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천생연분’의 작곡가 임준희와 극작가 한아름

‘말’과 ‘음’ 사이에서 찾은 천생연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모두가 연분을 찾고 누구에게나 다 짝이 있다는 것이 바로 ‘천생연분’의 결말이다.
극작가 한아름은 흰 종이에 사랑의 언어를 새기고, 작곡가 임준희는 오선보에 사랑의 음표를 걸었다

바삐 가다가 길을 멈추게 한 봄의 벚나무. 바람이 불자 자신의 하얀 살점을 점점이 흐트려 주위를 새하얀 점묘화로 만든다. 그 나무 아래서 봄바람과 날리는 벚꽃 이파리를 맞으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듯해 더 소중히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삶이란 어떤 ‘순간’의 연속이다. ‘관혼상제(冠婚喪祭)’라는 말은 삶을 관통하는 이 순간들을 압축 지어놓은 말일 것이다. 특히 이중 자신의 인연을 만나는 ‘혼’이란 삶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리라. 오페라 ‘천생연분’은 그 순간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는 것을, ‘그 시간이 곧 네 삶의 봄이노라’고 말하는 오페라다.
200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에서 탯줄을 끊은 이 작품이 막을 내린 뒤, 작곡가 임준희는 난생처음 오페라를 써봤다는 기쁨에 잠겨 있는 한편 결론 부분에서 뭔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뭔가 해결이 안 된 느낌이었어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도망가는 것에서 정말 천생연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번에 한아름 작가를 만나면서 그 부분을 꼭 해결하리라 생각했어요.”
‘천생연분’은 오영진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를 토대로 이상우가 대본을 맡았고, 김철리와 양정웅의 연출을 거치며 한국 창작오페라사에 안착한 작품이다.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과 달리 원작은 신분이 다른 연인의 만남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하려 했고, 오페라 또한 이 의지를 올곧게 가져갔다. 그래서 ‘천생연분’ 속의 사랑과 연분이란 작가의 비판의식을 드러내는 도구라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3년, 작품의 산파 역할을 한 국립오페라단으로부터 한아름은 개작과 각색을 의뢰 받는다. 하지만 순간 망설였다.
“새로 쓰면 몰라도 있는 걸 바꾼다는 건 참 어려워요. 남의 살림 받아다 그중 쓸 만한 건 추스르고, 아닌 건 버리는 식이죠. 버린 건 사람들이 “쓸 만한데 왜 버렸어?”라고 하고,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은 ‘그거 왜 써 넣었어?’ 하는 식이죠.”
하지만 국립오페라단은 그녀에게 ‘모든 걸 새롭게 해보고 싶다’라는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리고 한아름이 서서히 펜을 든다. 말과 말 사이에도 천생연분이 있던가. 그녀의 펜 끝에서 노랫말과 대사들이 제 짝을 찾기 시작했고 결론도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렇게 이 작품은 사랑의 농도와 온도를 더 높게 끌어올려 봄기운 탱탱해진 5월에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오선보에 걸린 사랑의 음표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자. 눈을 감고 봄이 물든 조선의 평화로운 마을 풍경을 각자 펼쳐보시기를. 어디선가 마을 사람들의 경쾌한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마을사람들 연지 곤지로 수줍은 양 볼 물들이는 봄. 봄이 왔네, 봄이 왔어. 봄 처녀 시집가는 봄이 왔네. 김판서 댁 외동딸 서향아씨. 매화 같은 서향아씨 혼담 오가네.
무대 위에 서향이 있다. 조선 최고의 가문인 김판서의 손녀 딸. 그녀는 신분상승에 한이 맺힌 맹진사 댁의 몽완과 혼인해야 하는 처지다. 서향은 봄바람에 한숨 섞인 노래를 싣는다.
서향 혼례는 여자의 무덤. 정해진 신랑감 얼굴조차 모르고. 가슴에 품은 꿈은 이제 어쩌나.
갈 길이 멀다. 대본 속 장면들을 빨리 넘겨보자. 청나라에 유학 갔던 몽완을 맹진사가 불러들이고, 서향과 몽완은 각자의 혼사에는 관심이 없고 얼굴도 모르는 채 결혼해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한다.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애절하게 흐르는 오케스트레이션과 그 사이로 대금소리가 고개를 내밀고, 가야금이 그 소리를 홀리다가 튕겨낸다.
임준희 ‘천생연분’은 처녀와 총각이 짝짓기 하는 봄을 그린 오페라예요. 화사한 한복의 색채를 생각하며 오케스트라 음악을 만들었어요. 원래는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나오는 번호 오페라(Number Opera) 형식을 취해볼까 했습니다. 그런데 연결의 지속성을 위해 노래와 노래 사이에 끊임없이 음악으로 작품을 채웠어요.
송현민 첫 오페라였는데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임준희 가사의 한 글자조차 음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어요. 이번에 개작을 하면서 연극적인 캐릭터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연극적인 대사체를 많이 살렸죠.
다시 작품 속으로. 몽완이와 그의 종인 서동이는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 살짝 들여다보자.
몽완 그런데 도대체 서향이란 아이는 어떤 애일까? 내일 모레가 단오지. 모두들 단오 구경 나올 테니, 네가 중간에 다리를 좀 놓아봐라.
서동 내가요?
몽완 아니다. 좋은 생각이 있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거다.
한편, 다른 쪽에서 벌어지는 일 또한 만만치 않은 거사 중 거사다.
서향 좋다. 만나보자. 누군지 알아야 시집을 갈 게 아니냐.
이쁜이 글쎄요 어떻게 하죠?
서향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거야.

사랑? 꾹꾹 눌러 담아야 했다

사실 작가 한아름의 언어 속에 웃음과 행복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낯설다. 난 가끔 그녀의 작품을 보고 난 뒤 어땠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아름다웠어”라고 말한다. 특히 국립창극단의 ‘메디아’에서 메디아가 두 자식의 몸에 칼을 밀어넣는 장면은 정말 ‘아름’다웠다. 즉 ‘아름답다’는 것은 ‘한아름답다’는 것이고, 그녀의 작품에는 늘 운명을 집어삼키는 죽음이 거칠게 작품을 작동시키고 있었다.
한아름 맞아요. 저는 일단 죽이고 봐야 해요.(웃음) 고비고비마다 죽이고, 하나씩 죽이다가 몰아서 죽이고. 제가 웃음과는 거리가 좀 멀죠. 그런데 이번에는 몰리에르 식의 ‘소동극’을 전제로 했어요. 한바탕의 소동이 끝나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거죠. 그러려면 일단 소동을 일으켜줄 수 있는 씨앗을 물어다줄 제비가 있어야 하겠죠?
송현민 제비요?
한아름 네. 삼돌이가 그 역할을 합니다.
임준희 맞아! “둘이 변장을 했대요!” “둘이 사랑한대요!” “둘이 사라졌대요!”라면서 마을 곳곳에 소문을 퍼뜨리잖아.(웃음) 삼돌이는 이쁜이를 짝사랑해요. 이번에는 그 역을 훤칠한 테너가 맡았으면 좋겠는데?
한아름 아니, 뭐. 잘생기기까지는 않아도 되고.
송현민 그런데 나중에 서향과 몽완이 맺어질 때, 이쁜이는 서동이랑 맺어지지 않나요? 이거 뭔가··· 좀 덜 ‘천생연분’적인데요.
한아름 모두가 연분을 찾고 누구에게나 다 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오페라의 묘미입니다.
송현민 아니, 짝이 안 맞는데···.
일단, 작품 속으로 다시 들어가보자. 전통음악 중 흥겨운 선율 하나가 장구 장단에 몸을 맡겨 흥겹게 흐르기도 하고, 바이올린 소리와 포개지기도 하며, 금관악기의 힘찬 울림에 실리기도 한다.
송현민 지금 이 멜로디 ‘영산회상’에 들어 있는 ‘타령’ 맞죠?
임준희 ‘타령’은 ‘천생연분’의 라이트모티프예요. 끊임없이 변주되며 나옵니다. 이번에는 마지막에 ‘천’ ‘생’ ‘연’ ‘분’, 이 4개의 글자로 된 곡도 넣었어요. 사람들이 이 노래를 기억해줬으면 하는데···.
무대에는 단옷날의 진풍경이 펼쳐지고, 마을의 총각 처녀들은 설레는 마음을 담아 합창을 부른다. 저 멀리 서향과 몽완은 각각 이쁜이와 서동의 복장을 한 채 만나고 있다. 둘 사이로, 아니 4명의 선남선녀가 동시에 뿜어내는 설렘과 풋풋함이 진하게 날아온다.
송현민 저들 참 좋아보이네요. 그런데 그간 ‘왕세자 실종사건’ ‘영웅’ ‘메디아’ ‘오이디푸스’ 등 음악극이나 뮤지컬·창극 작업을 많이 해왔지만 오페라는 처음 아니었나요?.
한아름 저는 뮤지컬 ‘영웅’ 작업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어느 날에는 ‘있도록!’으로 끝나는 부분을 배우가 ‘하소서’로 바꿔달라는 거예요. 글자 하나에 작가와 연출가, 음악감독과 배우가 달라붙었어요. 고민 끝에 안 된다고 했죠. 안중근은 교수형을 당했기에 기도가 막혀서 ‘하소서’보다는 ‘있도록’의 ‘록’이 그 상황을 더 잘 표현한다고 했더니 배우가 주저함 없이 맞다고 하더군요. 온몸에 전율이 돋는 순간이었어요. 음악극이나 오페라 모두 협업이 중요해요. 그리고 공연을 하면 할수록 작가로서 한 발 물러서게 되는데 그것이 성장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지원사격자이지 내가 골을 넣으려 하면 꼬인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때 연출가한테 느낀 점을 다 이야기했죠.
송현민 한 작가의 감동스러운 깨달음을 들었을 때 연출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한아름 “이제 깨달았어? 그니깐 이제부터 내 말 좀 들어라.”

결국 사랑이더라

마을 사람들 합환주 한 잔으로 이성지합 천생연분 백년해로 하여보자. 사랑사랑 하여보자.
이쁜이로 변장한 서향은 서동으로 변장한 몽완과 눈이 맞고, 서향으로 변장한 이쁜이는 몽완으로 변장한 서동에게 반해 두 쌍의 연인이 탄생한다. 한편 이쁜이를 짝사랑하던 삼돌이는 우물가에 앉아 울고 있다. 그러던 중 한 처녀가 물을 떠서 삼돌이에게 내밀고 위로하듯 다독거린다.
삼돌이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 손길, 따뜻한 그 마음. 이뻐 이뻐 이뿌다 이뻐 이쁜이보다 이뿌다.
축복과 같은 두 쌍의 탄생을 목도한 김노인이 나와 “옜다! 받아라!” 하며 삼돌이에게도 족두리와 사모관대를 건넨다. 이로써 모두가 천생연분을 만난 것이다. 이렇듯 한아름은 흰 종이에 사랑의 언어를 새겼고, 임준희는 오선보에 사랑의 음표를 걸었다
.
송현민 작품 이야기는 끝났고, 끝으로 각자가 생각하는 ‘결혼’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임준희 결혼은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인연의 시작이 아닐까요? 사실 결혼을 하면 처음에는 서로 맞춰가느라 애를 많이 쓰죠. 제 남편은 화학을 연구하는 이인데, 저와 성향이 너무 달랐어요. 젊을 때는 너무 힘들었는데···.
송현민 지금은 천생연분이라 생각하세요?
임준희 그럼요. 하루만 안 봐도 보고 싶은데···. (순간 모두들 입에 웃음을, 눈에는 부러움을 가득 담았다)
한아름 우리는 ‘전우’라는 말을 써요. 전쟁터에서 지원사격을 하는 전우. (한아름의 천생연분은 이번 무대의 연출을 맡은 연출가 서재형이다)
송현민 와 닿네요. 가끔 전우끼리 총을 겨눌 때도 있죠.
한아름 (웃음) 그러네요. 예술가로서 창작에 숨이 찰 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끊임없는 위로를 해주고, 받을 수 있죠.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하면 위로와 동시에 협박도···. 그래서 결혼이란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거라 생각해요.
송현민 역시 와 닿습니다.
임준희 송 선생은 결혼했죠?
송현민 저는 아직···.
임준희 그런데 뭐가 와 닿는다는 거예요!(웃음)
이로써 얼른 인터뷰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이상욱(studio BoB)

극작가 한아름
한아름은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윤동주, 달을 쏘다’ ‘메디아’ ‘왕세자 실종사건’ ‘영웅’ ‘죽도록 달린다’ 등 연극·뮤지컬·창극 분야의 다양한 작품으로 호평을 받아왔다. 제16회 한국뮤지컬대상 극본상과 2012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수여하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작곡가 임준희
임준희는 ‘혼불’ ‘댄싱 아리랑’ ‘알타이 제전’ ‘천생연분’ 등 동서양 음악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된 작품을 발표해 주목받았다. 제30회 대한민국 작곡상에서 국악칸타타 ‘어부사시사’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립오페라단 창작오페라 ‘천생연분’ 줄거리
5월 31일~6월 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맹진사는 명망 높은 김판서와 사돈을 맺어 신분상승의 한을 풀고자 외동아들 몽완을 장가 보내려 한다. 김판서는 조선 최고의 갑부 맹진사 아들과의 혼인을 허락하지만, 김판서의 손녀 서향은 항상 바다 너머 세상을 동경한다. 이 둘은 상대방을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혼인할 수 없다며, 각자의 동무이자 하인인 서동과 이쁜이를 내세워 계략을 세운다. 단옷날, 이쁜이로 변장한 서향과 서향으로 변장한 이쁜이, 몽완으로 변장한 서동과 서동으로 변장한 몽완이 서로 만나는데, 이쁜이를 서향으로 아는 몽완은 마음을 고백하고 이에 놀란 서향과 이쁜이는 도망친다. 반면 서향을 이쁜이로 착각한 서동은 서향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며 새로운 세상으로 떠날 것을 제안한다. 서향은 혼례 날 떠나기로 약속하고 이쁜이에게 신분을 바꾸어 혼례를 치르자고 제안한다. 혼례 날, 맹진사와 몽완은 내내 희희낙락이고 돈 때문에 손녀를 보내는 김판서의 얼굴은 어둡다. 혼례는 그렇게 끝이 나고 모두가 축복하는 가운데 몽완과 이쁜이는 신방으로 향하고, 사랑을 맹세하는 서동과 서향을 태운 배는 수평선을 향해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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