’의 느낌이 강한 구성이다. 신중하고 묵직하지만 전진의 발자국만 찍어온 키신이 과거 그와 가까웠던 작곡가들을 뒤돌아보고 새로운 접근 방식을 고려한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모습임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슈베르트 피아노 작품들이 그러하지만, D850의 D장조 소나타만큼 기교적 요소를 철저히 숨긴 채 악곡 형식과 드라마의 구축을 꾀해야 하는 작품은 없다. 다른 작품에 비해 뚜렷이 긴 프레이징은 필요치 않으나 나열식 구성으로 자연스레 커진 작품의 규모를 정리해야 하는데, 키신은 연주의 초점을 점층적으로 또렷이 만들고, 구성 요소의 원리들이 지닌 논리도 점차 그 목소리를 높여가는 방식을 택했다. 성큼성큼 내닫는 1악장과 다소 미온적인 우아함으로 마무리된 2악장을 지나 박진감 있는 리듬으로 스케일의 확대를 꾀한 3악장에 다다르니, 비로소 일견 무심한 듯 건조하게 지나쳐버린 듯했던 앞의 두 악장이 의도된 연출 속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유장한 흐름을 자랑하는 4악장의 대위법적 요소의 강조, 소박하면서도 상큼한 매력이 넘치는 작은 모티브들의 처리 등이 모두 고급스런 외피를 입고 피날레를 장식했다.
‘환상’이라는 부제를 지닌 스크랴빈 소나타 2번의 느린 1악장에서 키신이 들려준 음색은 어둡지도, 밝지도, 기름지지도, 거칠지도 않았다. 이 모든 요소들이 이상적으로 결합된 건강한 종류의 것이었다. 동시에 아직은 낭만성에 자신의 의식을 남겨두었던 초기 스크랴빈의 상상력을 표현해내기에 적절한 유연함도 갖추었다. 루바토는 절제되었으며 포르티시모는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만 등장했음에도 입체적인 효과를 뿜어냈다. 연습곡적으로 내달리기 쉬운 2악장의 프레스토 역시 고른 모양으로 정돈된 음상을 통해 셋잇단음표 하나하나 모두를 손에 잡힐 듯 극명하게 나타냈다.
스크랴빈의 12개의 연습곡 Op.8 중 일곱 곡이 어떤 기준에 의해 선택되었는지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위기의 연결, 악상이 전달해주는 판타지의 흐름, 그리고 청중의 몫인 상상의 스토리텔링 등 여러 가지가 고려되어 마치 쇼팽 프렐류드의 연속된 시상을 연주하듯 신중하게 진행됐다. 황홀한 아라베스크풍의 진행을 비장미로 풀어낸 2번, 소담스런 악상에서 피아니스트의 순수한 성품이 자연스레 나타난 8번, 음울한 에너지가 넘치는 옥타브의 홍수를 탁월한 기교로 담아낸 9번, 동료였던 라흐마니노프의 색채가 느껴진 11번의 연주까지. 키신은 작곡가의 뿌리인 차이콥스키와 아렌스키 등의 영향, 리스트의 극적 요소, 드뷔시의 상징성 등을 조심스레, 그러나 알기 쉽게 설명해냈다. 12번의 연주는 예의 그 신중함으로 인해 번쩍임보다는 파토스와 비극적 뉘앙스의 표출로 장식되었다. 키신이 지닌 러시아인의 정체성이 전방위적인 시야와 더욱 가공할 힘을 가지고 우리를 다시 압도할 날을 기대하게 해준 마무리였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사진 크레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